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괴리는
지나친 유사보다 힘이 세다.

나는 비겁하게 자리하지 못했지만, 트윗을 통해
쌍용자동차 스물두번째 노동자 추모제에서
신부님들이 쌍용노동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지나버린 '오늘'은 성목요일. 
추모제 촛불과 함께 올라온 다음 멘션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하여라..

라 쿠카라차가 노래하는 판초 비아의 용기를 닮고 싶다.
한쪽 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배고픔과 굶주림에 허덕여 마리화나로 고통을 잊어도
바퀴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지만 
꿈만은 바퀴벌레마냥 질기게 꾸던 멕시코 혁명군들의 노래
바퀴벌레,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그리운 그 얼굴-

큰 꿈은 꾸지 못하겠지만,
작지만 질긴 꿈을 꿀 수 있길...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방한 켠에 앉아서 
결심은 언제나 쉽고 편리하다.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과
죽고 죽이며 죽여야 사는 이 사바세계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낸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서러워서
원고 쓰다 말고 자꾸 훌쩍 훌쩍



역사의 방향

20세기 소녀 2012. 1. 9. 18:34

주책인지 모르겠지만,
역사가 제자리만 맴도는게 나를 너무 좌절케 한다.
한 때 그토록 재미나 했던 국사도,
나름의 '민족'이란 껍데기를 경계하기 시작하니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줄창 한국사 책을 읽는게 업이 돼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건 믿겠는데, 
그 나아가는 범위가 너무 좁다.
너무 작아 성에 안차. 조급해. 현기증나!
나 죽기 전엔 안올것만같은 세상 따위,
뭐 좋다고 열심히 사나 싶기도 하고. 

서러운 죽음도 너무 많고 
억울한 생애도 너무 많고 
사연이야 차고 넘치고 흘러 넘치고
그 한(恨)들은 떠돌다 떠돌다 죄다 어디로 가나. 

종교에 귀의하는 단순한 마음을 다시금 알것 같다. 

나는 오늘도 또 이름없이 죽어가 공신책봉조차 되지 못한 의병들의 죽음을 읽고  
똑같이 반복되는 50년전 60년전 역사를 읽고 또 읽고 
보답없음을 대신 원통해 하고. 

모두가 작지만 소박하고 각기 다르지만 평화롭게 따위의 세상이 오지 못할거라는걸 
예감한다. 


며칠전엔
잘사는 사람들이 영원히 잘살거라는 친구의 말에 
언젠간 그들이 밑바닥이 되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대꾸 했다.
우리 모두가 같아질 수 있는 세상이 올거라고 말했다.
친구는 믿지 않았는데, 
난 그게 너무 화가나. 
그걸 왜 못믿냐고 버럭하고 화를 냈다.   
사실 그건 나한테 하는 말이었지. 
그걸 왜 못믿니? 





불러줄 곡을 정했다.

Nazareth가 부릅니다. Love hurts....

Love hurts, love scars
Love wounds and mars any heart
Not tough or strong enough to take
a lot of pain take a lot of pain
Love is like a cloud that holds a lot of rain
Love hurts ooh, love hurts    

I'm young I know but even so I know a thing or two
I've learned from you
I've really learned a lot really learned a lot
Love is like a flame is burns you when it's hot
Love hurts ooh, love hurts

Some fools think of happiness
blissfulness, togetherness
Some fools fool themselves I guess
but they're not fooling me
I know it isn't true I know it isn't true
Love is just a lie made to make you blue
Love hurts love hurts love hurts Ooh love hurts





사랑은 고통을 주고, 사랑은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아픔을 주고, 마음을 허물어버리며,
불꽃같이 뜨겁게 타오른다해도 
결국엔 데이고 마는,
사랑의 (참되고도 오래된) 진리를
결혼식장 다시 한번 되새겨보라며 나의 썰을 설파해 보겠쒀...



치부는 차라리 덜 가까운 사람에게 내보이기 쉬운것인가보다.

어제 몇년만에 한 친구를 만났는데,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 이말저말 마구 지껄였는데,
우습게도 서로의 공통점이 너무 많은거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차마 토해내지 못했던 비참한 인생의 한 꼭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릿찌릿한 서러운 비참한 경험.
자존심 세우겠답시고 '괜찮아, 그렇죠, 다 알아요, 그런거죠 뭐...' 
거짓말로 반창고를 붙이고 상처를 가리고 없는척했는데 
허허실실대는 사이 상처가 곪았다.
악취가 풍기고 살이 썩는데, 차마 아프단 소리를 하나 못했다.

근데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사실'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겁이나서.

나 빼놓고 다 이상해!
다 잘못됐어!
다들 그렇게 살면 안돼!
나한테 진짜 그러면 안돼!
나 나름 착하게 살았거든? 니들 벌받을거야! 알아? 벌받을거라고오!!

술을 쳐마시다 말고 혀가 썩도록 단 커피우유를 쪽쪽 빨면서
바뀌라바뀌라 그렇게 외치는데도 꿈쩍 않는 세상을 향해 욕을욕을하고
비분강개하고 열을 뻗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 어찌나 후련하던지.
그 후련한 감정이 박하향처럼 알싸하니 쓰리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무지 시원해서 
왈칵 눈물을 쏟을뻔 했다.


행복할 시간

20세기 소녀 2011. 8. 16. 15:40

두 달 여의 시간 동안 낯선 땅을 걷고, 보고, 듣고, 받아들이면서 느낀 건 단 하나였다.
('배웠다'는 표현이 인위성을 포함하거나, 이해를 동반한 수긍에 또다른 표현이니까, 
'배웠다'라는 단어 대신 소화하고 온몸에 체화해서 완벽하게 내것으로 남은 '느꼈다' 란 표현을 쓰고 싶다.) 

몇개월간을 내가 체험한 남미를 압축한 한 단어.

No mañana
오늘을 저당잡혀, 내일을 꿈꾸지 말것.
오늘 행복해야 내일이 행복할 수 있음을 믿을 것.

그렇게 내 맘에 새겨진 단어가 용기를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제자리를 찾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넌 어디서 일하고 싶니?"
"니가 말하고 싶은건 뭐니?" 

묻고 또 물어서 마침내 대답을 하나 찾았다.
민망함과 송구함을 무릅쓰고 작가를 뽑지도 않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이력서와 구성안이 마음에는 들지만, 언제 자리가 날지 기약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을 기다린 다음, 적정선에서 새직장을 얻었다.
새로운 장르였고, 내 연차에 배울 점도 있었다. 
그렇게 한달을 일했는데, 연락이 왔다.

여튼 그래서 지금은 온전히 행복할 시간.
인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을 짜릿한 순간이다.





의로운 죽음

20세기 소녀 2011. 7. 29. 16:44

지난 주 주말은, 근 2주만에 맞이하는 휴일이었다. 
밴드오브브라더스가 하더라. 이거 톰하디가 (스쳐가듯) 출현(출연이라고 말할 분량이 절대 아니라고 했다;;)한다는 그 영화 아냐? 딱히 볼 TV 프로그램이 없기도 톰하디 나오면 톰하디 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계속 틀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확인한건 프렌즈 '로스'의 얼굴 뿐 흑흑 ㅜㅜ)

전쟁영화를 보기 싫은 이유야 많고 많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죽음'때문이겠지.
채 말라서 곱씹어 보기도 전에 계속 범벅되고 덧칠해져 끝없이 쌓여가는 무시무시한 폭력.
 그게 진저리가 나고, 그 폭력에 무뎌지는 것 조차 불쾌하다.

간만에 놀러온 주기자랑 오리고기 구워먹으면서 계속 TV 응시하다가 결국 채널을 돌렸다.
하나하나 안타까워하고 통탄해야할 죽음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더이상 소화가 안되더라. 

여튼 그러다가 돌린 채널에서는 '무사 백동수'가 하고 있었다.
무덤가에서 주인공의 아역쯤 되는 아이가 엉엉 울고 있었다. 아이의 옆에 선 어른이 짐짓 무게를 잡고 한마디를 던진다.

"울지 마라. 의로운 죽음이었다."

목놓아 울던 아이는 어른을 향해 볼멘 목소리를 던진다.

"세상에 의로운 죽음이 어딨습니까? 이건 개죽음입니다."

문득 인류 역사상 있었던 셀수없었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 서럽고 참혹한 현장이 안타깝지 않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저 대사만큼 꼭 들어맞는게 또 어딨나 싶다. 



20세기 소녀 2011. 7. 16. 23:55

정말 그지 같은 어떤 제작사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길 들었다.
팀장급인 사람들에게 이자식아저자식아 욕설을 입에 담을 정도라고 하니,
그 밑 사람들에겐 어떤 취급을 할지 안봐도 비디오였다. 
같은 직군에 있기에 더욱더 분노하고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붙어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단지 조금 더 받는 페이가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차마 비웃진 못했다.

아이의 학원비를 위해서,
몇달 후에 태어날 아기의 의료비를 위해서,
혹은 방값을 위해서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전세값을 위해서.

삶은 순간 순간이 치열한 투쟁이고 장렬한 전장이다.
고귀하고 숭고한 대의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치졸하고 졸렬하고 치열한 싸움이 난무하는 전장. 
하지만 결코 조롱하거나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진리.
뭐 그런게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

20세기 소녀 2011. 6. 2. 00:09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나 자신은 모든걸 다 알고 있단 장점이 있어서 합리화에 참 간편하지만,
그 합리화를 뛰어넘는 부조리와 모순 역시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불편하다.   
변명하고 핑계를 대기는 참 쉽지만, 
꼭 그만큼의 또 다른 악취가 나는 부패지점을 알고 있기도 하다. 

여튼 그래서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을 사랑하기 힘들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대체 누가 날 사랑해주나?
그래서 억지로 노력도 해봤다. 근데 안됐다. 
사랑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이니까.

나 자신을 미워하고 무시하고 괄시하기를 수년.
마음이 많이 병들었다.
세상천지 사랑해주는 사람 없는데, 어떻게 굳건하게 살 수 있겠는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병얻고 곪을대로 곪아서 시들어 가고 그랬다. 
 
이래서 사람이 자신감이 없으면 종교라도 있어야 한다.
기독교의 장점이라면 역시 세상에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는 거???!?!

오래간만에 형편없는 일을 지질렀다.
누군가에겐 손가락질 받을 일인지도 모른다. 
과한 열정은 촌스러움으로 치부되는 곳이니까.
언젠가 오늘을 기억하며 그 촌스럽고 철없음에 얼굴을 붉힐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상하게 오늘따라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수고했다. 사랑한다.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이돌 팬들이 외친다는 구호 따라. 오늘 나를 듬뿍 사랑해보련다. 

신. * .희! 신.*.희! 사.랑.해.요. 신.*.희
신.* .희! 신.*.희! 고.마.워.요. 신.*.희
신.* .희! 신.*.희! 영.원.해.요. 신.*.희




결혼을 앞둔 친구를 만났다.
어릴적에는 마냥 행복할 걸로만 상상했던 순간도 '현실'이란 썰에 대입해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안다. 그 괴리를 참을 수 없을 땐, '부조리'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다시 명명한다. 

전셋집을 구했다고, 전세 대란이 왜 문제인지 이제야 알겠다는 친구는 나보다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벽에 한가득 곰팡이가 핀 집을 봤단다. 돈을 맞추려니까 어쩔 수 없이 계약하겠다고 했는데 5분후 다른 곳에서 전화가 왔다며 2000을 올려달라고 했단다.
1년 2년을 꼬박 모아야할 돈이 몇 분새로 마구 올라가는걸 볼 때 스스로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서러웠다고 한다.  

문득 친구가 물었다. 
자기가 뭐 그리 잘못했냐고.

좋은 부모님 만난 덕분에 등록금대출받은 것도 없었다.
마이너스 없는 출발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래도 멀쩡한 직장을 잡아서 나름 아껴쓰고 나름 저축하고 나름 재테크도 신경썼단다. 
이십년 가까운 기억속엔 열심히 공부했나 열심히 일했거나. 두 가지가 전부였다. 
해외여행을 질펀하게 다닌것도 명품빽을 들고 다닌 것도 아니었다.
근데 돌아온 결과가 '고작'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초라한 것이어서 억울하다고 했다. 
자기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물었다. 

문득 조세희 씨가 철거촌 세입자 가정의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그집 가장과 나누었다는 대화가 떠올랐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하셨습니까?"
"열심히 일했어."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으십니까?"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까?"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친구에게 대답을 해줄 순 없었다.
나 역시 우리들의 불행은 누구의 탓인지 묻고 싶어졌다.




여행을 끝낸지는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까지 둥둥 떠다니는 마음을 잡을 순 없었다.
아니, 마음이야 언제나 의지의 문제니까, 그 마음을 붙잡고 싶지 않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심정이 어땠냐면,
벤쿠버발 한국행 에어 캐나다를 타는 순간. 나는 12시 마지막 종소리를 들으며 재투성이 아가씨로 변해버린 신데렐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나는 특별할 것 하나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마법이 풀려버린 그 기분이 너무나 싫어서- 끔찍해서 나름의 치유책을 낸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포털 사이트를 열고선 되도록 기사제목을 읽지 않았다.
TV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집으로 배달온 시사주간지는 봉투도 찢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게 아닌건 잘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진짜 그럼에도, 내 심정은 그랬다.
이곳에 적응을 마치는 순간, 정말 나의 소중했던 여행이 끝이구나.
마법같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고 언제나 새롭고 신나고 기운나던 시간들과 안녕 안녕.

비워둔 기간을 채운다고 해서, 이곳에 다시 적응한다고 해서,
서른살 방학. 내가 가졌던 그 꿈같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그냥 계속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차고 또 들어찼다. 

여튼 그래도 돌아왔다!
욕심내서 적응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천천히!
서른을 시작하는 첫머리. 한국에서 여백으로 비워뒀던 그 자리의 안락함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  

서른살. 지금은 재투성이 아가씨일지라도, 다시금 무도회장을 꿈꿔보겠다.



S에게

20세기 소녀 2011. 4. 13. 09:47


S!
쿠바 여행 초반, 내가 쿠바에 얼마나 실망했는지 너는 모를꺼야.
돈을 달라는 거지들, 20CUC에 몸파는 아가씨들. 
단순히 빵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그 실망이 극에 달했을 때, 독일인 친구가 '이곳 쿠바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어.
나는 주저없이 '북경 가본적 있니? 중국과 다를바 하나 없어.'라고 대답했지.

아바나에서 뜨리니다드를 넘어가는 버스 안.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OST를 듣고 있었어.
그리고 자본화 되어가는 쿠바에 대한 쓰디쓴 감상을 곱씹고 있었지. 

그때 마침 흘러 나온 노래가 Veinte años . 
그런데 노래가 말해주고 있더라고.
20년전 사랑은 더 이상 기억해선 안된다고, 그 사랑은 과거를 의미할 뿐이라고.  
불현듯 그 생각이 드는거야.
이곳에서 혁명이 있은지 50년도 더 지났단 생각이. 
그리고 이곳도 이제는 다른 사랑(?)을 시작할 때란 생각이 들었어.

그 버스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
쿠바는 결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정답이 될 수 없겠지.

-그럼에도.
페루 띠띠까까호수 해발 4000m 살면서 평생 양말 한번 제대로 챙겨신지 못하는 아이들이
기억나. 1솔짜리 팔찌를 팔기 위해 관광객 틈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
그런 아이들이 최소한 성년이 될때까지는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노동으로부터 보호 받고,
리마 플로렌스 부자거리. 보그를 읽고 BMW를 몰고다니는 아가씨들과 평생 양말 한켤레 사신지 못하는 않은 인디오들이 동등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세상.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최소한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구현하는데서
쿠바는 조금 더 아름답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니가 나에게 '쿠바'는 아메리카 다른 나라들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가봐야
무언가 느낄 수 있다고 말해준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지.

고마워. 네 충고가 없었더라면, 어쩔뻔 했니?
여튼 나는 서른다섯 전에 다시 한번 쿠바를 밟기로 결심했어.

부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쿠바가 지금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길!
거리 골목골목 만났던 빛나던 이들이 지금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길!  


-장*다보다 못한 년으로부터

 

 







Veinte Anos
Qué te importa que te ame, si tú no me quieres ya? 
El amor que ya ha pasado no se debe recordar Fui la ilusión de tu vida un día lejano ya, Hoy represento
al pasado, no me puedo conformar.
Hoy represento al pasado, no me puedo conformar.
Si las cosas que uno quiere se pudieran alcanzar, tú me quisieras lo mismo que veinte años atrás.
Con que tristeza miramos un amor que se nos va
Es un pedazo del alma que se arranca sin piedad.
Es un pedazo del alma que se arranca sin piedad.
Si las cosas que uno quiere se pudieran alcanzar, tú me quisieras lo mismo que veinte años atrás.
Con que tristeza miramos un amor que se nos va
Es un pedazo del alma que se arranca sin piedad.
Es un pedazo del alma que se arranca sin piedad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전에 사랑했었다는게 무슨 상관인가요
이미 지나간 사랑은 기억해선 안되겠지요
먼 옛날 나는 당신 인생의 꿈이었는데 지금은 과거를 의미할 뿐이고
나는 그때와 같아서는 안되겠지요
누구라도 원하는 일들을 이룰 수 있다면 당신은 이십년전과 똑같이 나를 사랑하겠지만
사라져가는 사랑을 슬프게 바라봅니다
처참하게 부서져버린 영혼의 한 조각처럼


 


만두에게

20세기 소녀 2011. 3. 31. 10:00

제대로 된 편지지 하나 없으면서 네게 편지가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일기장 맨 마지막에 적었다가 한국에 돌아가면 제대로 된 봉투에 넣어줄께. 편지를 부치는 방법도 있지만, 핑계를 대자면, 쿠바 아바나에서 한국까지는 우편으로 한달이 넘게 걸린다고 해. 분실사고도 빈번하고 말야. 그리고! 그 전에 내가 도착할꺼야. 파하하.  

네가. 지금. 이곳. 쿠바 아바나에 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눈에 너무 선해서.
일기도 못쓸만큼 '나'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이곳에서도 자꾸만 네가 생각난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 아바나에는 작은 광장들이 많이 있어. 커다란 하나보다는 서로 다른 다양함을 추구하지. (듣기엔 베를린도 그렇다고 하는데 사회주의의 산물인듯) "비에하 플라자" 우리 말로 하면 오래된 광장. 이곳에는 유럽 애들이 줄을 서서 커피를 사가는 예쁜 커피숍이 하나 있지. 아침 8시 반부터 줄을 서서 아침 9시 10시면 다 팔리고 없는 경우도 있고, 그 전날 미리 예약을 해 가는 관광객도 많고.
여튼 쿠바 아바나에서 가장 자본주의(맛있다고 질 좋다는 뜻) 냄새가 물씬 나는 커피숍에서 나는 방금 커피 꼰 럼(럼들어간 커피)를 마시며 기분이 좋아서는 어쩔줄 모르겠다. 이렇게 유쾌하고 행복한데, 꼭 그만큼 혼자 있다는 게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구나.

요즘 들어 알콜에 눈 뜬 너와 이 술들어간 커피를 함께 했다면 얼마나 신났겠니. 비에하 광장에서 노닥거리는 꼬마들 사이에 '아하하하' 큰소리로 웃어대는 어글리 꼬레아나스 가 될 수 있었는데 말야.

헤밍웨이가 '내 인생의 모히또'라고 외쳤던 잡화점에서 모히또를 마시고, 250원 하는 길거리 피자를 먹으면서 배를 두들기고, 소복한 하얀 눈을 연상시키는 다이끼리를 마시고,
내가 연애를 안해서 그러는 걸까? 좋은 곳에 있고 좋은 걸 만날 때마다 대게는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 아니면 어쩜 아바나 시내에는 젊고 활기찬 청년들이 가득해서 한국 남자들 생각은 안나는지도 모르지.

땀띠가 나고, 하루면 티셔츠와 반바지가 소금기로 가득 쩔어버리는 이곳이지만.
말레꼰 방파제에서 바다로 점핑하는 남자애들을 바라보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하게 트인다.

길을 가면 삐끼들 투성이. 듣자하니 몸을 파는 아가씨들도 있다고 하고. 구걸하는 거지들도 참 많아.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모습을 조금 기대하고 온 여행이었지만, 조금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길 바랬는데 그런건 만나기 어려운 듯. 공룡을 보고 싶었는데, 사라져버린 공룡의 화석만 만난 기분이야. 그런데도 이상하지? 이곳이 전혀 실망스럽지 않으니 말야.
화석을 죽어버린 돌덩이로만 볼 것인지, 그 화석을 더듬어 그 옛날 존재했던 거대한 공룡을 상상할 것인지는 내게 남겨진 몫이겠지.

그래도 이들의 노래와 춤사위에는 그날의 격정적인 승리가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태어나면서 부터 룸바를 추고, 싸움을 하면서도 룸바를 추었다는 쿠바인들은 춤의 이유는 잃어버렸을지 몰라도 이렇게 춤을 추고 있잖니.
날씨가 무더워지는구나. 슬슬 내셔널 갤러리로 이동해야겠다.





쿠바 아바나에서 넷째날.
화석을 더듬고 있는 너의 친구 앙증으로 부터.

<불의 기억 3권>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340p

1977년 아르헨티나 - 부에노스 아이레스

자식들에 의해 다시 태어난 여인들,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대이다. 사라져버린 자식의 사진을 머리위로 쳐들고 정부청사 앞 오벨리스크를 돌고 또 돈다. 많은 군대 병영과 경찰서와 교회를 순례했을 때와 똑같은 집념으로 끊임없이 돈다. 그 많은 울음으로 메마르고, 그 많은 기다림으로 절망한 몸으로 돈다.

"나는 자식이 살아 있다고 믿으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여인이 말하고 모든 어머니가 말한다.

"해가 점점 높아지면서 나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정오가 되면 아이는 내 가슴에서 죽는다. 날이 저물면 아이는 다시 살아나며, 나는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고 식탁에 아이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러나 밤에 아이는 다시 죽고, 나는 절망하며 잠든다. 이튿날 눈을 뜨면 아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을 '미친 여인들'이라고 부른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녀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정상인 이 나라에서 달러는 값싸고, 어떤 사람들 또한 값싸다.
미친 시인들은 죽음으로 가고, 정상의 시인들은 침묵을 찬미하며 칼에 입을 맞춘다.












만두에게
만두. 너도 알겠지만
난 얼마간 자신에게 답을 내릴 수 없어서,
내자신을 긍정할 수 없어서.
비뚤어지고 소심하고 작아지고(몸집이 작아졌단 얘기는 아니고) 움츠러들 때가 있었어.

오늘 네가 준 엽서를 보는데 왈칵 코끝이 시큰시리더라
차마 너 보는 앞에서 울면 그야말로 서눈물 취급 받을 것 같아서.
(그건... 우리사이에 치욕이잖니....ㅋㅋㅋㅋ)
'어맛 일주일도 더 된 감기가 안떨어지네' 콧물 드링킹 하는 척 훌쩍이고 넘어갔지.


하지만 네가 써준 엽서에
와, 나 정말 감동먹었다고.
'감동한 게' 아니라 '먹었다'고.
(능동은 1%도 안들어간 채, 네가 내게 해준 말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감동이 넘실대며 밀려왔다고 ㅠㅅㅠ )

우린 때때로 느끼하지만,
그 기름기가 서로 용해되고 녹아들만큼 잘어울려서 참 다행이야.
진짜 진짜 다행이야.

떡볶기는 다녀와서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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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는 홍대

20세기 소녀 2011. 1. 30. 23:58
만두에게

네가 올 날도 머지 않았구나. 대만에서 남은 마지막 밤은 잘 보내고 있니?
묵은 체증이 가시는게 아니라, 한국 오기 싫어서 너무 싫어서 침대에서 곡을 하는 네가 되길 빈다.  그만큼 너의 두달이 꽉꽉 차서 즐거웠길 바란단 의미야.

나는 이번주 토요일 밤을 홍대에서 보냈어.
근데 보통 홍대에서 보냈으면 건하게 취한 환락과 유흥의 의미를 포함하잖아. 근데 그런 '홍대'가 아니라 진짜 '홍익대'였다고. 이금댕이 다녔던 그 대학 말야. 그 문헌대 돌바닥 위에서 밤을 지새웠지.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고 한달이란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번 토요일이 두번째 밤샘이었어. 평소에 찾아가지는 못하고, 당원분들 나가는날 나가서 삐죽 얼굴 비추고 오는 게 전부이지만 말야.


일요일 새벽 홍대 농성장을 나서는데 그때까진 동이 트지 않았어.
7612 버스를 타고 지나는데 거리가 참 한산하더라. 한산한 홍대거리라니, 흔하지 않은 풍경이지. 그리고 그 위로 천천히 해가 들기 시작했지.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중앙 차선 위로, 괴물같이 들어섰지만 허물처럼 비어져있는 롯데 시네마 사이에, 보기만해도 애틋한 두리반 건물 위에, 이십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린나이 빌딩 위에.

그때 느꼈지.

아! 휴가다.
그 무엇도 나를 재촉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나의 선택에 달린.
무엇보다도 사무실 노트북 앞에 앉아서 고생하고 있을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다시 맞이하는 인생의 방학.

그 탁트이고 활짝 열린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남미 여행을 떠나기가 아쉬울 정도였어.

두달 만에 만나는 서울은 어떠니?
우리 동네는 또 얼마나 변한 것 같니?

일요일 아침 느꼈던 그 자유로움이 너무 좋아서,
두달 여행 뒤에도 뜨는 아침해를 다시 보고 싶을 것 같아.




줄서기

20세기 소녀 2011. 1. 2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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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학교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배우는게 '줄서기'다.
그 줄을 따라 학년을 따라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을 가고 스펙을 쌓고 취업을 하고.

팔리기 위한 삶.
팔려나가려고 안간힘 쓰는 삶.
팔리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삶.

열맞춰 나란히 전시된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푸른 바닷속에 살았던 어제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탈이란 쉬운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어렵고
소모되지 않으려면 뭘해야할지 알 수 없다.


 
-2011.01.19 자갈치

공짜밥

20세기 소녀 2010. 12. 24. 15:49


<지식채널 E 공짜밥>

저 아이들 앞에서,
가난을 부끄러워 말아라,
가난 앞에 당당해라 는 소리를 해댈 수 있는지
멱살을 잡고 묻고 싶다.  



만두에게

20세기 소녀 2010. 12. 22. 10:26

크리스마스를 4일 앞둔 12월 21일

사무실에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 문장 맨 앞에 ‘아직도’를 넣을지 ‘오늘도’를 넣을지 꽤 오랜시간 고민을 했어.ㅋㅋ)

금요일엔 비행기 티켓이 왔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인, 하바나 아웃. 벤쿠버와 토론토를 두 번이나 경유해야하지만 예전부터 몸빵으로 모든 걸 때우던 저렴한 인생이니까, 난 괜찮아. 암 괜찮을꺼야. 

요 며칠 돈이나 벌겠단 심정으로 홍보 회사일을 하나 도맡았어. 생각보다 애먹이더라고. 덕분에 지지난 주말부터 지난주말 토요일 밤까지는 수면시간이 한참 부족했어. 아직 서투르기도 하고,  난생 처음 해보는거라서. 그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때 경험해보는거니까, 분명 나중에 다시 할 땐 좀 더 쉽게 할 수 있겠지.

요즘 남미관련 소설이나 역사책을 이것저것 읽고 있는데, 일요일엔 세풀베다의 단편집을 읽었어. 근데 너무 우중충한거야! 게다가 그 직전에 읽었던 책은 <불의 기억>이었다고;;;; 과연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밝고 명랑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피의 역사가 광폭무도하게 휘몰아치고 원주민의 한이 피맺힌 그 대륙에서?!?!?!?!
꾸중 꾸중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켠 게 뭐였는지 아니? 너마저 날 경멸하지마~ 브리짓존스의 일기였다;;; 미안.... 새상을 파스텔 색으로 채색시켜줄 색안경이 필요했어. 뻥인걸 알고 있지만 뻥을 쳐줄 뻥카가 필요했다고.

막상 여행을 떠나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예상보다 큰 돈이 드는건 두말할 것 없고. 보통 다른 애들은 내나이가 되면, 자기 평생의 짝을 찾아 삼천만원가량의 혼수비를 들고 평생을 결정짓잖아. 하지만 나는 저먼땅 아메리카 허공에 천만원 가량을 쏟아 붓고 오는 구나. 결국, 인생의 두 달 다녀오고 나면 제자리일 뿐인데 말이지. 헛짓거리 하는 거 아닌가란 생각도 들고 평범하게 대학 나와서 취업하고 결혼을 선택하는 남들과 조금씩 달라진 길을 걷는다는 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만두야! 있잖아. 누구나 그렇겠지만, ‘누구나 그러하다’고 해서 위로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분명 나에게도 그 부분이 있거든. 조금은 부족한듯한 외모와 (그래 터놓고 말해보자.) 한참을 부족한 외모와 눈을 아무리 비벼봐도 찾아볼 수 없는 여성성. 자신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방치하고 숨겨두기만 했던 그 부분! 그건 분명히 내게 부족한 점이야. 아니, 없는 점이라는 표현이 더 절묘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그건 ‘모두가 그런 점이 한두개씩 있다’고 해서 위로가 되지 않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남들 안 가보는데 가보면서, 쉽게 용기 내지 못하는데 용기내면서 내 부족한 점을 가리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 건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닌데 말이지.

차라리 좀 더 예뻐지고, 나를 꾸미는데 돈을 투자하고, 최대한 안정적인 직장 윤택한 경제생활 가지고 있는 남자 만나서 무임승차하듯 인생 편하게 가는 방법도 있는데, 실은 그럴 자신이 없으니까 그건 가능성이 없는 일이니까 괜히 뻣대고 다른 길로 튀어서 괜찮은 척 하는 건 아닌지 싶은.

니가 옆에 있다면, 분명 아니라고 말해주겠지. 근데 일단 지금은 네가 없잖니. ‘네가 틀리지 않았어’라는 위로를 받고 싶은데, 그렇게 말해줄 몇 안되는 친구인 네가 없어서 오늘은 좀 우울하구나.

대만으로 보낸 크리스마스 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동봉한 녹색물질은 <마테차>야. 멕시코 산 녹차인데, 살 빠지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해서 유명하대. 마테 차에 근사한 전설이 있는데, 언젠가 그 구절을 읽으면서 너랑 마테차 한잔을 하고 싶구나. 지금은 같이 할 수 없는 대신, 각자 끓여먹도록 하자고!

 

조금은 우울 센치한 앙증으로부터





술자리에서 싸웠다.

고작 대기업 취업한 것 하나만으로 성공에 도취돼있는 걸 견딜수 없었다.
자신처럼 살지 못함을 '게으름'이나 '성실성 결여'로 치부하면 정말 답이 없어진다. 
좋은 스펙을 가지지 못할 거라면 실업계나 갔었어야 한다니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고졸 졸업장만 가지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건 자신도 너무나 잘알면서.
취업 두 글자로 그렇게나 스스로가 대단해 졌다고 판단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너 역시 길게는 삼십년 짧게는 십년. 소모되고 버려질 인생이다.
냉소하고 싶었지만 그말은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라는 저주의 말처럼 생각돼서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이명박들이 넘쳐 났고
그게 화가 나서 숨이 막혀서 견딜수가 없었다.

아침에 문득 눈 떠 생각했다.
사실 나 자신부터가 이명박이고 나부터가 미친 세상인데 말이다.  
싸울 대상을 잘못 골랐다.
들이 받았어야할 상대는 내 동창생이 아니라 이 미친 세상이었다.
 
선배 언니가 나에게 해준 말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언젠가 부조리함을 봤을때 그 실체가 아무리 거대하고 견고하더라도
옳음을 옳다 그름을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게 바로 성공한 운동이라 말해줬다. 

그렇게 화를 내던 나는 뭐 그리 떳떳하게 살고 있나.
내세울 것 정말 단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어제밤 내가한 행태는 분명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이었다.
스스로가 부조리한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타인에게 더더욱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밀고
그나마 나은 나라고 확신할, 양심을 위로할 무언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스스로의 모순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르겠다.







반가운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일년에 한번 정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하고,
봐야겠단 생각이 들면 날짜를 박아 얼굴을 보고 밥 한끼에 서로의 근황을 전하고
그 한번마저 생각나지 않으면 그마저도 지나치고.
그래도 길가다 만나면 반갑고 유쾌하고 배를 잡고 웃고
그정도에서 꽤나 만족하고 지낸 사이다.
근데 그건 '만족;이 아닌, '별수 없는 체념의 상황'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서는 여러 감정이 읽혀졌다.
무슨일이냐 물었다. 쓸쓸하댄다.
여친과 헤어졌냐고 물었다. 그런 쓸쓸함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함께 어울리던 여럿의 이름이 많이 떠올랐는데,
누구는 결혼하고 누구는 어디가고 누구는 연락이 끊기고 목소리 들을 번호가 몇 안되더란다.
몇몇마디에 참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냥 함께 지냈던 이런저런 추억들을 떠올리면 꼭 중학교 시절이 아니더라도
감정이 복받치는 날이면 주먹을 꼭 말아 쥘만큼 그리운데.

그렇게 웃고 떠들고 함께하고 커가고
그런 모든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고, 추억으로 남는 것이 고작이고,
언젠가는 그 조각들을 흐릿해지고 빛바랜 채로 꺼내어
더 이상 추가도 수정도 탈고도 할 수 없는 마침표를 찍었음을 통감할 수 밖에 없다.

옆집 옆집에 앞집에 24년간 살았던 우람이가 이사가고,
추석때마다 함께 십오년을 함께 소원을 빌었던 홍얼이가 결혼을 한다.
흡사 함수와 자판기 처럼, 달라진 상황을 누르고 나면, 달라진 관계가 출력된다.  
그래서 지난 보름달을 보며 함께 맥주를 마시고 들어오던 길.
아 이 자리는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겠구나를 되뇌일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정체할 수 없이 끝없이 변하는 존재라지만
가끔은 돌아봤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줄 지표가 고정된 상수가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어디쯤 왔는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압정으로 고정하듯 꼭꼭 박아둘 관계는 어디서 찾아야할지 모르겠다.


우울과 슬픔

20세기 소녀 2010. 10. 7. 11:04


우울은 장기간에 걸친 얕게 깔린 감정이라면
슬픔은 촘촘히 밀집 된 감정이라고 하겠다.

엊저녁엔 버스를 타는데 크고 높은 감정이 진짜 빵! 하고 터졌다.
몹시 슬펐다. 다행히 길게 가진 않았다. 

마포대교 혹은 서강대교를 지나 신촌을 지나 동네에 도착.
나는 언제까지고 이 풍경을 반복해야 할까.  
무수히 많은 반복을 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궤도로 남는 것은 아닌데-
반복되는 일상이 숨통을 막고,
그러다 어느날 부질없이 사라질 것에 또 서글퍼지고.  

소모 될 수 밖에 없는 진실이 속상했고
이 바닥을 아무리 난다 긴다 하지만, 결국엔 모두 퇴물이 될 것이 비참했고
다른 길은 있겠지만 결과 또한 모두 비슷할 것 같아서 슬펐다.

어제는 슬펐지만 다행히 오늘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던 나는,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인생의 화두를 찾는데 골몰하겠다.



가난

20세기 소녀 2010. 8. 9. 11:35


10년전 그 애는 머리를 빡빡 밀었다.
400점 만점의 수학능력시험. 2학년 마지막 모의고사 때 그애는 모의고사 점수는 200을 넘지 못했다.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 그애는 공부를 시작했다.
머리를 밀었다. 치열한 1년의 시작이었다. 다행히 굳센 의지만큼 결과는 놀라왔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믿을 수 있었다.
노력한만큼의 댓가를, 치열함의 보상을.

작년 이맘 때 나는 그애를 만났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며 멋쩍게 웃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대학 4년, 사립대학에 높은 등록금은 넘기 어려운 산이었던듯 했다.
그애의 머리는 10년전 그대로 빡빡머리였다.
갑자기, 무너져 버리는 것들이 생겼다.
10년전 그애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애는 아직도 좀더 치열해져야만 했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누구든 붙잡고 말하고 싶었다.
그애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안타까울정도로 꾸준하고 묵묵했는지.
그 모든걸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가난을 본적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작년 이맘 때 느꼈던 나의 참담함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내가 본, 내가 느낀 가난의 단면은 그것이었다.

십수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치열해야하는 것.
살기 위해 끝없이 싸워야 하는 것.
한발 뒤로 물러설 곳 없다는 것.

그 비정함이 몸서리 칠 만큼 지긋지긋하고 서러웠다.



사막 속 우물

20세기 소녀 2010. 6. 17. 15:37


사실 난 이번 월드컵 우리나라를 응원할 생각이 그리 없다.
'대~한민국!'이라니!
신명나서 어깨를 들썩이는 것도 한 두 해지,
8년째 같은 리듬 타기 진부하다. 질리고 지겹다.
그래, 맞다! 나는 원래 변덕이 심하다.

내가 이렇게 나라에 대해 시큰둥해 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 나라가 나에게 해준게 뭐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몇개 없는거 같다는 결론과,
짝사랑도 한두 해다. 외사랑으로 끝날 사랑은 안하는게 낫겠다.라는 판단.
여튼 우리 나라, 우리 사회에 대한 실망이 한 몫한다.
국가최고 지도자랍시고 TV나온 사람에 대한 살의도 큰부분 차지한다.
(그 사람이랑 같은 국적인게 부끄러워 참나 살 수 없다! 미치고 돌아가시겠다;;;)

나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흡사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함께사는 권태기 부부'같은 모습이다.
별 수 없어 산다. 별일이 안생겨서 산다;;;;


지난주말, 재촬영과 재편집. 24시간만의 퇴근을 경험하는 와중에 그래도 간신히 짬을내 그리스전 축구 시청만큼은 허락됐다. 아빠도 나가셨겠다, 엄마가 애들 불러도 된다고 했겠다, 기회를 틈타 우리집으로 동네파를 불렀다.

동네파는 알러뷰 티셔츠를 맞춰입고 왔다.
피자를 두판 사왔다. 무한도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먹어치웠다.
싸구려 피자라 양이 적어 그렇다며. 다같이 변명을 했다.
손가락 빨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김마망이 40분 걸려 치킨을 배달했다.



닭관절을 씹으며 내가 말했다.
"난 요즘 우리나라 별로야. 권태기랄까? 국적을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어. "

콜라를 들이키며 만두가 말했다.
"그래도 연희동은 좋아."

그래. 만두의 말이 맞다.  
이딴 나라, 지긋지긋한 땅 구석, '국개'라 불려도 싼 사람들.
진절머리나는 틈바구니가 뭐가 좋다고,
모든걸 훌훌 털어버리고  이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동네에 있었다.

우리동네. 우리집, 우리 식구, 동네파, 친구들, 연희교회, 연세대, 사러가 근처, 꾸러기 놀이터.... 일억만금을 준다해도, 바꾸진 않을테다. 일억만금 값나가는 보물이 바로, 내가 사는 이 나라에 있었다. (아무도 일억만금 주고 사진 않을테지만 ㅎㅎㅎ)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야."
어린왕자가 말했었나, 여우가 말했었나?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나는 사막같은 세상 속,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우물' 하나를 숨겨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욕할 것 투성이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누구나 각자의 마음 속 우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백명의 마음속에는 백 개의 우물이. 천 명의 마음속엔 천 개의 우물이.

그래서 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모래투성이 사막일지라도,
 정녕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사는 이 못난 나라도 진정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생각해봤다. 
'대한민국~'까지야 못외치겠지만,
그래도 조금, 응원할 마음이 생긴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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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권태기 부부사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만취한 '민국이'와 '나'.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참 쉬운 애였다.
잘웃고, 잘울고, 잘 감동받고, 잘변했다.
나 같은 애가 누군가를 (짝)사랑하기란 참 쉬운 일이었다.
안습인건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그 시절, 나는 계산을 했던건지도 모른다.
나의 외모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었으며, 그렇다고 미친듯이 사람을 잡아끄는 재주나 매력이 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단독으로, 원톱으로 사랑받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나의 선택은 '눈에 띄기'였다.
목소리는 원래 컸고, 오지랖도 원래 넓었다.
그 덕분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속한 학교와 학원 교회에서 나는 온갖 수다에 중심에 있을 수 있었다. 덕분에 누구와도 말을 섞어도 이상할 것 없는 담대한 역할이 나의 역할이었다.  
따져보면, 애초에 내가 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부터 몇 없었다.

때때로 내가 행했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 푼수떼기 같은 수다들. 소란스런 사건사고들.
하지만 그 덕분에 짝사랑했던 그가 박장대소를 하며,
'귀엽다'랄지 (하지만 나는 그시절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귀엽다라는 것은 우습다의 또다른 표현일 뿐인 것을;;;)
놀리듯 나에게 다가와 '우리 결혼할까?'라고 말해주면
그건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첫째가 아니어도 좋았다.
감히 욕심내지 못할 주연을 꿈꾸며, 닭이 텨오른 지붕을 바라보는 꼴은 추하다 생각했다.
그보다는 분수에 맞는 조연역에 충실한 것이 덜 추해 보였다. 
그렇다. 밑밑한 주연만 노리다간 결국 이 평생이 다 가버릴것만 같았다.
빛나는 감초역이라도 꿰차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예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몇년전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열연한 조연 역할 덕분에 그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빈말일지는 모르지만 가끔 생각났고, 보고 싶었단 이야기도 덧붙였다.

어쩌겠는가?
그 사람 기억속에 남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내 방법이 틀렸다고?
내 입장이 한번 되어보라고 말해보겠다.
분명, 몇 번이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그 방법 외에는 없다 할 것이다.




소원의 집합

20세기 소녀 2010. 5. 6. 14:21


20대 여자들이 자주가는 다음카페가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세 곳이다. 나는 그 중 두군데에 가입돼 있다. 카페가 처음 생긴 목적성을 가지고 가입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자주 드나든다.인터넷에서 찾는 즐거움의 90퍼센트 이상을 그곳에서 찾고 있다. 마치 루라도 열어보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듯 드나든다. 주로 두 군데를 자주 다니고 있는데, 그 중 한 카페 메인에는 소원을 비는 란이 있다.

며칠 전 아이템을 하도 안풀리길래 아이템 풀리라고 소원을 적었었다. 대략 5분쯤 지났었을까? 우연히 다시 메인페이지에 들어갔는데 놀라고 말았다. 그 짧은 시간 많고 많은 소원들이 달려서 내 글은 밀려버린 것이다.

이 카페에 드나든지 어언 1년이 다 돼가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이토록 많은 소원이 적히고 있었다는걸 모르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새 글이 달리고 있는데, 대체 왜 그걸 몰랐을까?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어도, 그 소원은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드래그해서 복사한 다음 가져다 붙이기 한 것 처럼 말이다.

돈 많이 벌고, 살빠지고, 로또 당첨되고, 예뻐지고, 시험 잘치고 (관)심남이 나에게 연락하고, 성공. 미모. 돈. 사랑.
지금 세대가 욕심내는 것들은 참 단순했다. 몇가지 주머니로 분류하면 싹쓸이 돼서 그 안에 쏙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몰랐었나보다. 거기서 거기인 소원들. 그 외의 것들이 적힌적이 없었으니, 새로울 것이 없었지. 


내가 빌었던 소원이 유달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디테일(?)이 살아있긴 해도 나의 소원 역시 '성공'이라는 욕망의 범주 안에 들어가니까. 그냥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나는 어떤걸 '소원'하며 사는 사람이 될지 말이다.

대량 생산 된 엇비슷하게 생긴 '대중'의 하나 일 수 밖에 없는 세대라 할지라도 특별한 것을 바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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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은 나의 소원을 설명하는 그림.
나의 작은 소원중 하나는 집에서 개를 키우는 거다. 이름은 정해놓은지 오래다. "신김치"




몇 년 전. 나는 늘 그게 의문이었다.
나보다 서너살 나이 많은 사람들의 미니홈피를 들어가면 어김 없이 보이는 아기 사진. 자기 애도 아니고 대체 주변 지인들의 아기 사진은 왜 퍼오는 건가? 분명 자기 아는 사람의 애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애를 매게로 만난 것도 아니고, 당사자(애)와 대화를 나눌 것도 아니고, 정서적 공감을 전할 것도 아니고.
 
나는 그것이 참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오늘 미니홈피에 친구내 애사진을 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래서 욕은 함부로 하면 안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엄마가 되고 나면, 자신의 폴더를 닫은 채(웨딩 사진+결혼 전 사진이 들어 있는 폴더;;;) 새 폴더를 연다. 아기 폴더다. 그리고 새로운 미니홈피가 탄생한다. 미니 홈피 주인의 모든 과거를 지운 채 오직 새로운 탄생물의 존재만을 알려주는 아기용 미니홈피.

아래 글은 내가 몇년 전 엄마가 된 내 친구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끄적댔던 한 글귀다.
부성의 부재에 대해서 분노하고, 모성만을 강요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은 아직 여전하다.
하지만 내게도 모성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의 여지만큼은 남겨두겠다.
꼬마 니꼴라에 나오는 애들이 깨물어주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를 덧붙여서.
 


친구가 엄마가 됐다.

엄마가 된 그네는 참 많은 변화의 직면한다. 그네를 만나는 나 역시참 많은 변화에 직면한다. 갓난 아이 때야 별 문제 없었다. '오, 젖주는 구나!', '오, 우유타는 구나!', '오, 목욕하는구나!' '오오오! 드디어 잠들었구나!'
변화는 작았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엄지와 검지로 눈가를 가리킬 정도의 아주 작고 미세한 정도의 변화.

문제는 아이가 두 다리로 서기 시작하면부터였다. 위험과 비위험을 구분하지 못하는 몸뚱이가 제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얼마나 수 많은 위험이 그애를 기다리고 있던가. 두 살이 된 내 친구의 아이는 빙글빙글 돌면서 가게 테이블 모서리에 지 몸을 갖다 박고 울음을 터뜨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와 주변 사람들은 아기가 이뻐 죽는다. 그런데 어쩌지? 난 내 친구의 애기가 하나도 이쁘지 않다. 친구의 애는 나와 내 친구를 갈라 놓는 방해물이며, 내 친구와의 만남에서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게 하는 강철같은 벽이었다. 우리 둘의 만남을 십수년간 이어져온 우정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드는 지우개였다.

정말 내가 내 속에 있는 말을 톡 까놓고 한치의 거짓 없이 티끌의 터럭 없이 '솔직히' 말하건데, 친구 애가 입에 문 과자를 침으로 으깨고 여기저기 뱉고 다닐때 구역질 났다. 그 식욕 좋은 내가 입맛이 뚝 떨어졌다.

며칠 후, 주변 사람들에게 친구의 애가 밉다는 이야길 했다.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다. 졸지에 정이 없고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아무도 나의 감정에 동의해주지 않는다. 주위 반응에 조금 당황한 나는 그래도 친구의 애니까 조금은 이뻤다고 덧붙여본다.
그렇게 맘에도 없는 모성을 억지로 덧입혀본다.

자괴감이 든다. 나는 모성이 결핍되어 있는 인간인가? 모성은 갖추어야만 하는 필수 덕목일까? 모성이 원초적인 본능일 수는 있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다 똑같은 양의 모성이 있는 건 아닌가,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건데?

나는 내게선 찾아 볼 수 없는 '모성'과 비교할 만한 개념을 떠올렸다.
그럼 부성은? 부성은?
나는 단 한번도 남자들이 '난 애기가 싫어'라고 말해서 비난 받는 사람을 보진 못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인가?

모성의 결핍은 크나큰 결함인데, 부성은 그렇지 않다. 남자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나처럼 귀찮게 여기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존재할 수 있는 현상이다. 모성은 필수, 부성은 선택. 모성 없는 여자는 비정상이고, 부성없는 남자는 정상일 가능성이 높고.

 "책에서 봤는데, 두 살부터 네 살 까지는 아기에서 어린이가 되어가는 과정이래. 그래서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고 감정의 조절이 잘 안된대."

'아악 아악 꿰엑 꿰엑'하고 친구의 애가 괴성을 지른다. 그 우렁찬 괴성에 깜짝 놀라하는 나를 보며 친구가 말했었다.

엄마가 된 내 친구는 왜 이리 초라하고 작아보이는지.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하다는데 그건 그 아기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인거 같다. 나도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하다. 하지만 내 친구는 다르다. 어머니가 된 친구는 한 없이 작고 초라하다.

특히나 이 사회에선 더더욱 그렇지. 그래서 그렇다. 친구네 애기 잘못도 아닌데, 역시나 나는 내 친구의 작은 어깨에 덧대여 디비 잠이나 퍼자는 그 아이가 무척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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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우리 출연자는
여드름 잔뜩 난 얼굴에 씨익 웃는 미소가 무척 귀여운 소년이다.
수줍은 미소 만큼 마음씨도 곱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도 지극하다.

하지만 그 착한 아이가 어려운 형편에 공부를 하기 위해선
알면 가슴아파 하실까봐 엄마 몰래 급식을 굶고, 그 돈을 모아서 문제집을 사야한다.
한달에 한번. 헌혈을 해서 받은 문화상품권을 모아 참고서값을 마련해야한다.

열정을 다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 애의 모습을 불쌍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동정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상대에게 베푸는 감정이기에-

그 애는 결코 불쌍하지 않다. 하지만 위태로워 보인다.
그 곱고 고운 마음이 언젠가 돈이 근본이 되는 세상에 부딪혀서 상처 입을 것이 보이고,
좋은 학교 간다 하더라도 비싼 등록금, 허울좋은 브랜드들로 치장한 친구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까봐 두렵다.
그래서 나를 이토록 감동시킨 그 순수함을 잃게 될까봐, 가슴아프다.

치열함과 맹목적인 것은 왜 가지지 못한 자들만의 것일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지치고 힘들고 괴로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일까,

김상곤 교육감이 실시하려고 했던 무상급식 정책을 뒤집어 엎은
딴나라당 개새끼들, 경기도교육청 썩은 윗대가리들만 생각하면 정말 욕을 한바가지 해주고 싶다.


그 애는 오늘도 엄마를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공부한다.
책상에 엎드리지 않기 위해 의자에 밧줄을 묶고,
혹시나 조는 자신을 깨우기 위해 손목에 건 고무밴드를 튕긴다.
손목시계, 책상 위, 집안 곳곳. 가리지 않고 붙여둔 포스트 잇 위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그애의 꿈이 한가득이다.

나는 그애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치열해야하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에 대해서 생각했다.
 
분노를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에 대해, 세상에 대해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를 어디에 쏟을지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욕을 하면서 비야냥 거리면서, 때로는 비웃으면서. 하지만 그 분노는 그렇게 소모되고 해소될 것이 아니다.

그 애의 밝은 미소가 너무 예뻐서, 프리뷰테잎을 보면서 몇번을 울컥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꿈을 그리면 그린 만큼의 미래가 돌아올거란 믿음을 지켜주고 싶다.
그런 세상이 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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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들릴 일이 있었다. 평소 지나던 우정골목이 아니라 연희교회쪽으로 몸을 틀었다. 골목 어귀 조금 낯선 풍경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감사했읍니다 건강하세요'. 비어버린 미용실을 들여다 봤다. '헤어킴 사장 미세스 김' 언니는 그렇게 떠났다.

'5000원짜리 학생커트 2만원짜리 파마'.
대학생들 동네 아줌마들 상대로 미용실이 참 많이 생겼다. 그래도 동네 아줌마들 줄줄이 머리에 수건을 얹고 TV를 보고 있는 미용실은 '헤어킴'미용실이 유일했다. 작년 이맘때 쯤 파마약 때문에 독이 올라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염색 안해요, 파마 안해요' 써붙여도 동네 아줌마들은 '이번 한번만', '나만'을 외쳤다. 그래서 결국 언니는 이렇게 안녕을 고했나보다.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진아미용실에서였다. 당시 언니는 '미스 김' 시절이었고, 진아미용실 사장에게 고용된 종업원이었다.  손님이 8명 9명 몰려 있어도 진아미용실 사장 아줌마는 가위를 들지 않았다. 밀린 손님은 모두 미스 김 언니의 몫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언니가 안됐다고 말했다. 엄마는 그게 사장과 종업원의 차이라고 말해주었다.
중학교 1학년 당시 커트비용 5000원. 그리고 나는 두달 전까지 언니에게 5000원을 내고 머리를 잘랐다. 언니의 손을 타지 않고 머리를 잘랐던건 진아미용실이 망했을 때 몇달, 대학교 졸업후 호일파마했을 때 세달, 언니가 출산휴가로 문닫았을 때 한달이 전부다. 모두 합하고 빼도 15년이 된다.

진아 미용실이 망했던건 나 대학때 일이었던거 같다. 몇달의 시간이 흘렀다. 우연히 동네 골목에서 마주친 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학생, 저 여기다 미용실 차릴거예요. 그럼 이리로 와요.' 언니는 드디어 사장이 됐다. (비록 종업원은 없을지라도) 그때 본 언니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우리 할머니 누워계시던 몇년. 출장까지 와서 머리 잘라주면서 단돈 천원도 더 안받으려고 했던게 생각난다. 나 맹장터졌을 때 3일 안감은 머리를 감겨주던것도 언니였다. 그러면서도 샴푸값 천원을 더 안받았다. 마음씨 참 착하다고 동네 아줌마들한테 칭찬도 자자했는데.
그 고운 마음씨 만큼 행복한 모습만 봤으면 참 좋았을텐데,
 
아기 낳고 한달 더 쉬고 싶었는데 신랑이 화내서 미용실 문열었단 말이 자꾸 맴돈다.
자기 수요일 하루 쉬는데 그날도 밀린 집안 일로 쉴새가 없다는 말도 생각난다.
언니의 남편은 변변히 하는 일이 없다는 동네 아줌마들 말도 생각이 난다.

언니를 기억하는 자리에서 '착취'나 '여성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언니를 처음알았던 시절에 나는 그런 단어를 알지 못했음으로. 언니와의 기억만으로 언니를 추억하고 싶다. 하지만 부정할수는 없다. 언니가 조금 더 행복하려면, (계몽 소설 같은 문구지만)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것. 적어도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많은 걸 바라는게 아니다.
착하고 순박했던 언니의 그 고운 마음만큼만, 딱 그만큼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바란다.
세상이 참 모질다. 비정하고 혹독하다. 그 '당연함'이 뭐 그리 '어려운가.
그게 너무 속이 상해서, 미용실 그 빈자리를 들여다 보는 내내 자꾸 눈물이 났다. 





곰 언니에게

20세기 소녀 2009. 10. 9. 17:33

언니, 저 어제 우연히 서랍을 뒤질일이 있었어요.
근데 우연히 딱 하나 고른 일기장이 그 겨울 일기장이지 뭐예요.

페이지 넘겨보는데 정말 3분의 1은 죄다 언니 이야기.
그 겨울 저의 최대 인생 화두는, 역시 언니와의 이별이었나봐요.
가을에는 언니가 사범대 애들한테 잘해줘서 질투난다, 동아리 동기가 언니한테 이쁨 받는다. 언니 있는거 알면서 일부러 인사 안했다 시시콜콜 툴툴대며 가을을 나더니, 결국 겨울엔 반성이 한가득이더라고요. 이럴줄 알았으면 언니 말 잘들을걸 속썩이지 말 걸 간부수련회 따라가서 사진도 많이 찍을걸. 이런저런 후회와 푸념이 가득한 일기였어요.

난 언니랑 헤어지는 마지막 데이트(데이트가 명칭이었는지, 스타와의 만남이 명칭이었는지 이젠 기억이 잘 안나네요)날을 기점으로 그 이박삼일 전부터 울어제낀 정말 별난, 이상한 후배였으니까. 그렇게 언니를 좋아하고 따랐으면서 좋아한다 내색 한번 제대로 안하고 관심 끌려고 인사 마저 안하는,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도 아니고 참 유치하죠? 근데 그게 바로 '저' 니까 별수 없죠 뭐.

언니, 전 작년겨울에서 올해 넘어가는 그 겨울이 신경숙 <외딴방>을 읽었거든요.
나 말이죠, 진짜 읽는 내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요.
그 두꺼운 한권 다 읽는데 정말 그렇게, 간절히 언니가 보고 싶을 수가 없었어요.  
내게 글재주가 있다면, 그 시절 곰언니게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나를 얼마나 변화하게 만들어준 사람인지, 내게 제일 처음으로 손꼽히는 인생 영웅은 왜 언니 하나 뿐인지, 구구절절 말할 수 있을텐데 말이에요. 에필로그는 '그리고, 그럼에도, 결국 변하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못된 후배인 나'로 씁쓸하게 완성해야 하지만 말이죠.

일기장엔 왜 이렇게 사람들과 다 헤어지며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새벽에 쓴게 분명한) 주사 비슷한 일기도 있었는데, 내가 이런 소리까지 했었나 하면서 소리내서 웃었어요. 푸하하 거리면서. 지금보다 5년이나 어렸으면서 이런 소리를 하다니. 아.. 쓰면서도 창피해요.


전 아직도 언니가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길 뜻한바대로 용기 있게 살아가길 기도해요.
정말 많이 챙피하고, 다시 언니 앞에 서지 못할 만큼 이기적인 후배지만
행여 다시 볼 수 있는 날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기 위해서.
그래도 조금씩이지만 열심히 살아요.
곰언니는 '언제까지라도' 결과가 아닌 과정의 나를 사랑해주고 인정해 줄 선배임을 아니까요.


마지막 덮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페이지에 나랑 동기인 수진이가 해준말을 적어 놨더라고요.
아 놔.. 너무 뻔해. 눈에 선한거 있죠. 나 이거 쓰면서도 미친여자처럼 펑펑 울면서 일기 썼을껄요.

"야 그래도 곰언니 가기전에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우리 승* 잘부탁해' 였어"

그리고 진짜 웃긴게, 고작 그 한줄 다시 읽고 말예요....
그 한마디가 너무 좋고 다시 봐도 너무 좋아서.
'흐윽' 외마디 터뜨리며 왈칵 눈물을 쏟을 만큼.

전 아직도 언니가 너무너무 좋아요.






연휴 시작 전, 그냥 자연스레 쭈꾸미들에게 연락을 했다.
언제나 만나면 의례 순서인듯, 기름진 치킨으로 위장을 감싸고, 사이다 탄산이 주는 날카로운 목넘김을 즐긴 우리는. 어디로 갈까 이대로 헤어질까 주저하기에 내가 광분하며 의견을 냈다.
 

"나! 방송 일 시작하고 서울을 벗어난 것이 5번이 채 안된다. 이 밤을 이따위로 보낼 수는 없는 일! 홍얼이 차를 타고 어디든 가지 않는다면 이대로 혀를 깨물것!"

광분하며 이야기했지만 택한 곳은 (고작, 고작, 고작!!!) 선유도 공원.
난 여길 마음 먹으면 자전거 타고도 온다고 애원했지만 씨알도 안먹히는 이야기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온 그네들은 너무나 피곤했던 것!!! 게다가 유턴 하나 헛질 않고 바른 운전을 하면서도 뒷차가 새치기하면 광분하는 홍얼이가 운전대를 잡고 있어서 장거리 드라이브는 무리였다.

한강 도착 전,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 아이템 펑크로 인해 흐느끼던 나를 위로해준 그들은.
선유도 공원 곳곳을 돌면서 이것저것 참견을 더했다. 명절에 집엔 내려가지 않고 낚시대 드리운 아저씨들이 월척 낚는 현장을 목격 하기도 하고, 대통령 닮은 쥐를 보고 소리 좀 질러주고, 뎡이 그림자를 향해 참치마요네즈 전주비빔 같은 삼각김밥 닉네임을 달아도 보고.
자리를 이동했으면 배가 불러도 뭔가 더 채워넣겠다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내가 집은 건 스트로베리 라떼. 딸기 우유에 비하면 영문으로 표기된 이름엔 뭔가 고급스러움이 있지 않을까, 심지어 가격도 1000원이 더 붙었는데 특이한 깊은 맛이 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뚜껑을 땄지만 예상 외 신맛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인 침을 넘겼다. 라떼란 단어는 왜 붙어 있는거냐. 우유 맛은 하나도 안나는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날이 좋다. 좋아서 참는다.

아이스크림 음료수 하나씩 집어든 우리는 한강을 보며 일렬로 앉아 있었다.
섭맨은 밴드는 연애와 같다고 푸념했고, 실연 아닌 실연의 아픔을 토로하는 그를 위로했다. 나는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돈도 많이 벌고 싶다고 그래서 연희동에 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3년으로 집어드는 연애에 고민인 지점이 몇개 있다 말하는 뎡이가 있었고, 추석날 근무하면 돈을 많이 준다고 좋아라 하는 실리적은 홍얼이가 있었다.(진심이냐 너는? 이라고 재차 물었지만 정말 신나하는 홍얼이 얼굴 앞에 우리 모두 무릎을 꿇었지) 자기 소개서 면접은 대체 어떻게 봐야하는 거야? 돌규가 물어봐도 방송과는 다른 그 판에 관해서 대답을 해줄 수 없어서 답답했다.
푸념섞인 근황을 전하는 우리 모두 꼭 1년 3개월 뒤면 서른이 되는데, 서른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절이란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할 조건도 만족할 여건도 아무것도 갖춘 것은 없다.

서른이 되면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그말로 인해 제일 불안한 것은 내 인생, 고작 요정도 행복이 최상 정점이면 어쩌지?


서른을 얼마 남기지 않은 우리는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 우린 꼭 얼굴을 봤다. 닥쳐오는 중간고사 시험공부한단 핑계로 교회에 모이기 시작한게 중학교 3학년. 그때부터였으니까 꼭 14년, 15번 째다. 반드시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대게는 모여 있었고, 약속은 아니었지만 그냥 지나치면 허전했다.  

'모이자' 해서 모인 우리들이 아니니까, '헤어지자.'라는 인사가 없이 헤어진다 해서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걸, 너무 잘 안다. 근데 그게 또 가끔은 쓸쓸해서 견딜 수 없다.



돌규는 여기 저기 우리들의 모습을 찍었다.
그냥 한강 밤바람이 너무 좋았고, 사진으로 남을 우리들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남겨주는 돌규의 카메라. 쌀쌀한 바람. 둥그래져 가는 가을 달. 우리가 나눈 담담한 이야기, 서로를 위한 소소한 위로까지.
모두, 찍을 수만 있다면, 원형 그대로, 그대로. 가슴 속 싶은 곳에 찍어두고 아무런 효과 보정 없이, 원판 그대로 담백하게 남겨서, 언제고 외롭고 쓸쓸한 날,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일 모레 추석 달을 보고 이걸 빌어야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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