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던 동네에 이사 온 건 여섯 살 때 일이다.
예전 우리집도 그랬고 그땐 동네엔 2층짜리 양옥집에 2층 끝엔 베란다가 달리고 정원이 딸린 집들 천지였다. 그 중 유달리 높다란 담을 커다란 주차장을 자랑하는 집도 있었다.
 

5월이 되면 동네 곳곳에 커다란 안내문이 붙었다.

"어린이날을 축하합니다.
어린이들은 5월 5일 9시까지 쌀집 앞으로 오세요."
 
아침 9시까지 가면 정말 온 동네 수백 명의 꼬마애들이 줄을 서서 '송회장네'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받아서 돌아가고 그랬다. 누런 봉투 안에는 대단한 것이 들어있진 않았지만, 사또밥 한 봉지 연필 한 다스 노트세트 같은 정성스런 선물이 들어 있었다. 욕심쟁이 우리 할머니는 우리 삼남매가 받아온 것도 모자라 하나 더 덤으로 받아왔고...

봄이면 하얀 목련이 만개하고, 좀 지나면 라일락 향이 진동을 하던 커다란 2층집.
어린시절 <빅토리 비키>같은 만화책에 심취해 있던 나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내가 그 집에서 사는 상상을 해보고, 혹은 그 집이 친척집이여서 찾아가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었는데...

중학교 땐 그 집 손자가 동생의 동창이 됐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선 그 집 손자가 동네 아는 동생이 되었다. 한 동네 살다 보니 만나고 마주치며 커다랗고 대단해 보이던 집도 시시콜콜 사람 집이었고, 더 이상 신비로울 것도 없고, 환상적인 포장 따위 벗겨진 집이 되었지만
 

오늘 동네 그 집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거창하지만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현재의 나를 결정 만든 것이 '과거'와 '기억'이라면
매번 '기억'이 지워지는 순간을 체험하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언젠가는 나 역시 부질없이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미리 체험하는 일이니까.

사방 천지 새로 것들 사이에서 애써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덧없고 쓸쓸하고...

아주 작은 기억조차 허락해주지 않는 매정한 서울 대신 오래도록 변치 않는 느리고 다정한 고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소용 없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