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스와 헤르트

지팡이를 쥔 채 잔뜩 찌푸린 얼굴. 

백발이 성성한데도 한참을 올려다 봐야 하는 큰 키의 

네덜란드 할아버지.

처음 케이스를 보았을 땐 조금 괴팍한 인상의 얼굴만 남아 있었다.
왠지 무섭기도 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싶기도 했는데
케이스와 본격적으로 말을 트기 시작한건
언덕을 내려갈 때 내가 팔을 빌려주면서 부터다.


그리고 그날 우린 같은 식사준비설거지팩킹조 지브라 인걸 확인했고
그 덕에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케이스는 헤르트에 관해
39년이나 된 오랜 친구 사이 라고 소개했는데
둘이 함께 집이 몇채 있다는 말에 '으응..??'하고 뭔가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헤르트의 다리엔 한자로 男男 문신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재밌는건 일본 남자애들이었는데,

이들은 1주일만 트럭투어를 하고 돌아갔는데
마지막까지 이들이 커플 파트너 사이란걸 몰랐던거 같다.
마지막날 식사할때까지

-결혼은 안했냐? 아이는 없느냐?

-우리도 당신들 처럼 39년 우정을 잘 간직하고 

39년 뒤에 아프리카에 또 같이 오기로 약속했다.

 

등등의 말을 이 커플에게 던진 걸 보면 말이다.

 

케이스 나이가 우리 아빠와 똑같다는 말을 했더니,
그럼 자신의 딸을 하라고 했다.

그 말에 난 참 슬펐는데.. ㅠㅠㅠㅠㅠ
케이스는 농담이었겠지만,

나는 진심이었기 때문에....
이딴 나라 국적포기 원사우전드타임즈도 할 수 있다.
퓨퓨퓨퓨퓨퓨퓨퓨퓨ㅠㅠㅠㅠㅠㅠ

(엄마아빠 미안ㅠㅠㅠㅠㅠㅠ ㅋㅋㅋ)

 

케이스는 무대 설치 기사였고,
헤르트는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션들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었다가

둘다 은퇴한 모양이다.
현재 헤르트는 남아공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일을 하느라고

남아공에 오고가다가 이곳에 집을 한 채 마련했다고 한다.
케이스는 늘 말끝마다 돈은 헤르트가 쥐고 있지 라며 껄껄 웃곤 했다.

2015년 마지막날도 캠핑장 바에서 헤르트와 케이스와 수다를 떨었는데
얼마전 헤르트 마저 은퇴했고 연금도 있긴 하지만 

생활비의 상당부분을 집을 사고 되팔면서 남는 이득으로 생활할 계획인 것 같았다.

아무도 안사는 빈집을 사서 말끔하게 개조하고
(케이스는 무대 설치 기술자였으니까 가능한듯)
헤르트가 고른 물건들로 인테리어를 깔끔하게 해서
몇개월 혹은 몇년 사용하다가 팔 예정인 것 같았는데..;;;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어"

 

헤르트가 심각하게 말한다.

 

"우린 이번에 프랑스 집을 팔아야만 하거든.
헤르트도 은퇴를 했으니까 수입도 예전같지 않고..."

 

케이스도 심각한 얼굴이다.

 

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고쳐 놓은 집이 팔기엔 너무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든다는 것
자기 취향대로 꾸며놨을 테니 당연하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러면서 이번에 꾸며 놓은 남아공 집을 보여주는데 아오 ㅠㅠㅠㅠㅠㅠㅠ
나같아도 못판다.
너무 이뻐! 너무 잘꾸몄어!!! 모던하면서도 심플한게 너무 괜찮아!!!
나도 이들의 심정을 알것만 같았다.
그래 내가 예뻐서 사고 내 취향대로 꾸민걸 누굴 준단 말인가...;;;;

누구에게 팔 수 있단 말인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케이스는 호방하니 농담의 천재였다. 

"그거 아나? 내가 헤르트보다 키가 큰데,
헤르트는 나보다 다리가 짧지 허리가 한참 아래 있다고. 아하하하
나는 다리가 길어서 의자 공간이 언제나 부족한데 헤르트는 넘쳐. 아하하하하"

"한 번은 헤트르가 다시 담배 피우는 걸 알았는데
그때 내가 스파게티 요리 중이었어.
공중으로 스파게티 한냄비를 던져버렸지. 아하하하"
"밀가루 얼룩을 지우는데 1주일이 넘게 걸렸어"

 

케이스는 내가 옆에 앉기만 하면 언제나 재밌는 얘기를 해서
빵빵 웃음 터지게 해줬다.
나는 심심할 때마다 케이스 근처에 가서 수다를 떨곤 했는데

 

한번은 맥주를 사주길래 '왜 니가 사?'라는 말을 했다가
헤르트에게 '남자가 술을 사는데 거절하다니 끔찍한 아가씨군.'이란 핀잔을 사야했다.
네덜란드 더치문화 엄청 신경써서 괜찮다는 사양의 말이었는데
그 두 사람한테 상처를 준 모양이다.

 

아이패드로 사는 집도 구경하고 별장 사진이며 염소들 검정 강아지 이야기도 하고
보트 사진도 보여주면서 네덜란드 놀러오면 태워준다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가고싶지 않아서 안가는게 아니라 솅겐 협정 때문에 몰타에서 한국 간 뒤로

3개월간 유럽에 갈 수 없는데다가

그 전에 돈이 없어 갈 수 없는 이 절박한 심정을
그들이 알아줬음 싶다 정녕!!!

 

 

그들에게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고,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된다는 건 굉장한 일이며 한번쯤 경험하고 싶은데
내 아이가 한국 사회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 확신을 갖기 어렵다고 했더니

 

"뭐 너무 걱정하지마 요즘엔 시험관 아기도 있고"
"음... 우리 이웃집에 정말 뷰우티풀한 청년이 있는데 말이지"

 

헐.. 무려, 정자 중매에 들어간다..;;;;;

 

"도서관 사서야. 인텔리틱 하고 아주 예의바른 청년이지."
"네가 우리 집에 오면 소개시켜줄게"

 

나는 괜찮다며 관심 없는 척 손사레를 치다가
끝내 한마디를 물었다.

 

"그분... 키는 큰가요?"


 

 

 


욜란다와 파스칼

욜란다와 파스칼은 일찍부터 트럭 앞자리에 앉았던데다가
딱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어서

초반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욜란다와 파스칼과 친해진 것은 소수스 블레 사막에서부터 였다.

사진 찍겠다고 죽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손바닥 한가득 나무 가시가 박혀서 좀처럼 빠지질 않았다.
트럭으로 돌아와 핀셋이랑 옷핀으로 하나하나 벌려가면서 가시를 뽑는데
욜란다가 일일이 옆에서 지켜봐주며 약까지 발라줬다.

나 진짜 대 감동 ㅠㅠㅠㅠㅠㅠㅠ

 

-둘은 어떻게 만났어?

 

커플끼리 온 친구들에게 의레 하는 질문에 파스칼이 슬픈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욜란다가 무려 10번이나 내 데이트신청을 거절했어

-뭐? 10번이나?

 

물론 욜란다는 지금도 가슴 빵빵 미녀지만

파스칼 너도 못나진 않았는데...;;;


-근데 계속 물어봤던거야?

-파스칼은 내 친구의 친구였는데 내 친구들이 파스칼을 좋아하지 않았어.
결국 열번째에 내가 오케이를 했고  영화를 보러갔고 우린 사귀기로 했지.

나는 이 얘기가 스무살을 훨씬 넘었을 때의 일인줄 알았다.

 

-17살 때 일자리를 얻으면서 난 파스칼과 살겠다고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했고 그때부터 21년간 같이 살고 있지.

 

나는 여기서 일자리를 얻으면 바로 독립하는 네덜란드 고딩문화와
더불어 파스칼의 집요함을 배울 수 있었다. ㅋㅋ

 

욜란다와 파스칼은 지독한 헤비스모커 였는데,
다행히 나는 담배를 싫어하지 않아서 쉬는 시간마다 그들 옆에서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막판 스웨덴 젼(JD)가 앞자리를 비우면서

그들과 마주보는 냉장고 좌석 옆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도 파스칼의 도움을 받았는데 파스칼이 아침 일찍 자기 침낭을 젼의 자리에

놔두어서 내 자리를 맡아줬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흑흑

 

정말 신기한게 그들은 물을 거의 마시지 않고
쥬스 환타 콜라로 부족한 수분을 보충했는데
어떻게 전혀 살이 찌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의문이야 ㅠㅠㅠㅠㅠㅠ

 

 


폴 앤 팸
요즘 힙하다는 모자를 (챙을 접지 않은 채) 쓰고
아프리카 라고 써 있는 티셔츠를 줄창 입어대는 폴은
63세 할아아버지 였다.

작은 동물 귀여운 집이나 꼬마를 볼 때마다
"러블리~!!"라는 찬사를 입버릇 처럼 말하는 팸은 61세 할머니.

영국 동쪽에 살고 있는 이 부부는 팸이 19살 때 펍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고.

 

하루에 한번 텐트를 펴고 접는 일이 정말 큰 일이었는데
팸은 폴이 텐트 치는데 고생을 하건 말건
늘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ㅋㅋㅋㅋㅋㅋ

그럼 둘이서 접어야하는 텐트를 혼자 정리하는건 언제나 폴 몫 ㅋㅋㅋ
서양엔 레이디 퍼스트가 있는지 몰라도
동양에는 노인경로 사상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우리 아버지뻘 되는 폴을 외면하기 어려웠고
몇번 텐트 접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뒤로 내가 무슨 일을 할때마다 폴은 늘 내 옆으로 달려와
짐을 들어준다던가, 손수 물건을 날라주곤 했다.

 

"신 너는 팸 다음으로 내 두번째 레이디니까"

 

그 말이 참 기뻤다.

 

둘 사이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얼마전 남아공에서 손자를 하나 봤다고...

 

-아들은 언제 결혼했나요?
-모른다!

-그냥 손자가 나와 있었어.

 

라는 시크한 대답에 다시 한 번 빵.
여기서 나는 또 한번 결혼을 하고도
부모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는 영국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