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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이 주는 통증
앙증
2013. 10. 28. 12:02
불을 끄고 침대에 누으면 통이가 혼자 누워있던 철장안이 떠오른다.
혹시나 정신을 차리고 날 찾지 않았을까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체념하진 않았을까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몸서리치게 아픈 생각을 이어가게 된다.
'만일'은 상처를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무기다.
만일 내가 통이가 수술한지 네시간이 지났는데도 깨지 않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라면
만일 내가 중성화 수술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만일 수술보다 행동교정부터 시켰더라면
만일 내가 그날 통이에게 물리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날이 일요일에 아니어서 응급실이 아닌 동네병원만 다녀왔더라면
만일이라는 선택지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너무 많다.
통이가 지금도 내 곁에 있을 가능성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나는 그 방법을 선택했는지 스스로 묻고 물으며 자책을 거듭한다.
아침 눈을 뜨면 이제 더 이상 옥상문을 열어야 할 필요성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달걀 노른자 한알을 들고 가도 반겨줄 상대는 없다.
지체없이 현관문을 문을 나서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한시간씩 산책 시켜야 수고로움도,
퇴근 후에 이삼십분씩 인사해야 할 의무도 없다.
이제 더는 산책때 쓰려고 비닐봉지를 모으지 않아도 된다.
물어뜯기 좋은 자잘한 종이들도 그냥 폐휴지에 모아둘 수 있다.
근데 참 이상하지?
이런 거 진짜 하나도 좋지 않다.
아직도 날씨가 추워지면 통이 걱정부터 앞선다.
아무리 싫어도 새벽엔 옥탑방 안에 넣어둬야 했으니까.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통이가 생각난다.
오늘 저녁엔 산책을 가지 못할테니까.
언제까지 이런 기분으로 살게 될까,
내년 무더운 여름날. 나는 통이를 기억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통이와의 시간은
수정도 새로고침도 불가능한 마침표가 찍혀져 버린 과거란걸 체득한 채 살아가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게 싫다.
그렇게 되고 싶지가 않다.
왼쪽 어깨를 두번 툭툭 치면
앞다리를 얹고 자연스레 내게 안겨오던 애정과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었을 수많은 '만일' 때문에
지독한 자책은 스스로를 발라먹는 상처뿐인 걸 알면서도 자꾸 멈출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