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방송은 오래전부터 공감해온 주제지만,

솔직히, 지금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로 만들어낼 자신이 없다.

 

틈날때마다 피디에게 우리 프로그램으론 만들 수 없는 주제라고 말하다가

일요일에는 촬영장에까지 쫒아가봤다.

 

나에겐 그럴 싸한 이유가 필요했다.

 

도덕 교과서 같아서 허울은 좋지만 공감성은 훅 떨어지는 알량한 말 말고,

연민과 동정에 기대는 얄팍한 수법말고 길고 묵직하게 설득할 수 있을만한 이유. 

'개발 대신 보존이 득이 된다'라고 말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그 이유를 찾지 못해서 촬영장까지 쫓아갔다.

 

일요일 답사. 서주연 회원분들이랑 서촌 걸었다.

골목마다 있던 오래된 풍경을 허물어 버리고 자리를 차지한 음식점과 찻집들.

소음을 쏟아내고 먼지를 흩뿌리며 가정집에서 영업소,
변화가 아니라 변신을 시작한 공간.

사실 이런 장면은 우리동네에서도 셀 수 없이 반복되고 있는데 말이다.

 

보안이란 이름 덕분에 개발 광풍에서 무사할 수 있던 자리,

오랜시간 멈춰있던 존재들을 미뤄버리고 투자란 이름으로 괴물이 들어섰다. 

도로와 인접한 큰 길가에 가득 들어서기 시작한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화장품 가게.

알량하게 '스.타.벅.스'라고 한글로 쓰인 간판을 바라보면서 짜증이 나서 울고 싶어졌다.

 

사라지는 그 모습에 언제나 안타까워하면서

정작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길 주저하는 나를 되돌아 봤다.

 

'자본'보다 큰 가치를 찾기 어려운 곳이 내 고향이고, 이곳 사람들이니까.

당장 나의 수익을 만들어주는 임대료, 뛰는 부동산과 재개발 부지 선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외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가치를 보장해주던 세상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부디 이 땅에 수익과 이윤보다 소중한 무엇이 생겨나길.

자본이란 이름으로 허무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길.

더불어, 스물여덟해 동안 보고 사랑해왔던 우리동네 풍경들이 그만 사라지길.

 

시간이 멈춘듯이 여전하던 해인사 장경판전과 그 안에 여전히 담겨 있는 보물이 생각났다.
한 여름에도 손을 넣으면 서늘한 공기가 와닿던 팔백년 세월을 존재해왔고, 육백여년간 보물을 지켜왔던 그 공간. 지루할 정도로 여전한 공간.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한 가치를 빛내며, 그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들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해인사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