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가에 대한 짧은 단상

 

최악을 상상한다. 덜최악을 만났을 때 위로하기 위해서다. 상상을 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디테일이 더해진다. 이를테면 오년전 남미 가기 전에는 싸파티스타 혁명군을 만나서(그렇다. 싸파티스타 혁명군은 멕시코에 있다는걸 당시엔 몰랐다.) 납치가 되다가 혁명군 동료가 되고 스페인어에 능통해지는 상상을 해봤다. (이걸 최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튼 최악을 상상하고 내린 결론이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아시안을 받아본 적 없다는 이 학원에서 몰타 어학원을 오기 전엔 줄곳 왕따가 되는 상상을 해봤다.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보려고 젠가를 사긴 했는데, 그러다 만들어낸 최악의 상상은 '내가 사온 젠가'로 나 빼놓고 나머지 애들끼라 젠가하는 상상(?)이었는데 말이다. 여튼 야심차게 사온 미니젠가는 쏠쏠하게 써먹고 있다. 미니 젠가보다 두배는 굵은 손가락으로 고심하는 외국 남자애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눈은 말한다.

눈은 유리창도 아닌데 말이다, 많은 것을 여과 없이 내보인다

엘리사의 눈은 말한다. 침착할 때와 서두를 때를 아는 현명함. 재빠르게 판단하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영리함이 있다. 반면 서른여덟살 스위스 친구의 눈은 언제나 포커스 아웃이다. 무얼 담고 있는지 전혀 알 수도 없고 무엇에 집중하는지 조차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도 멍하니 질문을 놓치는 걸 자주 보곤 했다.

 

 

독일에 대한 편견이 더해지고 있다.

여행자는 자신의 편견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

어떤 편견은 증명되어 진리가 되고 어떤 편견은 수정되어 새로운 편견이 된다.

-후칭팡 <여행자>

 

루프트 한자를 탔다. 독일 프랑크 푸르트에서 짧지만 1박을 했다. 학원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4일까지 도미토리 룸에이트는 독일인친구였다. 그리고 현재 학원생 절반이 독일인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친구들을 셈해보면 70퍼센트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생활하는 셈이다. 독일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새로운 편견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생활 구조다.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46번 버스가 유스호스텔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한 청년에 구글맵으로 길을 검색해 줬다. 10분가량. 아마 10유로 가량이 나올 거라고 얘기해줬다. 차선책이 없었던 나로선 택시를 탔다. 요금은 10.5유로. 바가지 일절 없는 쌈빡한 금액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나섰다. 유스호스텔 아저씨가 적어준 버스시간은 5시 48분. 버스는 한치 오차도 없이 5시 48분에 해당 정류장에 서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인포메이션에 가서 공항 가는 길을 물었다. 나같은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있겠지. 안내원은 대답한마디 없이 미리 인쇄해둔 종이를 내민다. 갈아타야하는 플랫폼 위치 타야하는 우반번호 나가야하는 공항 게이트 번호까지 적어서 그 뒤로 누구에게도 길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