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마흔살

20세기 소녀 2021. 12. 31. 09:38

 올 한해는 매서웠다 

계획했던 일들 중에 몇가지가 틀어지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서 너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겪어가며 생채기가 나야 했다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해야한다는 강박과 의욕이 없음 사이에서 괴로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살아냈다 

그 언젠가 네가 썼던 촉잔도권의 그림에 관한 글 처럼 

마흔살을 살아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니 어땠니?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자랑스럽지?

다른 사람 그 누구도 아닌, 네가 살아낸 너의 인생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네가 버텨낸 너의 시간이다. 

 

올해 너는 독립을 했다

비싸진 않지만 네 취향에 꼭 맞는 집을 만들었다 

스위치 하나 문손잡이 하나 책장의 크기와 색깔 

수배의 값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만큼 꼭 네 마음에 든다. 

오래 계획했고 마음속에 묵혀오고 머릿속으로 늘 떠올리며 다듬었다 

그리하여 다시보니, 얼마나 마음에 드는 공간이 너의 소유로 남았니. 

조급하지 말자

시간은 돌아온다. 

 

올 한해의 깨달음을 잊지 말자

네가 날카로운 칼이 될 때는 그것이 너를 향한다고 생각해보자. 

꼭 같은 직군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네 식구 처럼 여기자.

 

언젠가 다음번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더라도 

그럼 분명 지금보다 좀 더 수월히 살아낼 수 있을것이다

이미 겪어봤던 매서움이니까 

 

고생했다

마흔의 네가 자랑스럽다 


안녕 연남장

20세기 소녀 2021. 8. 27. 14:28


안녕 연남장

지금 나와서 이 글을 정리하는 곳은 연남장.
나는 이곳을 몹시 사랑했다.

이 공간을 알게 된 것은 그 옛날 유리공장이 있던 시절부터지만, 그건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수십년 전 그 시절이니까. 그 이야기는 살짝 제껴두고.

이곳을 제대로 사랑하게 된 건 작년 여름 무렵이었다. 해가 뜨지 않고 습하기만 하던 작년 여름은 어찌나 숨이 막히던지. 그 와중에 코로나 특보로 방송은 심심하면 죽곤 했다. 출근하지 않는 일주일 중 사흘을 집에서 보내는 것도 버거운데 방송이 죽어서 집에만 있는 날이 빈번해졌다. 그 와중에 옆집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 아침 일곱시 반부터 들려오는 소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람이가 이곳을 알려주었다.
동네 오가며 이곳을 봤을 땐 場이라는 한자를 크게 써둔채 오랜시간 공사를 하길래 숙박 공간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근사하게 리모델링해서 1층은 커피숍 2층 일부는 공유오피스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말을 포함한 24시간 언제든 이용 가능 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집에서 도보 6분 거리... 그야말로 일하다 말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돌아올 수 있는 완벽한 시공간...

일주일에 출근하지 않는 사흘, 그리고 오전 출근하는 날 잠시 들렸다 가는 용도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뭔가 써볼까 하고 자료를 잔뜩 공부하기도 했었고, 알바가 들어오면 출퇴근 틈틈이 완성해서 리모델링비에 보태기도 하고. 그리고 막상 할 일이 없는 날엔 통창을 배경 삼아 넋을 놓기도 했었지.

나는 이곳에서 커다란 창문이 선사하는 4계절의 향연을 만끽했다.
겨울 어느 날이던가, 함박눈이 오던 날이었다. 여의도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방향을 바꿔 연남장에 들렀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눈이 오는 소리를 한참 듣고 일어설 정도로, 나는 이 공간이 주는 사계절의 기쁨을 잘 만끽해왔다.


매미의 노래, 낙엽이 지는 소리, 어두운 밤을 밝히던 함박눈의 냄새, 창문을 열면 스며드는 아카시아꽃들의 체취...

백수가 된 뒤, 이곳을 거점 삼아 집 공사를 하고 아르바이트 다큐도 몇 편 말았다. 잠시 기획했던 프로그램을 정리하고 나온 뒤 갈 곳 없던(?) 나를 받아준 것도 바로 연남장. 오래도록 이용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다니 아쉽지만, 훗날 내가 어떤 공간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대체 공유오피스에 어떻게 카스텔리106 정품 (심지어 빈티지도 아님) 이 서너개, 허먼밀러 임스체어가 놓여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의자가 어울릴만큼 한가하고 한산했고,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그 한산함 때문에 문을 닫는다는 건 이 부동산에 미친 서울에서 예상한 결말이 가능한 일이었고 1년간의 소중한 경험을 뒤로하고
이제 또 인사를 할 차례다.

안녕 연남장
이곳 밖을 내다보며 그리던 꿈들이 무척 그리울거야.


달빛

20세기 소녀 2018. 7. 28. 15:26

 

 

월요일부터 지금까지

조성진의 드뷔시 달빛을 듣고 또 듣고 있다.

 

조성진이 연주한 이 노래는, 막 귀인 내가 듣기에도 너무 해석을 잘해서

지금까지 들어온 달빛과는 전혀 다른 곡으로 들린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아득하고 아득하고 막막하고.

지난 15년이 휘엉청 달이 뜬 깊은 밤 꾸던 꿈결인것 마냥,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이 일이 믿을수 없는 꿈인것 마냥 싶어서,

 

그 짧은 곡 하나에 

언젠간 내가 꿈꾸던 환희와 선거때마다 계속되던 절망.  

그리움과 애틋함이 모두 다 들어 있어서

이 연주를 재생하는 동안 울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여튼 그래도 오늘은 용기를 많이 내고,

이별을 말해야할 때다.

 

 

잘가요.
십오년전부터 지금까지 내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거라 믿었던 사람.
내내 믿고 좋아했던 사람.

 

사실은 잘가란 말이 너무 하기 싫었어.

사람이 아무리 가진것 없고 보잘것 없어도

꿈 하나는 쥐고 살아야 하는데,  이제 뭘 어쩌고 살아야 하나

우리는 너무 막막해.

 

그렇게 떠나버린 당신이 아니라 남겨진 우리가 너무 불쌍해.

 

그래도 뒤돌아보지 말고 잘가요.

그곳에선 온전히 당신 하나만을 위해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잘가요, 너무 고마운 사람.

 

돌이켜보면 일찍 당신을 알게 되어서,

오랫동안 당신을 좋아할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참으로 다행이었죠.

 

 

지구에서 달까지 38만 4000km라는데,

07년도 소나타를 타고 대한민국 방방곡곡 힘없고 초라한 우리들 보러,

11년간 당신이 달렸던 거리가 달에서 지구를 넘어선 거리 40만 1000km라는 이야길 들었어요.   

 

복작한 이곳을 떠나 그곳에서 가 있어요.

다 잊고 잘 쉬고 있어요.

너무 보고 싶을 땐 <달빛>을 틀고  달을 볼게요.

 

이젠 정말 안녕.

 

 


2018.07.23

20세기 소녀 2018. 7. 24. 13:53

오늘은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나만큼 아프지 않은 사람은 어떤 말이건 내게 건네선 안됐다.



왜 고작 4000만원 이었을까. 

뭐 그리 보잘것 없었나. 

그렇게 마지막까지 초라해야만 했나. 

당신이 평생을 바쳐 싸운 그 사람들 처럼, 

당신도 그렇게 보잘것 없고 초라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그래.

오늘 조문 행렬에는 아직도 현장에서 제 목숨 내놓고 싸우는 작고 보잘것 없는 이들이 참 많았다. 나는 그 줄을 보고 울었다. 화려한 화환과 누구나 들으면 알아줄만한 으라짜짜한 정치인의 이름이 아니라. 투쟁 조끼를 벗지 못한 활동가들과 전동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과 검게 그을린 노동자들을 보고 울었다.국화를 놓고 엎드려 두번 절하며 울었다. 원통함에 새어나오는 소리를 입을 막고 울었다. 



그래. 

그게 당신이었다. 스물두살 알게 되어 당신을 따라 당적을 옮겼고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가장 먼저 이름을 대었던 당신. 진보신당을 나가 다른 당적을 가지고 의원이 되었을 때 내가 보낸 축하메세지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감사를 표하던 당신. 그리고 서른 일곱살 일터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당신. 선물이라며 건넨 커피 한병에 깍뜻한 인사를 표하던 당신. 


당신은 보잘것 없고 초라한 우리팀에서 가장 반짝이던 사람이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팀의 간판 스타였다. 4번타자며 센터였고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남들이 볼땐 가난하고 남루한 우리. 승률도 내지 못하는 가난하고 남루한 진보정당. 그 가운데 당신은 내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정치인이었다. '당신'이 바로 '우리'였다. 우리의 보잘것 없음과 초라함을 당신은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우리'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토록 초라해서였을까. 변변찮고 모자라서인가.
고작 사천만원. 누군가는 피부과에만 몇억씩 쓰는데
고작 그 돈때문에 우린 당신을 잃어야 했나.
당신을 이런 일로 잃을 만큼 우리는 대단치 못한가.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두렵다.

당신과 함께 내가 꾸던 모든 꿈이 떠나갈까봐. 두번 다시 꿈을 꾸지 못하게 될까봐. 그게 무섭고 아득하고 서러우며 애통하다. 

그럼에도 간절히 당신의 평안를 빌고 또 빈다.


잘가시라. 

평안히 가시라. 

‘당신’이 ‘우리’였던 것이 큰 위안인 시간이 있었다. 

너무나 자랑스럽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너무나 참담하게 되새긴다. 

 

 

 


안녕

20세기 소녀 2018. 2. 26. 18:16

스케치북에 패널들을 향한 마지막 워딩을 썼다.

 

"마무리!!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15분이란 시간을 잘게 쪼개
패널 여섯명이 고루 말할 수 있게하고
유물에 관한 정보를 더하고
스케치북으로 패널들과 신호를 주고 받는 일은
오랜 습관 같은 나의 역할이었다.

 

후토크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당신의 마음의 불을 밝혀줄
단 하나의 보물에 투표하세요"

내가 쓴 파일럿 첫 스튜디오 멘트가 MC목소리를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2016년8월- 2018년2월
뜨겁게 몰두했던 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함께 만들지언정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았던 '내' 프로그램이었다.

유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꿈꾸듯 몰입했던 1년 6개월.
이렇게 꾸었던 꿈 하나를 이루고 떠난다.

 

후회 없이,

안녕!


Moon river

20세기 소녀 2017. 7. 20. 12:13

 

넷플릭스에 <비긴 어게인>이 올라와 있길래

우연히 시청했다.

3회까지 아일랜드라고 들었는데

나 저기 알아! 박수치고 손뼉치고 아는 척 할 수 있을만한 장소가

가득할테니까.

 

아...

안그래도 골웨이 펍과 골목을 보면서 떠올릴 기억들이 한가득이었는데..,

왜 하필 선곡은 그 여행 내내 아프리카에서 듣고 또 듣던 노래들이었을까

그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아일랜드로 날아갔었는데 말이다.

Moon river, Some Where Over the Rainbow, wonderful World....

 

올라가고 내려가는 음색 따라

나는 한 때 내것이었고, 기억하는 한 여전히 내것인

수백 수천 수만개의 세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시야에 가득차던 넘쳐나던 풍경.

내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것만 해도 넘치던 세상.

온 우주에서 나와 그 많은 수다를 떨어주던 보름달.

그 달이 만들어주던 밤하늘 빛의 다리.

초원으로 향하던 이른 아침 나는 저 멀리 뜬 무지개를 보고 

주체하지 못한 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세렝게티 초원 투어 텐트 촌에서도 만난 

짙은 어둠 속 무수히 많은 별들은 아마도 아직 그자리에 서 있겠지...   

 

그 여행, 가져간 노래들은 탁월한 선곡이었다.

어디서든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는 그 노래들은

언제든 나를 다시 그 땅으로  보내줄 수 있으니까

차마 말로 표현 못할 풍광의 강을 다시 건널 수 있게 해줄테니까.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Wherever you're going, I'm going your way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waiting around the band 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

 

 

 

 

 

 

 

 

 

 


무제

20세기 소녀 2016. 9. 3. 11:20

생각해 보니, 프랑스 요리가 그랬다. 낸둥 구워나온 커다란 대파, 흰 크림에 뿌려진 후추, 핑크색으로 물든 육회... 겉보기에 이상한 조합이라, 이질감이 잔뜩 드는데, 한 스푼 뜨고 나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주방에 있는 요리사에게 너는 마법사야 기적을 창조해. 트리비앙! 세봉! 델리셔! 아는 단어를 다동원해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그애랑 만남도 이질감에 연속이었다. 그리곤 만나고 나면 곱씹고 곱씹을 만큼 황홀한 기억이었다는 것을 꺠닫게 된다.

36도를 넘나들고 체감온도는 40도를 오고가며 그런 지옥불구덩이가 20여일 가까이 지속되며, 전국민이 건드려만 봐라 불쾌지수에 쩔었던 그 여름. 그애는 나랑 전시회를 가겠다며 긴팔 흰셔츠를 갖춰입고 26인치 캐리어와 60리터 배낭을 들고 나타났다. 신도림에서 한참을 헤맸지만 마닐라 교통체증보다는 나았다며, 사람으로 터져나갈듯 붐비는 홍대전철역에서 땀범벅에 활짝 웃고 있었다. 언덕을 오를 때 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크게 웃으며 뛰어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생소했던가. 그 즈음 대한민국 사람들 전체는 누구라도 하나 걸려봐라 가슴속에 화염방사기를 하나씩 품은 상태였었다.

그 말도 안되는 상황이 너무 낯설어서, 나는 그냥 너털 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세월호 노란 천막이 나부끼는 광화문 광장에서도, 세종문화회관 안 네스카페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틈에서도, 미세먼지가 잔뜩 껴 노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한강 강변에서도, 사람들이 바글대는 망원시장 안에서도, 모두 똑같은 메이크업을 한 20대들이 바글대는 삼거리 포차에서도 그 애는 항상 낯설고 실감 안나는 상대였다. 내 옆에 혹은 마주 앉은 긴 갈색 고수머리는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의 하나였으니까.

 

나는 너에게 뽀뽀하고 싶은데, 버스에서는 그러면 안돼? 

왜 이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야?

 

일요일엔 안된다고 타일렀는데, 화요일엔 그냥 웃고 말았다.

우리가 앉은 버스출입문 바로 뒷자석엔 가림막이 있었고, 가림막이 없었더라도 나는 웃었을 것이다. 이게 마지막일 걸 알았으니까. 그 애는 졸립다면서 부둥켜 안은 채로 잠이 들었는데, 달게 자는게 괘씸해서 '나는 사라질거야'라고 말했더니 '안돼!'라며 도망못가게 나를 옭아매 안았다.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데, 곧 떠날 것은 이 애고, 이 비현실이란 것을. 그럼에도 이 애가 알려주는 구나. 순간에 충실한 애정이란 게 이런 거란걸, 그것이 이만큼의 충만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단 걸. 떄론 찰나가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어 영원에 가까워 질 정도로 빛날 수 있단 걸.

 

홍대로 향하던 버스 밖 풍경은 곧 비를 뿌릴 것 같이 어두워졌다. 내 생애 이런 순간을 앞으로 몇번이나 더 가질 수 있을까. 사라질 것은 내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낯설고 이질적인 순간들이었다. 사실은, '사라지면 안돼.' 라고 말해야 하는 건 그 애가 아니라, 나였다.

그럼에도 그애가 안된다고 말해줘서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기나에게

20세기 소녀 2016. 4. 8. 10:57

우리 기나 잘지내니?

거기는 잘 적응했는지 모르겠다. 한국은 봄이라는데 미세먼지가 장난아냐. 우리 작년에 같이 세브란스 12층에서 이대부고도 안보인다 뭐라 했었잖아. 그 농도 그대로. 매일 건조하고 목 아파. 봄이라는데 하늘도 안 파래. 시야도 안나와. 여튼 여긴 여전하다. 니가 없는데도 말이지.


어제 너희 가족들로부터 네 사진을 받았어. "엄기나가 잠든 곳" 일곱글자가 써 있더라. 나 있지.., 또 주책맞게 또 펑펑 울었어. 지금 넌 훨씬 아프지 않고 기분 좋게 있을걸 아는데, 그냥 그렇게 써있는 그대로 니가 정의 되는게 싫었나봐. 이렇게 끝난 게 아니라 뭔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을 것만 같은데 그게 아닌 '끝'이어서 그랬나봐. 돌에 새겨진 그 글자가 깊고 단단해서 이젠 수정할 수도 없다 싶어서 막 자꾸 눈물이 났나봐.

기나 이번 이사간 새 집은 둘러 봤니? 그때 너도 지켜봤는지 모르겠다. 너 발인 끝나고 있다가 몇 명 착출돼서 니 이사짐이랑 물건 정리 했는데... 정리하면서 니 얘기 진짜 많이 했어. 다 들었니? 그때 우리 옆에 있었던 거 맞지? 재작년 태국서 사온 로레알 나이트 크림 박스채로 세개, 일년에 한 번 다 쓸까 말까 한 태국 코뻥 새걸로 여덟 개, 뜯지도 않은 락앤락 한 세트... 한 개에 스무번은 쓸 수 있는 빨아 쓰는 행주가 수백장 나왔을 때 우리 다같이 웃었어. 아오 엄기나! 이 기집애 백살까지 살려고 했나봐!!

포장도 뜯지 않은 새거가 너무 많아서 중고 나라에 팔자니까 니 애인겸남편이 그럼 기나가 진짜 화낼거라고 우리보고 가져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야무지게 챙겨왔어. 요즘 난 니가 주고 간 선물 중에 이니스프리 팩을 젤 열심히 쓰고 있어.
기나야.

니가 남겨두고 간게 진짜 진짜 많아. 두고가기 싫었을 것들도 참 많아. 다 니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었잖니. 그리고 이젠 우리도 알아. 거기엔 니가 두고 간 '우리'가 있다는 거.
작년 일 년. 너는 나에게 경이로운 사람이었어. 쇼핑박사에 맛집박사. 평범하고 소소한 것에 행복해 할 줄 알았던 니가, 그렇게 용감한 사람인지 진작 몰랐었어. 나는 지금도 니가 놀라워.
어떻게 그렇게 용감 할 수 있었니?
그렇게 외롭고 힘든데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어?

발인 끝나고 버스가 세브란스 돌아오는데 우리 고1때 아침마다 마주쳤던 버스정류장 있잖아. 그걸 찾을 수가 없더라고. 영진쌤 차 놓치게 되면 73번 135-2번 탔던데 말야. 꽃은 똑같이 피었는데 그 정류장은 없더라고. 생각해 보면 우린 열일곱부터 열여덟번의 봄을 같이 보냈는데. 내가 앞으로 살아갈 봄엔 니가 없구나. 그제서야 실감이 났어.


있잖아, 기나야. 난 너한테 고마운게 참 많아.
병문안이랍시고 가서 시시콜콜 세상사 욕하면 다 들어줬지. 그때마다 내 편이 되어 줬어. 맛집이며 가봐야할 음식점이랑 사야할 물건도 빠삭하게 알려줬었지. 니 덕분에 섭외가 수월하게 풀렸던 적도 많았어. 선거도 그랬네. 내가 민노당 진보신당. 힘들다 투정부리면 고생많다면서 별 설명 없이도 한표 찍어주겠다고 약속해줬잖아.
나 몰타아프리카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약속도 지켜줬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만 덜렁 남겨 두지 않으려고 지난 일년. 숨막히게 길고 아픈시간 열심히 싸워줘서 고마워. 넌 정말 용감하고 멋진 여자였어. 아프고 힘들었던 기나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용기 있는 기나로 기억할 수 있게해줘서 고마워.

다음달이면 외국 나가 있는 애들 몇 돌아오는 거 알지? 우리 모여서 기나 너 만나러 갈게. 우리 오래간만에 '이빨까는' 거다? 기다려줘. 나도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 기나 너무너무 사랑해.

 

 


20150416

20세기 소녀 2015. 4. 16. 10:52

 

삼일 지나 소식을 들었다.

하필 이처럼 많은 죽음에 대해 묵념해야하는 날...

 

 

잘가세요. 영감님.

 

당신과 함께한 2011년 남미 여행은 정말이지 잊지 못할 추억이었어요.

60일 혼자 하는 여행 중, 저는 당신의 두꺼운 책 세 권을 세 번이나 정독했죠.

 

남미 땅 가는 곳마다 당신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죠. 덕분에 나는 흥분하고 분노하고 울컥 하고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어요. 아메리카 대륙에 새겨진 이제는 화석같이 남은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그때마다 당신의 걸진 당신의 해석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짜릿했는지 보이는 것 이상의 순간들을 체험했는지 몰라요.

 

 

내 방 한켠에 <불의 기억>이 꽂혀 있는 한, 당신을 보낸 것이 아니라고 믿어요.

작가는 자신의 글이 읽히는 한' 작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숨을 내뱉고 살아 숨쉬는 존재니까요.

 

당신의 새로운 여정에 축복을!
우리는 곧, 또 만나기로 해요.

 

Senor. Eduardo Hughes Galeano! 
Hasta luego! Mucha Suerte, su nuevo trayecto!

 

 


20세기 소녀 2014. 10. 31. 14:08

누군가 덥썩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곤 같이 추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출 줄 모른다고 말했지만, 이미 시작돼 있었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꼬았다 풀었다가를 몇번 반복하면서
밀짚페도라를 쓴 190은 족히 될만해 보이는 꺽다리 친구는
자신을 독일에서 온 요한이라고 소개했다. 

나같은 몸치가 과감하게 그 친구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건
건너 섬에는 번개가 치고 있고, 바람이 시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행으로 같이간 동생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누나, 한국에는 이런거 없어요."

그래, 그말이 맞다.
번개가 치는 바닷가에서 춤 출 수 있는 밤 따위 한국엔 없다.

춤을 추는 사이사이,
찰방찰방 때로는 발밑에서 때로는 무릎까지 파도가 부딪히고 채였다.  
번쩍 번쩍 클럽의 미러볼 대신, 건너편 섬에 번개가 내리쳤다.

요한은 엄청 능숙한 리더였는데,
10분 넘도록 넘어질듯 넘어지지 않으면서 춤을 출 수 있었고
스텝은 꼬이는 듯 하면서 단 한번도 꼬이질 않았다.

예거빔의 기력이 다했을 때 결국 나는 바다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것조차 너무나 유쾌해서 우린 한참 배를 잡고 웃었다.

어제 주기자가 스윙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나쁘진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쿠바에 간다면
울띠마, 노체, 베사메가 주는 안타까움을
짧은 스페인어로 더듬거리기 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 같다. 

간신히 몇걸음 떼는 것이 아니라,
십분, 이십분, 한 시간...
 춤이 길면 길수록, 나는 그 밤을 오래도록 찬양할 수 있겠지.

삶은 짧고, 순간순간이 귀하다.


어른의 노래

20세기 소녀 2014. 10. 28. 11:07
나에겐 언제나 어른의 노래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라디오를 듣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노래들. 

가사는 과잉이라고 할만큼 호기로움에 가득차 있었고,
세상엔 인정해주지 않는 가치라 할지라도
하나를 향한 열정이 충분이 값어치 있음을 말하곤 했다.
아직 네가 이루지 못한 젊음이란 이런 것이고,
네가 어른이 되면 이런 세상을 만날 거란 걸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스무살이 됐지만 그의 노래에 등장하는 어른은 되지 못했다.
토익점수와 스펙 같은 단어가 등장할 때 '학번'을 부여받은 세대였으니까.
존재에 대한 탐구나, 낭만, 열정 같은 단어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들으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어. 언젠가 저런 어른이 될 수 있을거야.
언젠가 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될거야. 

안녕히 가세요.
당신이 노래를 불러줬을 때
나는 그런 젊음을 꿈꿨고, 그것이 실재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실재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통이가 죽고 난 지 오늘로 꼭 한달이 되었다.

동물병원으로부터 통이의 사망 소식을 전해진 건 
영화 <그래비티>를 조조로 보고 나온 후였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하는 당위'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난 직후에
내가 맞닥드리게 된 이 상황은 너무 야속했다.
클리셰라면 너무도 지독하게 뻔한 클리셰같은 상황에 약이 오르고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두고 떠나가버렸다는 것을
지난 한달간 되새기며
나는 단 하나만이라도 찾아내고자 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통이가 내게 두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답 대신 기억나는 것은
통이를 사랑하면서 내게 찾아왔던 기적같이 놀라운 변화였다.
 
통이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나는
폐지 줍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숨차하는 늙은 치와와가,
추운 겨울밤을 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부리로 쪼아대는 비둘기 한마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은 내가 통이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가득했고,
나는 마치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그들의 존재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대로 나는
통이가 내게 두고 간 것이 무엇인지 영영 찾지 못할지 모른다.

그래도
태어나 딱 한 번 살다 죽는 삶 속에서 무수히 많은 만남과 작별을 경험하고
탄생과 소멸을 지켜보면서 사랑스런 존재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사랑할 무언가를 찾아내고, 그 보석같이 빛나는 순간을 간직하는 것.

그 깨달음이 
작고 귀여웠던 모습으로 처음 내게 왔던 우리 통이가
언제나 내가 위로를 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줬던 우리 통이가
내게 두고간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망실문

20세기 소녀 2013. 11. 19. 14:23
반려견 화장터는 급조한 펜션같이 생겼었다.  
어색한 가구배치, 과한 실내장식, 요즘 유행하는 페인트 색깔이
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곳임을 알려줬다.
 
이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또치야 얼른나와'
'몽아 너없음 엄마는 어떻게 살라고 그래' 같은 악다구니가 새어 나왔다. 
그 마음이 어떤지, 어떨지 너무 잘알아서 중간 중간 입술을 꼭 깨물고 울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심장이 꽉하고 죄는 느낌이 들 땐 주먹을 꼭 쥐고 꾹꾹 누르고 또 눌렀다.  

통이가 들어갈 수 있는 관은 아직 준비중이라 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가방에 담겨 있는 통이의 앞발을 꺼내서 꼭 잡고 있었는데, 
생각이 하나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수백번 수천번 손손 하고 말 해도, 아무리 울며 불며 떼를 써도  
이제 통이는 두 번 다시 내게 앞발을 내줄 수 없다.

통이의 발은 너무 차갑고 둔탁했고, 
싸구려 인조모피로 한번 감은 플라스틱 마냥 딱딱했는데,
그 감촉이 너무 낯설어 서럽고 한스러웠다. 

온기가 다시 돌아오진 않을까 
통이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는데 좀 처럼 덥혀지지 않았다. 
언제나 따뜻했던 통이의 체온이 아득히 멀어짐을 느끼며,
문득 심노숭이 썼던 망실문의 한구절이 떠올렸다.


유세차 임자 5월 27일 망실 유인 완산 이씨가 집에서 죽으니
나는 그 목소리와 얼굴이 점점 멀어짐을 슬퍼한다.


퉁퉁부은 눈을 간신히 떠서 화장터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통이가 내게 주었던 모든 것과의 이별을 인지하고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일년 반.
봄 한 번 겨울 한 번 여름 두 번 가을 두 번.
통이는 까탈스러운 강아지였다.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겁쟁이였고
죽기 한달 전쯤에야 비로소 나와 눈을 마주쳐주기 시작했다.  
조금만 혼내도 이빨을 드러내며 예민한 강아지였지만  
그래도 온 힘을 다해서 깨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리와 이리와 라는 말은 듣지 않았지만
내킬땐 언제나 무릎에 걸터앉아 내가 쓰다듬는 걸 기다리곤 했다. 
  
우리집에 온 순간부터 통이에겐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밀린자욱이 한줄 있었는데,
결국 올 여름에는 그 주변부로 털이 빠져나갔다.
몇몇 사람들에게 보기 흉하단 소리를 듣긴 했지만 
사실 그런건 통이를 사랑하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통이는 생김새와 상관없이 너무나 사랑스런 '우리 개'였으니까.
오히려 잃어버려도 금방 찾을 수 있는 표식이라고 말하곤 했다.

온기가 떠나가버린 통이의 손을 매만지며
나는 만남과 이별의 '거리감'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무언가와의 만남이 '공간의 접점'이라면 이별이란 '거리의 멀어짐'이다.   
통이는 이미 나를 스쳐지나갔고, 통이를 사랑했던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시간이 흐르고, 삶을 살아가면 살아갈 수록 
그 시간들과 나는 점점 더 멀어지겠지.

시간을 보낸다는 건 수없이 많은 작별의 연장선이고, 
삶을 산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두고 떠나가는 길이다.      
  

강화도 반려동물 화장터에서 돌아오는 길은 몹시 추웠다.
20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3분 차이로 놓쳐서 멍하니 정류장에 서 있어야 했다.
나는 통이가 담긴 유골항아리를 끌어 안고 있었는데 
그림자는 마치 나 혼자만 오롯이 서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문득 세상 어떤 것으로도 이 외로움이 해결되진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낯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는 길잃은 어린애 처럼 정신없이 울었다.

<망실문>

유세차 임자 5월 27일 망실 유인 완산 이씨가 집에서 죽으니
나는 그 목소리와 얼굴이 점점 멀어짐을 슬퍼한다.
이제 꿈에서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
애통한 마음에 한을 새기고 뱃속에 아픔을 담아두노라.
그대 죽음이 진실로 슬플진대
살아 있은들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멀고 아득한 시간 속에 한바탕 꿈이로다.

그대 먼저 먼 곳을 구경하오.


통이통이

20세기 소녀 2013. 9. 26. 16:19


며칠전
여동생이 통이 산책시키는 길
여동생으로부터 10미터 뒤정도에 막내동생이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사이 한 행인이 
'뭐 저렇게 생긴 개가 있어'라고 뒷말을 하는 바람에 
막내동생에게 굴욕과 수치심을 선물해준 준 통이... 




이딴 3000원짜리 다이소제 싸구려공이 선물이라고 가져온거냐며  
지켜보는 눈 앞에서 5분만에 갈기갈기 찢어버린 통이 




 
그럼 7000원짜리 탱탱볼은 어떻냐며 건넸더니
소가죽 농구공 아니면 취급하지 않겠다고
받은지 5초만에 '뻥!'소리와 
미키마우스의 웃는얼굴을 갈기갈기 터뜨려버린 통이.





요즘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기력하다며
우울함을 해소중인 통이






누나가 옥상에 앉아서 책좀 읽겠다는데
기어이 누나 자리를 빼앗아 위협하는 통이





그래도 너무너무너무너무 사랑하는 통이. 
전우주를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우리 개.

그들 덕분에

20세기 소녀 2013. 8. 24. 21:13

어제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여의도에 다녀왔다.
국민은행 건너편을 걸어가는데
문득 클리셰라고 하면 클리셰고
진부하다면 진부하다고 할 지독히도 판에 박힌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반팔티셔츠 반바지 스포츠 샌달에 대게는 안경을 끼고 까맣게 그을린 피부
팔에는 집회 유인물을 잔뜩끼고 짐은 이동에 방해되지 않는 작은 검정스포츠백
외모는 초라할 지언정 언제나 생글생글 활기찬 표정으로 다니며  
학교와 학교를 연결해주고 집회를 소통시키는 역할의 여대생
(때로는 여대생 처럼 보이는...)

새내기 시절에는 까마득한 학번의 선배의 얼굴이고
조금 지나서는 동기의 모습이며
때로는 안쓰럽고 짠한 후배의 얼굴이 되기도 했던 모습. 

사람의 인생이 아주 작은 만남으로 인해
부딪히고 반응하며 변화하는 과정이라면

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그네들은
나의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그 변화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사소했나?
아니면 너무나 커다래서 지금도 반응을 거듭하고 있을까?

그들 덕분에 나는
정부를 믿지 못하고
세상 모든 가난과 질병은 인간 사회탓이라 합리화 하며 
가진자의 것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 아닌가 늘 의심하고
느리게 걸음하는 질서에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이 안달복달 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제상 속에 작은 부품이 아닌가 의심하고 
이것이 맞는 일인지 언제나 반추하고 되짚어 보며
늘 죄스럽고 조금 덜 죄스럽기 위해 노력하는게 아닐까?

그들로 인한 변화가 언제까지고 계속 되길 바란다.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지만, 
<바보 과대표> 그 노골적이고 그래서 촌스럽지만 그럼에도 솔직한 낡은 시집이
 내 책장 바로 맨 앞에 꽂혀 있는 동안엔...




 


친구 만두는 김조광수 감독의 결혼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가장 행복해야할 날이 투쟁처럼 비장해서,
그게 너무 마음 아팠다고 한다.

누구나 누려야 할 것인데, 
고되게 싸워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싸움을 놓아서는 안된다. 
포기해서도 안된다.

세상사 허무한 것 투성이라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
아무리 무수한 뒷걸음들이 있다 하더라도, 거대한 한 발짝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요즘엔 그런 싸움이 필요한 때를, 그런 싸움이 필요한 곳을 떠올려본다.  
물러서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필요한 때다.  


시민들이여, 우리의 19세기는 위대하지만, 20세기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낡은 역사를 닮은 것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정복, 침략, 찬탈, 국가들 간의 무력 대결, 어느 왕의 혼인으로 인한 문명의 중단 사태, 세습적 폭정의 탄생, 국제적 협잡에 의한 민족들의 분열, 왕조의 붕괴에 뒤따르는 나라의 분할, 무한의 다리 위에서 마주친 어둠의 두 숫염소처럼 정면으로 부딪치는 두 종교의 싸움질 등, 오늘날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따위 것들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기아, 착취, 절망에서 비롯된 매춘, 실업으로 인한 극빈 상태, 처형대, 검, 전투, 사건들의 숲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약탈 행위 등을 더 이상 근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사건은 없을 거야.' 모두들 행복해질 것입니다. 지구가 자기의 법칙을 따르듯, 인류 또한 자기들의 법을 충실히 이행할 것입니다. ...'

<펭귄클래식 '레 미제라블' 5권 43p.>


아침을 먹을 때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엄마에게 시시콜콜 세상 욕을 하는 건 하루 일과가 돼버렸다.
 
며칠전 엄마가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희야, 니가 꿈꾸는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아."

그 말은 사랑하는 엄마말이었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무척 세게 다가왔다. 
 
내가 그 말을 작년에 들었더라면, 큰 상처였을지 모를 정도로...

내가 꿈꾸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레미제라블 앙졸라의 외침이 현재에도 불가능했던 것처럼
200년 뒤에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래도
이상은 언제나 큰 간극 속에 빚어지고, 
그래서 더 빛나고 더 탐나며 걸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안다. 
 
다행히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꿈을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 걸지 않는다.  
내 꿈은 그 세상을 향해 가는 '길'에 있다. 

'무엇이' 아닌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새긴다.
그 덕에 삶이 조금이나마 충만해졌다. 

뒷걸음치는 듯 해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덕분에 공허하다고 헛헛하다고 투정부리는 일도 줄었다.  

이상 같은 구호는, 생각이 되고, 생각은 혁명을 만들고 혁명이 세상을 바꾸리라.   
선지자의 예언은 과하지만, 반드시 실현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앙졸라 2013년에도 네가 말하는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대신, 
'앙졸라, 2013년에도 네가 말하는 세상을 향한 걸음은 계속되고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느끼는 '나'는 나의 생각과 고민을 모두 포함한 나 이지만,
남이 볼 때의 '나'는 눈에 비치는 모습만이 전부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나,
불의에 맞서고 싶어 하는 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
도 나의 부분일지 모르겠지만
슬프게도 생각은 아무런 힘이 없다.

남이 볼 때 그것은 '내'가 아니다.
생각은 표출 전에는, 행동 전에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한 번 한 선택은 돌이키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행동이 사람을 규정짓는다.

되담을 수 없는 이상
내가 한 일을 스스로를 합리화 하고 싶을테고,
언젠간 스스로 반복한 변명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되고,
언젠가 '내가 느끼는 나'까지 집어삼킬지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존버거의 구절을 되새긴다.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내가 될 수 있도록...

부자들을 위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Pokarekare ana Nga wai o Rotoura
로토루아의 호수엔 폭풍이 불고 있지만
Whiti atu koe hine marino ana e
그대가 걸어가면 그 바다는 잔잔해질 거예요

E hine e Hoki maira
그대여 내게로 다시 돌아 오세요
Kamkte ahau I te aroha e
너무나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Tuhituhi taku rita Tuku atu taku ringi
그대에게 편질 써서 반지와 함께 보냈어요
Kia kiti to iwi Raru raru ana e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말이에요

E hine e
그대여 내게로 다시 돌아 오세요

Hoki mairaKamate ahau I te aroha e
너무나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뉴질랜드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 
영상 1분 10초에 갑자기 한명이 선창으로 연가를 부르기 시작하고,
(연가는 거의 뉴질랜드에서는 국가 수준의 노래라고)
곧이어 모두 떼창을 시작한다.

가사를 되씹을수록 자꾸 눈물이 앞서서..

강제할 수 있는 없는 것을 강제해온 '폭력'을 떠올린다.
그로 인해 헤어져야'만' 했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이별들, 연인들, 찢겨진 마음들이
자꾸 자꾸만 생각나서...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가 이렇게 같고, 애틋하고, 한결 같은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한다는 당위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권위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잡다한 말들은 제끼고고, 

그저 사랑해도 인정받을수 없었던 이들이
'헤어져야만 했던 이여, 돌아오세요 우리 마음껏 사랑해요'라는 노래로 자꾸만 들려서  

사무실에서 눈물이 펑펑나는 걸 숨기느라 애를 먹고 있다



우연히 라 마르세예즈 가사를 보다가 기억에 깊이 남아서.

*어린이들의 합창
Nous entrerons dans la carriere Quand nos aines n'y seront plus
어른들이 죽고 나면 우리가 뒤를 이으리
Nous y trouverons leur poussiere
거기서 우리는 그들의 진토가 된 시신을 보게 되리
Et la trace de leurs vertus
그들의 용기의 흔적을
Bien moins jaloux de leur survivre
그들보다 오래 살기 보다는
Que de partager leur cercueil,
그들과 함께 묻히기를 바라며
Nous aurons le sublime orgueil
우리는 장엄한 긍지를 가지리
De les venger ou de les suivre!
그들의 복수를 해내거나 혹은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거나!

Aux armes, citoyens...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



고무적인 노래가사다.
앞길 창창한 열살 열한살 가브로쉬 같은 꼬마 아이들이 부른다는 점에 더욱.

가사를 읽는데 막 전율이 일어서 감격하고 감탄하다 또다시 맥없이 식어버렸다.
나는 차마 이 노래를 부를 수 없을만큼 날마다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고, 감동은 해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생활이 전부다. 이 노래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가사가 나의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고무적인 한구절의 노래도,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의 표현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힘이 없다. 생각은 아무런 힘이 없다. 실천 없는 말도 덧없다. 그저 머릿속을 스치는 상상일 뿐.

그래도 이런것들이 아주 깊은 곳에 내재 되어 있다가 행동으로 발현되는 날이 오진 않을까?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나를 만드는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날까지,
아직은 잠들지 마. 용기야.



지금 살던 동네에 이사 온 건 여섯 살 때 일이다.
예전 우리집도 그랬고 그땐 동네엔 2층짜리 양옥집에 2층 끝엔 베란다가 달리고 정원이 딸린 집들 천지였다. 그 중 유달리 높다란 담을 커다란 주차장을 자랑하는 집도 있었다.
 

5월이 되면 동네 곳곳에 커다란 안내문이 붙었다.

"어린이날을 축하합니다.
어린이들은 5월 5일 9시까지 쌀집 앞으로 오세요."
 
아침 9시까지 가면 정말 온 동네 수백 명의 꼬마애들이 줄을 서서 '송회장네'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받아서 돌아가고 그랬다. 누런 봉투 안에는 대단한 것이 들어있진 않았지만, 사또밥 한 봉지 연필 한 다스 노트세트 같은 정성스런 선물이 들어 있었다. 욕심쟁이 우리 할머니는 우리 삼남매가 받아온 것도 모자라 하나 더 덤으로 받아왔고...

봄이면 하얀 목련이 만개하고, 좀 지나면 라일락 향이 진동을 하던 커다란 2층집.
어린시절 <빅토리 비키>같은 만화책에 심취해 있던 나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내가 그 집에서 사는 상상을 해보고, 혹은 그 집이 친척집이여서 찾아가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었는데...

중학교 땐 그 집 손자가 동생의 동창이 됐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선 그 집 손자가 동네 아는 동생이 되었다. 한 동네 살다 보니 만나고 마주치며 커다랗고 대단해 보이던 집도 시시콜콜 사람 집이었고, 더 이상 신비로울 것도 없고, 환상적인 포장 따위 벗겨진 집이 되었지만
 

오늘 동네 그 집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거창하지만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현재의 나를 결정 만든 것이 '과거'와 '기억'이라면
매번 '기억'이 지워지는 순간을 체험하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언젠가는 나 역시 부질없이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미리 체험하는 일이니까.

사방 천지 새로 것들 사이에서 애써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덧없고 쓸쓸하고...

아주 작은 기억조차 허락해주지 않는 매정한 서울 대신 오래도록 변치 않는 느리고 다정한 고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소용 없는 생각을 해본다. 
 


 


올연말과 연초 나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총 세번 보고,
10주년 뮤지컬 콘서트를 한번 25주년 뮤지컬 콘서트를 세번봤다.
그리고 얼마전 완역본을 통째로 읽었다.

'힐링'이라는 단어만큼 듣기 싫은 단어가 없다.
'치유'라니, '대답'이 아닌 '변명'이 치졸하고 비겁하게 느껴졌다.
내게 필요한 것은 치료가 아닌 단단한 기둥이고 줄기다.

언제나 스스로가 불안했다.
십대에 내가 가지고 있던 모습이 이십대에는 사라졌 버렸고,
이십대 초반의 믿음은 소소한 농담거리로 사용됐다.

서른.
나는 변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변하지 않을까?
마흔이 되어 '지금의 나'를 틀렸었다고 고개 젓지 않을까? 


다꺼져버린 재처럼 하얗게 세어버린 국민의회 의원에게서,  
인생의 모든 것, 마지막 책 한권을 팔아치운 채 바리케이트에 깃대를 꽂았던 노인에게서
베드로처럼 거꾸로 매달려 혁명의 '반석'이 된 앙졸라에게서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자꾸 물었다.


멈추지 않는다
더뎌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만다고,
언젠가 상처 받을 것이 두려워 때로는 변명하고 탈출구를 열어두면서도
실은 나는, '그 말'을 너무나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그렇게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찰나의 순간이 쌓여 거대한 줄기를 이루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어지는 궤적 속에서
포말처럼 바스라져 더뎌질 순 있겠지만,
분명 나아간다.  

다섯권의 책, 문장마다 똑똑히 새겨진 '대답'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행복하겠다.

20세기 소녀 2012. 12. 23. 19:45

꼭 십년전이다.

대학교 2학년 총학생회 선거날이었다. 
출마한 후보는 우리측 하나였다.
투표율만 넘기면 이기는 선거였는데, 50프로가 안됐다. 
우리 학교에는 전년도 학생회가 아닌 '대의원회'라는 조직이 선거를 관리했는데,  
학교측 입장을 아주 잘 대변해주면서 학생측 입장은 씹기로 유명한, 어용선거관리위원회였다.
그리고 그 조직은 운동권 학생회가 나선 선거에는 
연장선거 따위는 허락해주지 않는 게 전통이고 관례였다.  

마감시간이 다가올 즈음 나는 분해서 울고 있었다.
앞장서서 등록금투쟁해주겠다는데도 니들 대신해서 싸워주겠다는데 왜 이런 홀대를 받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답답했다. 미웠다. 분통하고 원통하고 통탄하고 무언갈 불사지를 수 있다면 지르고 싶을만큼 분기탱천하고 서러운 상태였는데 말이지...

눈물콧물 짜면서 선배언니한테 막 말했다. 그야말로 막말을 했다.

"언니, 쟤들은 당해봐야돼요. 등록금 삼백만원 사백만원 올라봐서 정신차려야돼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복수하고 싶어요,"

울음이 숨죽을 즈음, 언니가 넌지시 대답해줬는데 말이지.

"그런다고 행복해질까? 
등록금 삼백 사백만원인 학교를 다니는 우리는 진짜 행복할까?"

며칠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울분에 찬 친구는 울며불며 재래시장 이용하지 말라고 합정역에 대형마트 서는거 데모도 가지 말라고 그네들이 ㅂㄱㅎ 를 찍었다며 울분에 차 말했다.
나도 울고 싶은 마당에 친구 위로까지 해줘야하는 겹으로 서러운 상황이었는데,

문득 스물한살 그 선거가 기억났다. 



변질되지 않겠다.
빛 바래지 않겠다.
나는 몹시 성질이 급하지만 기다리겠다.
기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에릭 홉스봄을 떠올린다.
열여섯에 마르크스를 만나서 아흔다섯까지 꿈꾸길 포기 하지 않았던 인생을.

행복하겠다.
다음 선거 때는 조금 더 행복하고,
그 다음에 한걸음 더 행복하고, 
더더더 행복해서 
충만한 행복을 쟁취하겠다.  


나는 나의 저주(?) 덕에 지금 나는 등록금 오백육백 시대에서 살고 있고,
그리고 조금도,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지난 아이템을 진행하는 내내 떠오르는 잔상은 단 하나였다.
배낭 여행중이던 스물네살.
르브르에서 한발자국을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한시간을 내리 그 자리에 서있게 만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유명해서, 그래서 흔하고, 그래서 평범하지만, 
직접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정말 아무것도 모를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앞으로 돌격하는 여신이 아니다.  
행진의 밑바닥에 이미 바스라져 죽어있는 사람들이었다.


주검이 되어서도 온전치 못하고
옷가지가 발가벗겨진 내버려진 처참함.
그럼에도-.
동료의 죽음 앞에서 너무나 초연하게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전진만 계속하는 사람들. 
혁명 앞에서 삶은 아무것도 아니고, 생은 언제든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값싼 장식이었다.

혁명은 냉혹하고 비정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달콤하고,  
단 한번이라도 억압 된적 있는 자라면 누구도 뿌리칠 수 없을만큼 강렬한 유혹.
기쁨, 열정, 분노, 슬픔. 
벅찬 환희를 위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냉혹한 대가가 가슴 아파서
숨을 쉬기 어렵고 눈물이 막 나려는 걸 애써 참아야 했다. 
  

 



아흔다섯살까지 살았던 역사가는
열여섯살 소년시절의 물음을 평생 안고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


그 시절에 만났고, 평생을 사랑하며 몰두했던 그 남자,
마르크스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무뚝뚝하고 건방진 영국계 유태인 소년이 열여섯살부터 아흔다섯살까지 살았던 삶.

구두공이 수선하던 신발 개수를 세며,
직공들의 연장가격을 계산하면서 그가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세상을 바꾼 것은 구두공이다.
세상을 바꾼 것은 광부다.
세상을 바꾼 것은 주부다.
세상을 바꾼 것은 흔해빠진 사람들이다..

평생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흔해빠진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겼던 마지막 말도 기억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너무나 쉽게 바스라지고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지만
답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외침.
그날의 '환희'와 '희열'의 잔상들이 자꾸 떠돌아서 마음잡기가 어렵다. 


12월이다.



저 바리케이트 너머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저 멀리 북소리가 들리는가?
내일이면 그들이 새 미래를 가져올 것이다

첫사랑

20세기 소녀 2012. 10. 20. 22:15

첫사랑은 열네살에 시작됐고, 열아홉살에 끝났다

상대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같이 뛰어놀던 교회 오빠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나 중학교 1학년 되는 봄에 (갑자기 180이 넘는 키를 가지고) 나타나는 바람에
단박에 세상 모든 가요를 '내 노래'로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매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때 할머니집에서 한두달 가량 머무르며 교회에 나타나는 키크고 잘생기고 돈많은집 아들. 그야말로 전형적인 '교회오빠'여서 뭔가 오그라 들지만..;;;

사실 나같이 금방 식는 애가 그렇게 한 감정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따져보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도취'였단 결론에 이른다. 
한두달을 제외한 일년의 나머지 시기는 상상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시절 나에겐 상상할 대상이 있고 가슴 떨려할 상대가 있다는 게 중요했다. 
도대체 나머지 시간 뭘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으니 실망시킬 일도 없고 (생각해 보니 완전 연예인일세..;;;) 주어진 팩트가 적으니 왜곡과 상상은 넘쳐만 갔다. 


그 오빠가 할머니 집에 있는 한달 두달의 시간이 나에겐 얼마나 절실했는지. 
그럴싸한 만화나 드라마에선 운명적인 사랑(?)은 항상 '우연'을 동반했는데,
고때는 그런 이야기를 오롯이 믿어 의심치 않을 때라
나 역시 우연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어떡해서든 마주치고 싶어서 그 집근처를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덕분에 꽤 자주 마주치고 수다도 떨고 그 수다를 또 그걸 까먹을새라 일기장 가득하 적어두고..;;;)
정말 웃겼던건 당시 나는 교회에서의 만남은 그 가치를 쳐주지 않았다는 거다. 기도하다 눈이 마주치고 입모양으로 대화를 주고 받아도, 교회 식당에서 아무리 장난을 쳐도, 그건 운명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시절 나는 봄만 되면 연희동을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어떡해서든 인연이라는 증표를 잡고 싶어서. 믿고 싶어서.
그렇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으니까.

무수히 동네를 돌았고 골목을 돌때마다 가슴 떨려했고 그러다 아주 가끔 마주치기면 새파랗게 질려 그 오빠가 치는 장난에 떽떽 거리기만 했다.


그런걸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담이 높고 꽃피는 정원이 딸린 조용한 집들의 골목들이 언젠간 공간이 될거라고 꿈꾸고, 그곳에서 추억을 만들고 연애도 하고 그 공간의 기억이 내것이 될거라 기도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공간에 내 상상을 그려넣길 주저 하지 않던,


오늘 오빠를 만났다.
서른 한살 서른 두살이 돼서 만난 오빠는 여전히 한재석을 닮고 정우성을 닮아 잘생겼고
한참을 올려다 봐야하는 188의 큰 키 
쾌활하고 씩씩한 목소리
이제는 외국인이 부르는 듯한 억양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먼저 악수를 청하고 예전 내 모습을 기억해줬다.
그건 단 하나의 떨림도 없는 무미건조한 순간이지만 

그 옛날
주지 못할 일기를 쓰고, 
물리적으로 절대 결코 나타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년 중 10개월에서 11개월을 '혹시나?'에 물음표를 찍으며 가슴 졸이며
사랑을 했든, 감정에 취해있든
단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돌고 돌았던 동네 골목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
내 망막을 스치던 풍경.

순수하게 한 사람을 기억하고 갈망하던 시간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생에 단 한번, '첫'이란 단어를 쓸 수 있기에 절대적인 순간이있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사실을 이해시키느라
오늘 내내 애를 먹고 있다.





전복을 꿈꾼다

20세기 소녀 2012. 10. 14. 15:45




나는 전복을 꿈꾼다. 
현실에서 힘들다면 상상이라도 좋다.
이야기와 노래, 영화, 드라마, 소설 어떤 장르도 가리지 않겠다.  
 
힘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좋다.
몸통이 잘린 채 꽃병에 꽂혀 시들다 버려지는 게 아니라 
온몸을 뒤흔드는 비바람에 맞서서 
마지막의 마지막 까지 홀로 서는게 삶이고 인생이라고 외칠 때는 전율이 인다. 

나는 나약하기 짝이 없지만
어딘가에는 그런 삶이 사는 이가 있음을 상기하는 순간이 달콤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원하는 세상은
폭력이 극도로 절제 된 세상이지만
가끔 현실에 비분강개 분기탱천해 참을 수가 없을 때는
머리가 터지도록 상상을 한다.
마르고 닳도록 꿈을 꾼다.

말단 종업원 비정규직이 사장을 자르고
방한칸 없이 떠는 사람들이 취미로 땅을 사모으는 이를 한겨울 거리로 몰아내며
열부가 되기 위해 죽은 부인을 따라 남자들이 은장도로 자신의 심장을 억지로 찌르고
불가촉천민이 흰피부의 브라만을 부리는 이야기를  
권력의 바퀴 아래서 개죽음 당한 영혼들이 밤이면 다시 나타나 매일밤 처절한 복수를 안겨주는 이야기를

혐오하고 핍박하는 이들이 그 '대상'이 되어 보기를 
그 몸서리 치는 고통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천계를 뒤집어 엎은 아수라 마냥, 
모든 파괴와 일체의 혼돈 전복이 반복되는 세상을 상상하며 오늘의 울분을 푼다.

'너는 남자를 이겨먹으려고 해서 틀렸어'

이딴 소리를 나랑 동갑내기 남자애 입에서 듣는 날이면
나는 위와 아래가 좌와 우가 바뀐 세상을 꿈꾸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조금더 잔잔하길 기원한다.

오늘
쇼에서 혹사 당하는 돌고래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나도 알아 안다고. 근데 돌고래쇼가 보고 싶으니까 보는거야'
라는 대답을 친구에게 들었을 때

수족관 물고기들이 겪고 있는 갑갑함에 대해 호소하는데 
보란듯이 아쿠아리움의 거대함이나 수천수백종의 물고기들의 화려함을 
검색하는 친구 앞에서 

화가 어찌나 폴폴 솟아나오던지. 

더 이상 말해봤자 싸움이 될 뿐이라 입을 꾹 다물었지만
분노하고 노여워서 그 친구들을 힘껏 미워했다. 
그리고 '홀로' 느끼는 감정에 대해 몹시 외로워했다.

그저 내 주위 눈에 밟히는 것에 노여워하는 건 
50원짜리 비계덩어리 설렁탕에 분노하는 것만큼 유치하지만  
너무 거대한 것에 노여워하는 일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니까
그저 쉽게 나는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향해 화를 쏟아붓는게 아닐까? 

미워할 것이 너무나 많다.
책망하면 닿을 거리에 있는 가까이 있는 것과 싸우기란 참 쉽다. 
그러면서 나는 저보다는 나은거라 자위하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 보름달을 보면서
분기탱천해 일어날 용기가 없다면
조금 더 잔잔해지길
잔잔하고 잔잔해져서 치졸하게 주변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거대한 것들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만들어지길 기도했다.  





오늘 우리동네 '언덕 위 하얀집'을 부수는 걸 눈 앞에서 보고
참담함에 일기를 쓴다.

'언덕 위 하얀집'이 정신병원을 말하는건  
골동품이 문화재로 바뀔만큼 오랜 시간된 유머인데, 
우리동네엔 아주 예전부터 이름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집'이 있었다 

곽지균 감독의 영화 <겨울나그네>에도 나왔던 집이고,
그 앞을 지나면 (그 근처 집들이 다 허우대 멀쩡하고 담높고 평수 좋은 집들이다만)
프로방스 식 아담한 집모양이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설레게했다. 

빨강머리 앤의 감수성에 반해 있던 꼬꼬마 시절
그 집에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해서 무얼하며, 
오죽하면 그 집에 살고 있는 먼훗날 연애의 대상을 상상해 본적도 있었지.
(모두 상상력이 뇌를 뚫고 하늘까지 뻗쳐가는 사춘기 시절의 일이다)

'마리아 칼라스'라는 까페 이름으로 바뀌었을 때 
개인 소유가 아닌, '투자'와 '이윤'의 공간으로 변질된 그곳에 대한 배신감은 얼마나 컸던가. 

그래도
까페의 모습으로라도, 계속 있어주길 바랬는데... 
 
언젠가 살고 싶던 집들이
언젠가 살고 싶던 삶들이 
꿈꾸던 것들이 자꾸만 실현 불가능함을 눈으로 목격하며 
나이를 먹는 것이 존재가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아득히 슬픈 일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루하루 닳아져 없어져 간다.
'존재'가. 

     

오빠의 의미

20세기 소녀 2012. 5. 14. 10:37

저 멀리, 나와 인연이 닿지도 않은 한 사람을 응원하고 좋아하는 과정이
과연 무엇을 남기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응원에 대한 보답, 기쁨 그 이상의 것을 배웠다.

십년 전, 장국영을 닮아서 막연히 좋아하기 시작한 오빠는 어느덧 마흔을 먹었고
내가 좋아하고 응원한 기간 단 한번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이 마흔 먹은 오빠의 은퇴 경기 마지막 골은 반짝반짝 빛났고,
역시나 오빠답게 주워먹기였고(푸하하)
그래서 나는 오빠를 보면서 내 삶을 더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워요!

삶이 지치고 힘들 때 꼭 오빠를 떠올리겠음!!! +_+





파장

20세기 소녀 2012. 4. 7. 00:19

우리 당협은 비록 국회의원 선거를 후보를 내진 못했지만,
그래서 선거운동도 필요 없는 당협이 됐지만,
오늘은 마포 지하철역 곳곳에서 정당지지 운동과 홈플러스 반대 시위를 벌였다.

끝나고 뒷풀이 타임이 있었는데,
너무 웃어서 목이 아프고 배가 좀 아프다.
웃다가 찾았다.
통합을 지지했음에도 내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를-

그 언제였던가? 
싸우고싸우고싸우고또싸우는데도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았던 
학생운동에 큰 회의가 들었던 때가 있었다. 
후보로 나갔으면 좋겠단 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도망칠 준비 중이었지. 
안나가겠다고 선배언니들과 만나지도 않고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곰언니가 나타났고
곰언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내게 편지만 내밀었다.

그 편지에 담겨 있던 게 신경림의 詩 파장이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그때 결심했다.
아무래도 좋다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라면 
아무리 못나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고.

3프로를 넘지 못해도 상관 없다
국회에 입석하지 못해도 좋다
내가 즐겁고 내가 양심에 거리낄것 없고 내가 불편하지 않으니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