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다 성조가 섞인 한국말을 쓰는 재중동포를 만나기 쉬운 것 처럼, 태국 관광지 곳곳에는 타나카를 바른 버마 사람들이 있었다. 화장품도 아니고, 진흙도 아닌 뺨 가득 바른 분(粉)이, 이곳 태국의 전통이 아니라 한참 떨어진 버마의 전통인 걸 알았을때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을 이 먼 곳까지 와서 노동을 시작한 이유에는 태국 꼬따오란 섬을 찾아, 돈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 내가 있을테니까.

2년 전, 처음 방문한 꼬따오의 풍경은 10년 전 이 섬에 왔던 친구의 말과는 많이 달랐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사람들의 발. 10년 전 이 섬에는 신을 신는 현지인들이 별로 없다고 했다. 맨발로 다녀도 충분한 부드러운 흙길과 모래길이 섬이 가진 길의 전부였으니까. 언제부터 맨발로 걸어도 충분했던 이 섬에 아스팔트 도로가 깔렸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사람들은 아스팔트 길을 위한 신을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을까.
 
가만히 있어도 손등까지 땀띠가 나는 이 여름나라 사람들이 불쇼를 시작하고 현지인들이 외국인을 위한 뜨거운 불 옆에서 밥을 짓고 요리를 하는 섬. 이미 수십년째 관광으로 먹고사는 이 나라에서 제국주의 자본 세계화 개발이런걸 떠올리려는 건 아니었고.
자본의 한 끝에서 돈을 쓰겠다며 온 주제에 느껴선 안되는 알량한 죄책감일진 모르겠지만, 
몇몇 광경들을 볼 때, 마냥 외면하고 있기란 쉽진 않았다. 

이번 여행 즐거운 순간은 참 많이 있었지만, 웃을 수 없는 순간도 많았다.
다이빙하러 들어가는 순간 내 핀을 잡아주는 소년이 우리나라 나이로 열넷 열다섯살인 걸 알게 됐을 때, 공기통을 잡아주는 아저씨의 뺨에 발려져 있는 분이 사실은 태국과 한참 떨어진 땅 버마의 전통이라는 걸 알고 났을 때,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하는 양심의 가책이 동반됐다. 
매일같이 내 숙소로 타올을 가져다 주고 침대를 정리해주는 소녀에게 고맙단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선 '커쿤카'대신 '쩨주띤바레'란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딱봐도 중학생 정도의 나이. 앳된 얼굴을 가진 소녀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종종 통화하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가족이 아닐까 생각이들었다. 그게 가슴 아파서 매일 같이 침대 위에 30밧을 놓고 나왔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그게 잘한 일인진 모르겠다. 안데스 산맥 인디오들의 아이들은 북미와 유럽관광객에게 팔찌 하나를 1달러에 팔기 위해 학교에 나갈 기회를 빼앗기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의 치열한 삶을 함부로 동정해서는 안된다. 자칫 누군가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만심이거나 우월감일 수 있으니까. 가슴아파하는 그 행위만으로 속죄 하거나 회개했다고 착각에 빠지기 쉬우니까.
그런 얄팍한 감성에 빠질 시간에, 더 건설적인 뭔가를 만들자고, 근본적인 체계를 완성하고 보호망 같은걸 갖추자고. 뭐 예전엔 호기로운 결심을 세우곤 했던 적이 있었다.근데 그게 될까? 요즘 나는 한껏 회의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 말이다. 

더 발전하고 더 나아갈 것을 말하는 세상의 외침은 달콤하다. 마약같은 환각을 내 손안의 현실로 만들어줄 것 같다. 자본주의 세상 아래서 이역만리 타향까지 와 노동하고 돈을 벌고 살아가고자 하는 이 치열함이 모두의 안녕과 전체의 행복을 향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이 사실일까. 
실은 나는 그 질문엔 언제나 부정적인 답만 말해왔던 터라, '그럴거야'라고 대답하지는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