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어보니 얼추 십년만이다. 금요일엔 대학 학생회관 동기들을 만났다. 자대 사대 소프트웨어대... 같은 전공 하나 없었지만 1학년 봄 총학선거때 만나서 대학시절 가장 긴 시간을 함께 하고 가장 많은 일들을 해온 애들이었다. 그 얼굴들을 다시만나니까, '아, 이제야'란 탄식이 나왔다. 숨이 트이듯 참아왔던 밭은 숨 같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하고 싶은 말을 할 사람들과 마주했다.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과정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지 말자고, 그러지 말자고 자기 부정같은 것 하지 말자고 수백번을 되뇌여도 실은 아픈건 아픈거다. 스물 하나 스물 둘에 꾸던 꿈들은 결국 미완으로 남았고,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때때로 나는 그것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디기 힘든 것 투성이인 것이 내가 사는 세상이고, 용납할 수 없는 허물 투성이인 나 자신의 일부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비슷한 꿈을 꾸면서 같은 것을 말하던 그들을 만나서 말을 하고 싶었다. 

구운 새우는 맛이 있었는데 소주가 무척 썼다. 해물라면을 시키면서 나는 2002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할 때 이야기를 꺼냈다. 마땅히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친구들이어서 말했다. 그때의 꿈을, 그때 그렸던 5년 후 10년 후를 이야기 했다. 

이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다.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그걸론 부족했다.
내게 필요한 건 나도 아프다고 나도 아파하고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들이킨 술잔의 숫자는 자꾸 늘어갔고 밤은 깊어지고 드문드문 비가 내렸다. 다같이 10년 전 꾸던 꿈을 조금씩 더듬어갔다. 화석처럼 남아 먼지를 거둬내지 않고서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흔적들... 그 흔적이 스무살 한 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보석같은 존재였는지... 그 존재를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는 수다는 계속됐다.  그리고 나는 나의 한 부분을, 날것처럼 내보이는 내 상처를, 그 선명한 통각을 경험하고 있는 친구들과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나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것이 없었다. 이만한 위안이 또 있을까. 아마도 위로 받을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토록 이 친구들이 보고싶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