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뿐히 짐을 싸서 나가고 싶단 마음에

더빙 직전 여유시간에 그동안 취재했던 자료들을 파기했다.

 

자료를 파쇄하다 보니 1년간 있었던 일들이 눈에 보인다.

 

특별수사까지 들어간 자원외교는 왜그렇게 흐지부지 끝났을까?

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 출근을 하고,

오십시간 동안 두시간 반 잠을 자고,

하루에 두세번 국회의사당 의원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나랑 피디님은 정말이지 과로사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었는데..,

 

모 프랜차이즈 고발은 작으나마 유의미한 결과를 남겼다.

본사의 변화와 반성도 보였고, 시청률도 나쁘지 않았고  

일을 마치고 보람을 만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가장 속을 많이 썩인 에이즈 자료들이 보였다.

프리뷰 노트 위 인터뷰이의 얼굴이 캡쳐돼 남아 있었는데

이미 목숨을 끊어 돌아가신 분이었다.

방송이 끝나고도 보도자료에 고발에 소송장에 투덜대기 여념이 없느라,

곱씹을 여력이 없었다.

피디 대신 나간 인터뷰. 커피숍에서 카메라가 꺼졌을 때

'나같은거 살면 뭐해' 라고 되뇌이던 그 분께,

내가 만든 방송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었나,

왜 나는 진작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못했을까?

 

출근한 첫날 들이민 아이템을 반년 묵혀놓다가 프로그램으로 만들었고,

더빙하는 날까지 납득하지 못하는 아이템을 방송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취재 하다보니 취재 대상이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운 친척과 관련돼 있기도했다.

 

돌이켜보니, 지금 정리하는 내 자리는

방송을 막 시작했을 무렵, 언젠간 저곳에서 일하겠지 하고 생각했던 자리였다.

손에 잡히는 꿈이었던 셈이다.

그 예상가능했던 목표에 도달해서 보낸 시간 13개월.

방송은 총 7.3회.

이중 네개는 만족스럽게 제작했다.

 

박스로 한상자는 나올만한 분량의 자료들.

쉬지 않고 종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갈리는 것은 아쉬움이고

가져가는 것은 이곳에서 배웠던 것들이길.

그리고 이 자리를 비우는 나는 조금이나마 더 성장했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