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귀의 일과

말라리아 약 부작용으로 아침 다섯시 여섯시쯤 눈이 떠진다.

깜깜할 때 밖에 나가는 건 부담스러워서 동이 틀 때까지 침대에서 기다린다.

 

동이 트고 난 뒤, 성큼 멀어진 바다를 향해 옷을 대충 차려 입고 아침 산책을 나간다.
이 시간이 유일하게 삐끼가 없는 해변이다.

드디어 나는 고요하게 아침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산책 후에는 잠시 방안에 앉아 있다가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간다.


내가 묻는 게스트하우스(마그하리비 하우스)는 아침이 정말 끝내주게 잘나오는데,
빵이나 난은 그저 그렇지만 정말 한접시 가득 열대과일이 담아져서 나온다.
과일을 먹고 있노라면 동네 닭들 소들이 지나다니는 걸 볼 수 있는데
길 잃은 닭들은 가끔 우리 게스트 하우스까지 몸소 친히 방문하셔서
아침 인사를 건네곤 한다.
여튼 과일만 먹어도 배가 꽉차서,
바나나는 저녁에 배고플 때 먹으려고 남겨뒀다 들고 들어온다.

 

아침을 먹고 난 뒤엔 잠시갖는 휴식시간....
친구가 보내준 소설 파일을 읽거나,
가져온 몇 권 안되는 책을 다시 반복해서 읽거나
중간중간 아침에는 연결상태가 늘 불안정한 숙소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시도해 본다.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 능귀비치로 걸어나간다.
숙소가 싼 가격인 대신 능귀비치까지는 거리가 있는데
해변을 따라걸으면 20분에서 40분.
불편하단 생각은 안든다.
이마저도 걷지 않았다면
과연 난 뭘 하며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두시에서 세시 사이엔 늦은 점심을 먹는다.
대단한 요리를 바라는 건 아니기 때문에 대체로 만족스럽다.
해산물 피자, 해산물 샐러드 해산물 스파게티..
그리고 가끔 치킨이나 소고기 요리를 주문할 때도 있다.
 
배를 채운 뒤엔 다시 해변으로 나간다.
이번주의 능귀 비치는 파도가 센 편이라서
멀리가지 수영하는건 힘들고 날아오는 파도에 몸을 싣고
둥실 둥실 떠내려 가다 다시 해변으로 걸어가는 일의 반복이다.
몸을 말리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다시 20분에서 40분 해변을 따라 걸어 들어온다.

샤워를 하고 소금기를 씻어내고 빨래를 말리고
가져온 영화를 켠다.

 

능귀는 안전한 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게 좋겠단 충고를 들었다.

저녁엔 잠시 나가서 밤바다가 저만치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곳에서 하늘에 닿을듯 거대하게 자란 야자나무 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하단 걸 알게 됐다.

 

컴퓨터에 다운받아온 드라마들을 쏠쏠하게 보고 있다.
오피스는 시즌 2까지 밖에 받아오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고,
프렌즈는 언제 다시봐도 명작이다.
마지막 시즌 마지막 두 편은 여기 있을 때 끝내 보지 않으려고 한다.

몰타에서부터 트럭킹.

이제 나는 헤어지는 것에 이력이 나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나무 위키에서 이것저것 항목을 찾아보고 있다.
사자, 코끼리, 얼룩말, 하이에나, 돌고래, 범고래 ...
동물에 관한 정보는 알면 알 수록 놀라운 일 투성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 현대사도 뒤져보고 있는데
암담한 현실에 자꾸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진다.

트럭투어나 몰타에서 있었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곳에서의 일상이 비현실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일들은 더더욱 비현실로 느껴진다.

 

밤이 되면 기도를 시작한다.

며칠전부터 나에겐 정말 커다란 기도 제목이 생겼는데

나의 소중한 친구와의 시간이 영영 가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에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여튼 이곳에서의 11일.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기도하는 마음만 가지고 살아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