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증 2014. 1. 8. 14:08

나이를 먹을 수록 감지할 수 있는 맛의 범위는 줄어든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수백개의 미각의 차이를 경험하고 맛을 깨닫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지할 수 있는 맛의 수가 급격하게 떨어진다고. 

언젠가 나는 공감을 다양한 맛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나이를 먹어가면 미각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인지할 수 있는 감정의 개수는 확장되는 것 같다. 
시야가 트이고, 사고가 확장되며, 이해의 범위가 넓어질 수록
타자를 통해 다양한 맛과 다채로운 색의 감정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살아가는 날이 많아 질수록 그 범위가 커져서 최근에 소소한 영화의 한장면까지 그렇다. 
이해 할 수 없었던 영화의 한 장면이 내 삶의 한 부분과 겹쳐지는 순간.
있는 듯 없는 듯 무의미했던 장면은  
떠올릴 때마다 콧끝을 따겁게 찌르는, 눈물을 시큰하게 뽑아내는
명장면으로 재탄생한다. 

얼마 전  <러브레터>의 한 대사가 그랬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건 
거무죽죽한 딱지처럼 떼어내고 나면 속시원할,
너덜거리는 궁상이고 청승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어느 순간 그 장면이 새롭게 보여졌다.  
잘지내냐는 안부의 인사는
이미 저세상사람이 됐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건네는 인사다.
알고는 있지만 차마 놓아줄 수는 없는 보내고 싶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
바꿀 수 없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걸쭉하고 질긴 마음들이 세상 천지엔 얼마나 많은가.   
그걸 '미련'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마음만큼은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물과 같아서 계획한 대로 흘르는 것이 아니니까. 

요즘, 간간히 버스타고 집에 가다가
오겡끼데스까의 의미를 혼자 곱씹어 봤다. 
자꾸 울컥하고 눈물이 나서 훌쩍이기도 해봤다.  
맵고 쓰린 통각에 가까운 맛이나는 '그 감정'에서는 꽤나 깊은 감칠 맛이 새어나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또 몇 장면을 새롭게 이해하고 
공감을 통해 새로운 맛을 경험하게 될까?

서른 셋에 펼쳐질 날들을 기다리고,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