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에게

20세기 소녀 2016. 4. 8. 10:57

우리 기나 잘지내니?

거기는 잘 적응했는지 모르겠다. 한국은 봄이라는데 미세먼지가 장난아냐. 우리 작년에 같이 세브란스 12층에서 이대부고도 안보인다 뭐라 했었잖아. 그 농도 그대로. 매일 건조하고 목 아파. 봄이라는데 하늘도 안 파래. 시야도 안나와. 여튼 여긴 여전하다. 니가 없는데도 말이지.


어제 너희 가족들로부터 네 사진을 받았어. "엄기나가 잠든 곳" 일곱글자가 써 있더라. 나 있지.., 또 주책맞게 또 펑펑 울었어. 지금 넌 훨씬 아프지 않고 기분 좋게 있을걸 아는데, 그냥 그렇게 써있는 그대로 니가 정의 되는게 싫었나봐. 이렇게 끝난 게 아니라 뭔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을 것만 같은데 그게 아닌 '끝'이어서 그랬나봐. 돌에 새겨진 그 글자가 깊고 단단해서 이젠 수정할 수도 없다 싶어서 막 자꾸 눈물이 났나봐.

기나 이번 이사간 새 집은 둘러 봤니? 그때 너도 지켜봤는지 모르겠다. 너 발인 끝나고 있다가 몇 명 착출돼서 니 이사짐이랑 물건 정리 했는데... 정리하면서 니 얘기 진짜 많이 했어. 다 들었니? 그때 우리 옆에 있었던 거 맞지? 재작년 태국서 사온 로레알 나이트 크림 박스채로 세개, 일년에 한 번 다 쓸까 말까 한 태국 코뻥 새걸로 여덟 개, 뜯지도 않은 락앤락 한 세트... 한 개에 스무번은 쓸 수 있는 빨아 쓰는 행주가 수백장 나왔을 때 우리 다같이 웃었어. 아오 엄기나! 이 기집애 백살까지 살려고 했나봐!!

포장도 뜯지 않은 새거가 너무 많아서 중고 나라에 팔자니까 니 애인겸남편이 그럼 기나가 진짜 화낼거라고 우리보고 가져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야무지게 챙겨왔어. 요즘 난 니가 주고 간 선물 중에 이니스프리 팩을 젤 열심히 쓰고 있어.
기나야.

니가 남겨두고 간게 진짜 진짜 많아. 두고가기 싫었을 것들도 참 많아. 다 니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었잖니. 그리고 이젠 우리도 알아. 거기엔 니가 두고 간 '우리'가 있다는 거.
작년 일 년. 너는 나에게 경이로운 사람이었어. 쇼핑박사에 맛집박사. 평범하고 소소한 것에 행복해 할 줄 알았던 니가, 그렇게 용감한 사람인지 진작 몰랐었어. 나는 지금도 니가 놀라워.
어떻게 그렇게 용감 할 수 있었니?
그렇게 외롭고 힘든데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어?

발인 끝나고 버스가 세브란스 돌아오는데 우리 고1때 아침마다 마주쳤던 버스정류장 있잖아. 그걸 찾을 수가 없더라고. 영진쌤 차 놓치게 되면 73번 135-2번 탔던데 말야. 꽃은 똑같이 피었는데 그 정류장은 없더라고. 생각해 보면 우린 열일곱부터 열여덟번의 봄을 같이 보냈는데. 내가 앞으로 살아갈 봄엔 니가 없구나. 그제서야 실감이 났어.


있잖아, 기나야. 난 너한테 고마운게 참 많아.
병문안이랍시고 가서 시시콜콜 세상사 욕하면 다 들어줬지. 그때마다 내 편이 되어 줬어. 맛집이며 가봐야할 음식점이랑 사야할 물건도 빠삭하게 알려줬었지. 니 덕분에 섭외가 수월하게 풀렸던 적도 많았어. 선거도 그랬네. 내가 민노당 진보신당. 힘들다 투정부리면 고생많다면서 별 설명 없이도 한표 찍어주겠다고 약속해줬잖아.
나 몰타아프리카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약속도 지켜줬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만 덜렁 남겨 두지 않으려고 지난 일년. 숨막히게 길고 아픈시간 열심히 싸워줘서 고마워. 넌 정말 용감하고 멋진 여자였어. 아프고 힘들었던 기나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용기 있는 기나로 기억할 수 있게해줘서 고마워.

다음달이면 외국 나가 있는 애들 몇 돌아오는 거 알지? 우리 모여서 기나 너 만나러 갈게. 우리 오래간만에 '이빨까는' 거다? 기다려줘. 나도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 기나 너무너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