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와 같이 만두와 내방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20년 째 내 인생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는 만두라 할지라도 모르는게 있다.
나는 고백을 하나 한다.

"우리 5학년 때, 너 박*이랑 정*람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던거 알아?"

"모르겠다 기억 안나"

"5학년 초반이라서 기억 안날지도 몰라. 여튼 개네들이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알고 봤더니 개네 둘이 이*실을 좋아하면서 그걸 밝히지 않기 위해서 날 좋아한다고 말했던거야. 그냥 시덥지 않은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트라우마가 됐던건 그 당시 내가 정우람을 좋아했기 때문이지. 푸하하."

"너 문*기는?"

"아놔 미쳐 미쳐! 너.. 다 기억하는구나. 너도 알잖아? 난 같은반 짝궁이면 무조건 좋아했던거. 문*기는 정*람 다음으로 짝이 됐었다고. 그때 정*람이랑 3년 째 같은 반이었는데 3년 째 짝이었어."

"아 지겨워. 그렇게 3년을 짝을 하고선 아직도 만나다니"

"여튼 난 그게 내 인생에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 결정적 사건이라고 생각해
'나를 좋아해줄 남자애는 없구나.'
나 같이 뚱뚱한 애를 좋아해줄 남자애는 없으니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다가 놓쳐버리는 것 만큼 또 추한게 없으니까 단념하고 살자
그때부터 내 자신을 규정지어 버린거 같아.
난 '뚱뚱한 애'라고 말이지.
근데 생각해 보면 그때 나 키 162에 58키로였어
비만의 정도가 아주 약한 통통 정도였다고."


"너 설마...."

"만약 누가 나의 비만의 책임을 묻는다면 난 16년 째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옆집옆집 앞집에서 내 친구로 살고 있는 정*람에게 이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싶다. 푸하하하"



나의 트라우마를 고백이 끝나자 만두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6학년 나와 반이 갈렸을 때 같은 반 여자아이들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고.
그게 그녀의 대외적 상냥함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고. 이젠 그 일이 아무렇지 않은데 자신은 어느새 그렇게 만들어져 버렸다고.



받았던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져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그 옛날 무수히 많은 기억속 한자락일 뿐이다.
하지만 그때 앓았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은 재료가 되고 성질이 되어 사람을 완성하고 인격체를 형성한다. 사건은 너무나 희미하게 바스라져 저 멀리 사라졌는데,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이 모습 이대로 놓여 오늘을, 내일을 만들어진 대로 살아가는 걸.

우리는 그 옛날 아팠던 기억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는데, 어른이 됐는데
이제는 바꿀 수 조차 없는 것들이 참, 아주 많다.


+) 덧붙이자면 나는 어째서 초등학교 5학년 9반의 아이들 따위와 아직도 만나고 있는가;;;
이*실, 정*람, 이*희, 박*희 그 옛날 94년도 연세대에서 할아버지놀이터 꾸러기 놀이터를 오가며 뛰놀던 아이들과 스물 여덟 넘어서까지 만나고 수다떨고 그 옛날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22년째 한동네 살고 있는 무시무시함을 또 다시 체험한다!
그리고, 지금 나를 본다면 10년이면 모든게 바뀐단 말은 다아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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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의미

20세기 소녀 2009. 9. 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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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어느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이 사진을 불쑥 내밀었다고 한다.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근근한 용돈 하나 있으실리 없는 두 양반이
어느날 말 한마디 없이 이제 갓 돌 지난 널 데리고
이 사진을 찍고 왔더라고.

사진 속에는 아직 머리털도 채 제대로 자라지 않은 나와
(이후 머리를 한번 빡빡 민 덕에 지금의 풍성한 머리칼을 자랑할 수 있게 됐다)
길고 험난한 노동의 증거로 쌔까맣게 그을린 노부부가
인생의 황혼, 삶의 결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덩치 좋은(?) 큰손주를 안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 사진을 본인 둘이 갖고 싶어서 찍었을까?
장남, 큰아들에게서 처음 본 손주의 한살배기 모습을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었을까?
남은 생 죽는 날까지 큰손주와 한 집에서 같이 살 게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데
그게 이유였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시간. 우리는 너랑 같이 있었노라.
둘 다 떠나고 난 뒤, 행여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이 사진을 보면서 기억하고 추억해 달라고.
그것이 이 사진의 이유가 아닐까.
덧 없이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얼마 안있으면 할머니의 기일이다.

잊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살아갈 수록 많은 것들이 밀려들고 또 밀려와서
자꾸 희미해져가고 흐릿해져가고 언젠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면 어떡하지?

할머니! 나를 그렇게나 사랑해주었는데 자꾸만 그렇게 되어 버려서
그래서 나는  그게 참 많이 미안해.



2년 6개월 전 내 인생 BGM은 자우림의 <샤이닝>이었다.
아이템 찾는 법을 몰랐고, 찾아도 취재하는 법을 몰랐고, 취재해도 뭐가 중요한지 몰랐고
매일 매일 까이는 인생이었다. 회의 때마다 혼나는 게 내 몫이고 내 담당인 그런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지'라고 수긍하겠지만 그 당시 그렇게 체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2007년 1월. 사회 초년생. 초짜배기 막내 작가는 밤 12시 다 될 무렵까지도 끊기지 않는 무시무시한 7611번 버스에 몸을 싣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지름길인 서강대교를 두고 마포대교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한강야경을 보며 울지 못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김윤아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곳'이 과연 있냐? 혹시 개뻥 아냐?
사회에서 돋힌 가시. 세상을 향해 독이란 독은 내뿜으며 의문했다.


2008년 2월. 내 BGM은 뮤지컬 '애니'의 <Tomorrow> 였다.
고모랑 사촌 동생과 보러간 뮤지컬 해피엔딩 부분에서 남모르게 삐져나오는 콧물을 들이마시기에 열중했다.

Tomorrow! Tomorrow! I love yah, tomorrow!
You're always a day away!
Tomorrow! Tomorrow! I love yah, tomorrow!
You're always a day away!

이제 더이상, 난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 걸. 기다려도 딱히 나아지지 못할 '내일'을 다 알아버렸는 걸. 그게 너무 통탄해서 울었다. 백수 때 내일을 기다리면서 마음껏 놀아볼 껄. 후회에 통탄에, 아쉬워서 울었다.


올해 BGM은 <BEN>이다.
마이클 잭슨이 떠났다고 선택하는 건 아니고, 누군가 추모하는 글에 올려 놨는데 가사를 읽었다. 듣자 마자 눈물을 왈칵 짜냈다.

They don’t see you as I do I wish they would try to
I’m sure they’d think again If they had a friend like Ben (A friend)
Like Ben


내 다른 모습이 있을거라고 나만은 세상과 다른 눈으로 널 봐주겠다고 말해줄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마이클 밖에 없다니. 이럴쑤능 없능일! 누구라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최루성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울부짖을 수 밖에 없을 꺼다.
울부 짖는 와중에, 그래도 참 다행이었다. 남들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는 분명 남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아이여서. 그걸 알아주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니까. (그게 마이클이라는 건 절대 아니고)


미국 흑인 노예제 시대 때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이 자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들을 고용했던 고용주들의 자살율이 더 높았다지.
고용인들에게 없는, 흑인들에겐 그들의 한을 토해낼 '노래'가 있었다. 내게도 나만의 노래가 있다. 지금 이 순간과 그때 그 순간을 버티게 해줄 수 있던 작은 위로가.

그냥 사는 곳곳마다 내 삶을 대신 말해줄 노래들이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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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얼굴에 감격으 눈물이라도 그려주고푸다!



+) 덧붙이면 2007년도 여름 무렵 노래방 18번은 교실이데아였다
'매일 아침 7시 30분 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 넣고 전국 900만에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 넣고 있어!
고 3때도 난 즐겁게 생활하는 나태한 아이였는데, 그런 내가 교실 이데아를 부르며 피를 토하다니 ㅠㅠ

그냥 그 땐 아침 9시 반 출근해서 11시 반에 퇴근하면서
50일에 하루 쉬는 회사가 싫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14시간 근무에 11시 반 퇴근해서 노래방 갈 여력이 있었다니 그 젊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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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예수전>이 집에 배달되어 온건 월요일이었다. 출판 되기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노란 책 표지를 넘기기 시작했을 땐 달 뜨도록 설레였다.

어릴 적 계몽사에서 나왔던 <성경이야기(전5권)>을 수십번 읽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예수님이 좋아요>를 시작으로 경건의 시간(성경 구절 읽고 묵상하는)을 가졌다. 구약은 레위기에서 막혔지만 신약은 완독 했다. 매주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드리기를 이십사년. 전부 다 안다 말할 수 없지만, 예수를, 그의 삶을 모른다고 부인한다면 (삼세번 부인한 베드로도 아니고) 그건 진짜 바보다.

 세상에 뿌려져 제 모든 것 바치고 썩어서 다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개똥'에 비견되던 선구자. (나 다니던 교회, 존경하던 목사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참 다행이다)

(한국)교회에 심사가 뒤틀린건 몇년 전이었다.
이단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죄와 죄가 아닌 것을 재단하고 칼 같이 자르면서 비판하는 교회에 진저리가 났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끊임 없이 관대한 그들이 우스웠다. 정작 분노해야할 것에 외면하는 그 모습이 참 싫었다. 그토록 세상 복을 추구하면서 내세의 복까지 기대하는 그들이 탐욕스럽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서로가 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봤을 땐, 그만 둘 때를 찾았구나 싶었다.  

그래도 24년 항상 의지했던 이름 예수. 한 때는 닮아가길 소망했고, (교회 수련회에서는 울면서) 부르짖기까지 했던 이름. 그의 이름으로 사는 자들이 싫다고 해서, 그의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겠다. 한장 한장 넘기면서 24년간 기억하고 있던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성전의 장사치들에게 화내듯 불의와 불평등에 분노하고 성 낼 줄 아는 원칙주의자. 허세와 허례허식에 찌든 바리새인에게 네 잘못을 말해주던 비판자. 슬프고 애통하던 자에게 천국 복을 약속하던 예언자.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춘 신(神), 신(神)의 모습을 닮은 사람.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많고, 그가 행한 많은 이적마다 너무나 다양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진정한 그를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분명한 것은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서 언제나 분명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슬픔과 애통함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말이다)

아직 16장 마지막까지 다 읽지는 못했다. 그래도 마지막엔 판단이 서겠지.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지,
하나의 밀알로 썩어가던 그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중요한지.

어쩌면 이미 나와 있는 답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 나는 이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예수전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김규항 (돌베개,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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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0세기 소녀 2009. 4. 2. 18:20



12년 전, 나는 서태웅과 닮은 점이 있었다.
고등학교의 선택의 간단명료함.'가까우니까'.

높고 높은 연북중학교에서 3년을 지내다 보면, 평지에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대부고 교문을 보면서 사랑과 운명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랑과 운명이 아니라 해도 어차피 연북중학교 애들은 이화여고 지망에서 떨어지면 '금란'아니면 '이대부고'로 갈 운명이었다. 과하게 운명을 거스르지 말자. 교복 치마를 입지 않아도 되는 그 학교를 선택하자. 커트머리였던 나는 머리 규정이 단발인건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을 적게 가는 것도 장애물이 아니었다. 나는 선지망에 서슴없이 '이대부고'를 적었다. 연북중학교 3학년 5반 담임과 9반 담임은 이대부고를 못쓰게 했단 소리가 돌았다. '거길 가면 대학을 못가요' 학부모를 설득하기 참 명쾌한 문장이었다. 같이 쓰기로 한 몇몇이 선지망에 학교 이름을 못적었단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화여고 떨어지면 다들 만날 것을 뭘. 

11년 전 3월 2일. 아스트라한 입학식 장면을 잊을수 없다. 칼구두 쫄바지.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달라 붙은 루카스와 이스트백가방 속에서 혼미함을 느꼈다. 그래도 애써 다니는 학교인데 폄하하지는 말자. 안그래도 똥통학교로 유명한데. 그게 내 모토였고 어느새 불평보다는 장점을 찾기 시작했다.  

한학년 6반 270명 작고 작은 학교는 단점도 많고 부조리도 많았다. 서울대 이름 아래 '1'이란 숫자 하나 못 집어 넣었지만, 모든 선생님들이 전교생 이름을 외워주는 우리학교가 좋았다. 좁아서 50m 달린다음 두배의 숫자를 100미터 기록으로 넣을 망정 매점에서 1분이면 꼭대기층 2학년 교실까지 올라갈 수 있는 작은 학교가 좋았다.
휠체어를 탄 학생도 3년 개근상을 받던 학교. 옆반과 우리반이 남아서 축구대회를 하고 이대골목에서 수십명이 단체로 떡볶기를 사먹을 수 있던 학교. 토요일 하루를 빼서 지각비로 떡을 해먹으며 장기자랑을 했던 학교.
애써 장점만 봤던 탓도 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학교였다.  

8년 전 금란과 통합으로 건물은 이전되고 기억 속 그곳은 중학교가 되었다. 전교생 14명 한학년 700여명이란 숫자도 늘었지만 소위 명문대 적어 넣는 숫자도 참 늘었다고 한다. 교복과 두발단속은 더더욱 심해지고 남녀간 교제도 엄격해지고 통제하지 못할 참 많은 것들을 구속하고 닫아 놓는단다. 그래도 대학보내는 숫자 하나로 '자랑'이 되고 '명문'이 된단다.
내가 그리워한 우리학교는 그런 곳이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그 시절을 기억하면
불완전하고 모자란 특이하다 못해 이상한 아이들이 가득했고, 다른 학교에서는 생각을 못할 상상을 넘나들 일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기억 속 나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복도, 교실, 교무실 곳곳에서. 언제나.

토요일 버스타고 지나치니 하얗게 칠해진 건물이 보였다. 다음날 오후 자전거 타고 이대 후문을 지나오다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서 한바퀴를 돌았다.

참 많은 일이 있었던 3년이었다. 그 시절 누구를 만나면 항상 그 때의 이야기를 할만큼. 다들 어디 있는지 때로는 궁금해서 못견딜 만큼. 그리고 언제라도 그 때 누구를 만나던 '그 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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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기억

20세기 소녀 2009. 3. 11. 15:48

프롤로그.

옆구리가 결린건 20일 정도부터였다. 정확하게 골반 아래 내장이 쑤셨다. 근육통 생긴듯이 욱씬거리는데 자는게 더 소중했다. 그냥 요즘 편히 잠을 못자서 그렇거니, 내가 요즘 변을 잘 못봐서 그러나 싶었다. 죽을 만큼 아픈건 아니니까 병원 가는걸 차일 피일 미뤘다.

월요일에 도저히 못참고 그냥 근처 내과로 향했다. 의사가 딱 잘라 진단했다.

1. 대상포진.
2. 배에 가스차고
3. 허리디스크가 골반으로 내려온다.

난 그말 믿고 지어준 약만 먹었을 뿐인데....

약봉지엔  타이레놀이 한알씩 들어 있었고 그 덕에 통증완화가 되어 나는 4일이란 시간 동안 병원을 찾지 않았다.
에라이 이 돌팔이 의사야! 아무래 내과라도 그렇지 내가 오른쪽 골반 아래 내장이 아프다고 말했냐? 안했냐?
4일 만에 고통을 못참고 찾은 병원에서는 맹장염 같다고 동네 외과를 찾으란다. 간신히 택시 타고 동네로 와보니 복막염으로 번진 것은 물론 맹장이 터진지는 일주일이 지났단다. 터지다 못해 아예 썩어 있단 판정까지 받았다.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을 찾지 않았냐며 냉대하던 의사의 싸늘한 눈을 잊을 수가 없다.


하나. '맹장 터진 나'
이렇게 맹장이 터지고 보니 그간 했던 많은 일에 수식어가 붙는다.

맹장 터진 채 새벽 출근해서 야근하고 퇴근하던 나.
맹장 터진 채 가스 뺀다고 허리 운동 하던 나
맹장 터진 채 6kg짜리 디스크 체어를 나르던 나
결국 나는 민감하고 예민하지 못한건 큰 죄라고 욕 먹고 있다.


둘. 같은 방 지연이

동신병원 327호실. 같은 방 쓰는 동기(?)는 열한살 먹은 꼬마 지연이. 게다가 우리는 연희초등학교 선후배 사이. 게다가 함께 구준표에 열광할 수 있는 소녀의 순정까지 둘 다 지니고 있었다.
이제 새학기 4학년에 올라가는 지연이는 교통사고 나서 학교 안가는게 신난다고 했다.

"지연아, 학교 안가니까 신나냐?"
"네"
"언니도 회사 안가서 신나.
"근데 지연아"
"네?"
"회사 안가는건 학교 안가는 것 보다 두배는 신나."

승부를 내겠다는 건 아니지만 여튼, 내가 이겼다.


셋. 떼어냄의 아픔
수술 하고 난 뒤 '새 내장'이 생겼다. 고무 호스로 연결된 그 주머니에는 나의 혈액이 들어 있으므로 내 신체의 일부로 여기기로 했다. (비록 하루에 한번 갈아내긴 하지만).
문제는 문병온 김형균과 유맹근이었다.
"내가 여기 입원해봐서 아는데 (김형균은 고1 때 급속히 자라는 키가 원인으로 기흉에 걸렸었다) 너, 이거 잡아 뺀다. 호스를 잡고 그냥 예고 없이 쑥 빼버려. 너 호스랑 연결 된 내장과 전체 부속품이 튀어나오는 고통을 느낄걸."

"뻥치시네."

냉소했지만 실은 무서웠다.
그러더니 김형균은 친절히 간호사를 붙잡고 자신이 주장하는 호스 떼는 법의 진위여부를 재확인 시켰다.
정말? 정말 그렇게 확 잡아 빼? 내장튀어나오면 어쩌라고? 배에 구멍 나듯이 잡아 빼는게 진짜냐고?!?!? 피는 안나? 내장이 같이 빠지면 어째!?!?!?

다음 날 온갖 겁을 집어먹고 외과로 내려가서 호스를 빼는데, 안아프다. 그냥 위장이 울컥하더니 무사히 제자리 찾는다.

그냥 호스 잡아빼던 의사가 웃었을 뿐이다. '신**씨, 이것도 안아파요?' 라며 껄껄.
정말 아프지 않았다. 그냥 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쉬움이 남을 뿐.


넷. 항생제의 공포

병원에서 제일 견딜 수 없었던건 링겔 뽑은 자리 비비는 바람에 혈관이 터진 것도 아니었고, 소변볼 때마다 엄습하던 내장을 쥐어짜는 고통도 아니었고, 3일 금식도 아니었다. 노란색 항생제의 공포!
슈동 놈들 여섯명 침대 근처에 옹기 종기 앉아 있는데 간호사 언니가 상냥하게 다가와 노란색 항생제를 투입하면 혈관을 따라 할퀴는 고통에 웃을 수가 없었다. 믿어줄지 모르지만 하이킥 보면서 웃는 그녀들 속에서 나는 정녕 고독을 느꼈다.

'인간은 모두 혼자인가?'
'개인의 고통은 오롯이 개인에게 주어질 수 밖에 없는가?'

아픈 사람은 '혼자' 아프니까, 외로울수 밖에 없고, 그래서 비뚤어지고 냉랭해지는 것 같다. 난 자주 안아파서 참 다행.


다섯. 병원에서 되찾은 꽃사슴
고등학교 때 난 산혜선을 좋아했다. 그녀의 천진난만함을 가장한 뼈 있는 말투. 따라 잡을 수 없는 찰나적인 재치. 연북중학교 시절에도 신혜선 못지 않게 내가 사랑한 애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연희동 꽃사슴 박*영이었다.
수술 끝난 다음 날 간신히 앉아서 책읽고 있는데 열린 병문 사이로 누군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치다 병실에 새겨진 '신**' 세글자에 '에이 설마'라고 생각했댄다. 근데 열린 문큼 사이로 너무 익숙하고 커다란 덩치가 앉아 있었댄다. 그게 바로 나.

'으왁 박*영!!!!!'
"엄마가 말하던 건너편 방 맹장터진지 일주일 지나 입원한 인간'이 너였냐?"

병원에서 벌써 유명해졌나 본데, 그게 니 중학교 동창 맞아. 그게 바로 나지.
대답은 필요 없었다.  

금식 중인 나를 위해 5가지 맛 자일리톨을 사다준 것도 그녀였고, 인디아책을 빌려준 것도 그녀였고, 어머니가 퇴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방문해 딸기를 사다 앵긴 것도 그녀였다.

나는 그녀를 연희동 아닌 서대문구 꽃사슴으로 부르기로 했다.
서대문구 꽃사슴! 받기만 해서 미안해. 너만 괜찮다면 언제든 너에게 떡볶기를 쏘게 해줘.


일곱. 무한도전의 잔학성

못 먹는 것 보다 더 한 고통은 웃을 수 없는 고통이다. 수술한지 하루 밖에 안된 배를 붙잡고 무한도전을 보는건 빨갛게 달궈진 쇠철판 위를 맨발로 걷는 것과 비슷한 강도의 고통이었다.
자막 하나하나 왜 그리 웃기던지. 입술을 깨물다 못해 '푸!'하고 침을 분무기처럼 뿜어 대기를 두번. 결국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근데 들리는 음향만으로도 웃길건 또 뭐람.

무한도전, 무시무시한 프로그램이다. 맹장수술한 환자는 보지 말라고 경고해달라.


여덟, 고마운 사람들
엄마. 너무 수고 많았고 수발드느라 욕봤어. 하지만 병원에서 하룻밤도 잠 안잔건 평생 기억할꺼야. ㅋㅋ
영진아. 이틀이나 병원서 자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의사가 진찰하러 왔을 땐 좀 일어나 앉지 그랬니? 의사가 널 냉대한건 아니야. 너같이 자느라 아침이 오는 줄 모르는 보호자도 대다수라고.
아빠. 아빤 나 수술하는 날 잠시 있다 갔지? 그리고 아무리 기억하려해도 기억에.... 없더라 ㅋㅋㅋㅋ
빡세, 윤호오라버니. 와주셔서 감사. 내가 제일 아플 때 와서 정말 제대로 대접도 못했네. 비록 내가 먹지는 못했지만 내 대신 식구들이 딸기 잘 먹었대.
지은언니. 먼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구요. 이렇게 챙겨줘서 고마워요. 전 언제부터 마실 모임에 나갈 수 있을까요?  ㅋㅋ
선화. 과자 맛있는 것만 골라 사와서 또 다른 고통이었다구. 우리 조만간 만나. 인자기 관해서 할말이 많아. 귀여워 미치겠다고.
은실. 오랜만에 얼굴봐서 좋구나. 비행 다니는 친구는 중간 중간 휴일이 있어서 참 좋아. 다음에 그분과 함께 보경이도 함께 봐. 나는 널 괴롭힐테야.
오줌싸개. 노고산 함께가자. 언니 이제 쇠도 씹어 먹어. 니가 사온 떡볶기 맛있었어. 날 '아내의 유혹'의 세계에 빠트리다니.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짓이야!!! ㅋㅋ
뒷걸음질. 먼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 학교 수업 마치고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우린 멀리 떨어져 살아서 만나려면 참 먼길 와야하네. 다음엔 내가 동네로 갈께. 맛있는거 먹자. 과일통조림 잘 맛있더라.
뚱토. 비오는 날 오느라 수고 했구나. 밥을 많이 먹어서 네 떡볶기를 반기지 못했어. 마음에 담아두지 마 ㅋㅋ
선주. 화환 대신 보낸 쇼콜라 케잌은 평생 잊지 못할껴. 맛있는건 둘째치고 덕분에 빠진살 다시 쪘어. 가끔 경민이 뿡뿡이가 되줄테니 꾹참게나.
27기들. 유맹근이가 사온 던킨도너츠를 열심히 비우던 홍얼을 잊지 못하겠다. 미식거리고 아플때 와서 많이 반겨주지도 못했구려.
미디어 ** 팀원들. 그저 죄송할 뿐. 미련한게 죄지, 저 없는 새 제 일처리하러 분주했을 팀사람들 생각하면 그냥 민망할 따름이예요.
유맹근&김*균. 니들이 내게 준 호스의 공포는 무사히 이겼다. 곧 맥주 함께해. 그나저나 뒷침대에 이쁜 여대생 있는건 언제 봤니?
나의사랑우리슈동. 하루 빼고 나타나준 쩡아, 벨기에 다녀온 이후 매일 와준 만두. 최소 2번 이상의 출석률을 보여준 전 멤버들! 수고 많았어. 때때로 아프고 피곤할 때 냉대해서 미안해. 작은 서랍속에 넣어 두는건 좋은데 너무 자주 열지는 말자. 너네 없으면 그 긴시간 어떻게 버텼겠니? 다양한 방문과 함께 하던 티비시청... 덕분에 잊지 못할 입원기간이었어.


아홉. 읽은 책들.

책 읽으려면 지금이 기회인거 같아서 사뒀다 못읽은 책들, 얻어 와서 안 읽은 책들 해치웠다. <다섯째 아이><인디아><내 친구 엘링을 소개합니다><자기만의 방><안개><3기니><앗 뜨거워 HEAT!>
런던 스케치는 아직 읽다 말았네. 만화도 열심히 다시 봤는데 다시 읽은 쿨핫은 아직까지 정말 대단한 만화다. 얼마전에 구입한 석정연 만화책도 다시 읽었다. 열왕대전기랑 잔혹한신이 지배한다는 정말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 충분히 괴로워지는 찐한 다크 초코 같은 만화로구나. 다시 되새김질!


열. 안녕 병원.
회사 복귀 하고 나니까 언제 병원에 있었는지 꿈같이 느껴진다. 현실감도 없고 내가 그렇게 긴 시간 있었는지 실감도 안나고. 병원에서의 하루하루는 비슷하고 똑같이 닮아 있었기 때문에 9일동안의 기억이 하루라 해도 보냈다해도 믿겠다.그냥 병원의 기억은 영역 지정해서 잘라내고 다시 출근하는 아침부터의 기억을 'ctrl+E'해서 붙여 넣은 것 같다.

꿈같은 휴식을 마치고 나는 다시 제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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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깊이

20세기 소녀 2009. 2. 22. 13:23


내가 결코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근데 어느 새 십수년을 넘게 만나온 사람들이 참 많다. 만두나 김도도 영*이 같은경우는 심지어.. 20년을 채워간다. (한 동네에 22년째 사는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만나온 햇수가 결코 사이의 깊이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깊게 십수년을 만나온 사이라도 '현재의 나'를 알지 못한다면 그 순간만큼은 소용 없는 거니까.


생각해 보면 난 집중력이 떨어지는 애였다. '단짝친구'는 좀 불편했다. 심지어 또래 아이들이 만드는 그룹도 2-3개씩 여러개에 걸쳐 있었으니까.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에 깊이를 더하는걸 몹시 겁냈던 걸까? 너무 깊은 몰입에 항상 질려하고 쉽게 지쳐한 것 같다.


남자애들한테는 정을 덜 주려는 중이다. 동네 중학교 동창놈들, 고등학교 남자애들이나 교회놈들. 이런 얘들 결혼하고 나면 언제까지 만날 수 있을까? 주*이 같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부류를 제외하고 나면 참 몇 안된다 싶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면 사람과의 관계도 참 부질없단 생각이 들어서 쓸쓸해진다. 동성과 이성을 구분 짓는 건 별로지만, 결혼하고 나서도 만날 수 있는 '이성친구'와의 관계란 건 참 한정적이구나 싶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선을 긋는 경우도 있고, 선을 긋고 계산하는 내 자신을 보면 우울하기도 하고.


28년간 관계의 깊이는 재보지 않고 부질 없이 넓혀 왔던 것 같다. 소모된 시간이 아까운게 아니라, 그 깊이 없음이 안타깝다. 내면에 추잡하고 쪼잔한 내 심정까지 다 드러내 보인 상대가 있었나? 손에 꼽으면 참 몇 안돼서 서럽다.


그냥 어제 술마시고 집으로 오는데 자꾸 한숨이 나왔다. (언덕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뜻밖에 횡재

20세기 소녀 2009. 2. 19. 10:06

어제 도서폐여점 만화책을 파는 곳에서 평생 구할수 없을거라 여겼던 얌생이를 구했다. 김정은 단편집 what's up과 한혜연 단편집 <어느 특별한 하루>랑 이향우 <우주인>까지.

 아 정말 얌생이는 새걸로 사고 싶었는데 ㅠ_ㅠ
아니 헌책이라 해도 원가에 3배까지 살 의향이 있는 만화책이었는데 800원에 팔고 있는걸 보면 나도 모르게 눈밀이;;;

어릴적부터 잡지(윙크)로 만화책을 보다 보니, 한국만화는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구입하지 않은 것들이 꽤 된다. 덕분에 잡지를 죄다 창고에 넣어 놓은 지금 다시 그 만화가 보고 싶어서 미칠지경인데 말이지....

좀 더 부지런하면 리뷰도 열심히 올리고 할텐데, 여의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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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자꾸 눈이 간다.

2년전에 사서 2년 약정도 다 못채운 애니콜 SPH-V9900!!

고작 200만 화소인 주제이 로모같은 효과를 내면서 사진이 찍혔고
불필요한 기능도 없이 쌈빡하게 깔끔했다. 가로로 더 긴 화면이 마음에든건 두말할 나위 없었고.
가끔 부러질까 두려웠던 것만 빼면 12만원을 주더라도 고쳐써볼까 몇번이나 다시 생각했던 폰이었다. 그 폰에 연결되어 있던 011-295-5*55 란 번호도 참 마음에 들었고 말이지.

여튼 그 핸드폰에 너무나 애착이 남아서인지, 새로 장만한 핸드폰이 4개월이 지나가는데도 정이 안간다. 안 이쁘다 안이쁘다 말한게 입에 붙어서 그런지 얼마 전에 잃어버릴 뻔했다. 근데 막상 찾고 싶은 생각이 안들어서 스스로 당황했다. 아직 할부금이 20개월 남짓 남은 주제에 정신차리라고 생각하고 애써 핸드폰을 찾으러 돌아다녔지.

그리고 지금 가장 안타까운게 있다면 카드지갑이다. 이대부고 전에 홍대 쇼핑때 이쁘다 이쁘다 말했던 걸 이대부고 여꼴통 애들이 눈여겨 봐줬다가 대학졸업선물로 준거다. 겉감은 남색천에 고양이가 마킹돼 있고 안에는 빨간색에 흰줄이 가 있는 퀼트천이 덧대여 있다. 고양이 얼굴이 닳고 끈이 끊겨나가도 어찌나 이쁜지. 근데 안에 껴 있는 비닐이 다 조각조각 나는 바람에 사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해져 있다.

물건이란거 집착인거 다 알고 버리고 나면 그만일 뿐인데, 이렇게 자잘한 마음조차 버리지 못하는 나는-

요즘 우울한걸까? 아니면, 그냥 애 자체가 소심해져 가는걸까.
미련일까 집착일까.



 

내 눈물은 참 값싸다.
조금만 흥분하거나 조금만 자극시키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눈물. 서눈물의 눈물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여튼 흔하고 값싸다. 그래서 후지다.

수 많은 이별 장면마다 나는 여지 없이 울었고, 그래서 내가 전하고 싶은 순간을 참 많이 망치고 간직해야할 것도 꽤 놓쳤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건 어쩔수 없다. 나는 눈물 미리 짜놓고 살 수 없으니 체념하고 순응하며 살수 밖에.

기억나는 이별장면이 뭐가 있더라? 곰언니 학교에서 떠나기로 하고 나랑 마지막 데이트 하던 날. 언니에게 마지막 편지 쓰면서 부터 울기 시작해서 데이트 날 당일 중간 중간 울고 집에 돌아오는 서대문우체국 길가에서부터 집에 도착하는 내내 울었고 눈이 붓다 못해 붙도록 울었고. 덕분에 그날 밤 우리 아빤 내가 실연한줄 알았었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왠일로 안우는가 싶었다. 그건 몰라서 안운거였지, 눈물이 나서 안운게 아니었다. 대학교 입학하고 첫 스승의 날이 었다. 고등학교로 찾아간 나는 1학년 때 담임 책상위에서 목을 놓아 대성통곡. 쪽팔리다 못해 두고두고 전해지는 신** 진상 사건에 꼽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그제도 울었고, 어제는 아침 7시에 눈떠서 울었고, 또 다시 사무실에서 울었고 지금도 때때로 울컥한다.
1년 3개월 일한 팀을 떠난다. 직장생활같지 않게 좋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빠트림 없이 존경할 수 있던 '어른'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나는 필요한 사람이다.'를 느낄 수 있었던 몇번의 순간. 얼마나 짜릿하고 행복했는지. 이토록 좋아하는 프로그램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너무 큰 행운이었다. 분에 넘치는 복이고 기쁨이었다.

70년대 서울 냄새 나는 외딴 연구동. 테잎들고 자막들고 가며 아그작 아그작 밟아대던 은행구린내. 쓰레빠 질질 끌고 책을 한짐 이고 가던 폐품냄새 가득한 주차장 길.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찾아들면 '치아키 센빠이'가 연주하듯 크레센도 크레센도. 아찔하게 울어대던 여름 매미 가로수 길.

쉬는 날도 공휴일도 빈적 없는 차장님 의자. 역사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우리방 책장. 옆방 건너건물 친구들, 동기들. 나의 온갖 푸념을 들어주던 동생 지연씨. 이런저런 고민을 들어주던 작가선배님들. 여의도로 찾아온 오군이랑 임지랑 노닥거리던 값싼 KBS 로비. 매뉴퓰레이터 촬영 가면 언제나 먹을걸 한움큰 쥐어주시던 특촬실의 감독님. 얼굴도장 찍을 만큼 찍었다고 사원증 없이 책 빌려주던 도서관 사람들. 역사프로에 정말 잘 어울리는 한상권 아나운서. 언제나 유쾌했던 종편실 은실언니랑 김영호 감독님까지.

잊고 싶지 않은게 참 많고, 놓고 싶지도 않았는데

다시 돌아와 좀 더 오래 머무르기 위한 '양보'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인내하기로 했다. 헤어지는게 아쉬워도 조금만 참고 더 오래도록 함께 일할 수 있는 길을 선택 하겠다.

그래서 주문을 외운다
돌아온다. 나는 돌아온다. 꼭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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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윤영이라는 친구가 있다. 우리집과 윤영이네. 두 집은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윤영이네도 딸딸아들 셋이었고, 우리집도 딸딸아들 셋이고. 윤영이와 나는 동갑이고, 윤영이네 막내 윤혁이와 우리 승용이가 동갑이고 그랬다. 두 집안은 모두 연희 교회를 다녔고, 초등학교 입학 전 같은 피아노 학원에서 얼굴을 트고, 초등학교 중학교 같은 교회 같은 성가대를 하면서 친구로 지냈었다.(이젠 별 교류가 없는 사이가 돼버렸으니 과거형이 어울리겠다.) 승용이는 윤혁이와 베스트를 먹기까지 한 사이였다. 그런 윤영이네와 우리네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할머니였다.

맞벌이하는 가정이었던 윤영이네와 엄마가 아빠랑 같이 남대문에서 장사하던 우리집. 우리집에도 언제나 할머니가 있었고, 어릴적 놀러갔던 윤영이네도 언제나 할머니가 계셨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승용이와 윤혁이 중, 먼저 입대한 건 윤혁이었다. 그러다가 얼마전 윤영이네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군에 보낸 손주에게 편지가 너무 쓰고 싶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편지에는 단 일곱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삐뚤빼뚤 제대로 쓰지 못하는 글씨로 딱 일곱자.

'윤혁아, 보고싶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우리 할머니만큼 나에게 무한한 축복과 애정을 쏟아줄 사람은 다시 없을 거라는 것. 부모와 자식은 애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불가결한 일이라면 할머니와 손주 관계는 조금 더 선택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선택엔 내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를 할아버지 옆에 묻어드리고 돌아온 날, 가장 먼저 맞닥드린 건 상실감이었다. 세상 속에서 이만큼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겠구나. 이제 다시 찾을 수 없을 애정에 대한 박탈감. 그래서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미친년처럼 눈물 콧물 쏟고 또 쏟고 세상 떠나가라 엉엉 울었다.

나 하나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을 애정일지라도, 크고 크게 쏟아 부으며 사랑해 줄. 우리 할머니는 이제 내곁에 없다. 그게 너무 슬프고 서러워서, 그 불쌍한 사람이 우리 할머니어서 울었다. 혼자 남은 내가 너무 안쓰러워 울었다. 


학교 다녀오겠다 밖에 나갔다 오겠다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 건네며  할머니 방문을 나서면 항상 한결 같았던 우리 할머니. 

'조심히 댕겨와'

그게 얼마나 큰 애정이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인지.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을 외롭고 섧은 사랑인지 몰랐던 건 아니지만.

전할 수만 있다면, 윤혁이네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편지를 쓴 것처럼, 꼭 그 크기만큼의 정성을 바쳐서

나도. 나도, 나도 우리 할머니한테 편지를 쓰고 싶다.  

'할머니, 보고 싶다!'



우리동네

20세기 소녀 2008. 8. 12. 16:32

연희동

나는 연희동에서 자랄 수 있었음을, 아직도 살고 있음을 감사한다. 여섯살 겨울. 둘째 고모부의 차를 타고 건너 온 이 동네에서 스무해하고도 일년을 보냈다.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고층건물. 천편일률적으로 생겨 먹은 아파트 단지. 호화롭지만 갑갑하고 복잡한 주상복합 아파트들과는 달리, 단층 혹은 이층 건물로 이루어진 이 동네에서는 아직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하늘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전'모씨와 '노'모씨는 죽음으로 역사에 사죄해야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존해 있기에, 연희동이 '재개발지구'의 혜택을 입지 않는 건, 진정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변화만을 선택하는 이 사회는 숨이 막힌다. 넌더리가 난다. 언제나 '개발'이라는 글자 아래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허용하고 묵인하고 침묵하는 <서울>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두렵운 곳인가. 그런 서울에 살고 있음에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것과 관련없는 동네였기에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

그래서 내겐 연희동이 그렇다. 누구에겐 숭례문이 그랬다지만, '연희동'은 언제나 내게 고정된 상수였고, 내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천만이나 된다. 서울은 '내 고향'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겠지. 그래서 고향을 꼽자면, 스무해 하고도 일년. 느리게 변하고 변한듯 변하지 않는 '연희동'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돌아가고 싶고, 되찾고 싶을 '연희동'이. 앞으로도 살고 싶고, 다른 곳에서 산다 생각하면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 이 동네가 '진짜 내 고향'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뚱토 생파로 다모토리에 갔다.
삼겹살집에서부터 얼근했던 우리는 아는 노래마다 죄따라부르고, 두들겨지지도 않는 테이블을 두들기고, 어깨춤추면서 '처먹어'를 남발했다. 옆테이블 아저씨는 흥을 못이겨 걸어 나와 춤을 추었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나오더라.
이대부고에는 '한올'이라는 중창단이 있었다.
한올은 써클이 없이 특별활동만을 시키던, 교내 유일한 동아리였고, 졸업한 선배와 완전 후배를 연결시키며 많은 커플을 탄생시킨 동아리였다.

우리반에는 서은선이랑 최보윤이 한올이었는데,
당시 곡을 연습한다고 매일 워크맨을 들고 와서 쉬는 시간마다 노래를 듣곤 했다.

서은선에게 워크맨을 빌려서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을 들었던 쉬는 시간. 평소 같이 날뛰며 놀던 우리반 애들의 모습에 왜 울컥하고 치미는게 있었을까. 귀에 꽂고, 들리는 가사마다 맺히는 애들의 모습이 뭐 특별하다고, 앞으로 그리울꺼라고 생각했을까.

그래도 그뒤로 항상 이 모양이다.

천땡과 수다 떨던 서미연, 교실 구석에 앉아 있는 최보윤이랑 서은선 김효지. 왕웃긴 신혜선과 오혜미 두지연 엄기나. 앞쪽에 앉아 있던 감혜선. 욕 잘하는 장소라. 신지은. 최정은. 문환희. 너무 쉽게 게임에 인생을 걸었던 김동환 덩달아 놀았던 유광희 백인용 하숙집 아들이었던 김종민도 있었고 조뚱도 있고. 별명이 개코원숭이였던 박현숙 턱에 관한 별명이 있었던 이하윤. 이하윤과 사귀던 부반장. 부반장의 친구였던 김정제. 김정제와 사귀었던 최혜진. 음치였던 감데스와 정석현 유재관 조규자... 에어콘 구석 침을 뱉으며 놀던 오빠들까지. 가사속에 새겨 놓은 듯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어김없이 1998년 가을 이대부고 교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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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곡으로는 조하문의 '눈오는밤'이 나왔는데,

나는 당시 다니던 교회에 '오빠'가 있었고, 뚱토는 이대부고 3학년에 '오빠'가 있었고, 이지희는 같은반 옆분단에 '오빠'가 있었다. 그리고 이대부고엔 공식적인 오빠들이 있었다.

'그 시절에 오빠들은 어디에서 무얼할까. 우리들의 얘기할까.'

할리가 없다. 1%의 가능성 조차 없다.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


한참을 웃었다.  



변해가네

20세기 소녀 2008. 2. 27. 16:30


나 학교 있을 적, 나이 든 교수님은 눈썹이 더 세어졌다.
오래간만에 한 악수가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여전한 것들도 놓치지 않았다.

"신**는 하나도 안변했어. 그래야지. 참 보기 좋다."

그 말이 참 좋기는 한데, 그건 사실이 아니어서 참 슬펐다.

학교 언덕길 경사는 여전했지만, 마을 버스 대신 시내버스가 오고고, 눈오면 정말 예뻤던 이쁜이 나무 자리는 그대로지만, 버스 정류장 차양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옛 대학의 느낌이 나서 너무나 좋아했던 인사대 건물은 여전히 춥고 습기찼고, 전공강의실에는 이상한 연구소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 과는 '신자유시대'에 걸맞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대학을 학문의 터전이라고 부르지만, 돈이 안된다는 것만큼 힘 없는 건 없었고, 그건 곧 변화에 이유였다. 도태될 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길 바랬는데. 꼭 바라는 만큼 변하고 바뀐거 같았다.

이제 2년 남았다고 말하는 교수님은 편안해 보였다. 나 학교 다닐 적엔 욕심도 많고 고집도 있었는데. 그 사이 세월에 모든 것을 다 놓는 법을 배우신 것 같았다. 그 낯선 모습에 속이 상했다.

'교수님은 제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세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러진 않았다. 대신 가슴에 꾹꾹 담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에 문득 궁금해졌다. 뭐라고 대답하셨을까.

사람이 변하는 건지, 원래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그저 변해가는 세월에 맞춰가는 건지. 근데 그건 이미 본질이 아니라 변질된 것이 아닌건지. 아니 어쩜 세상에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 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세상은 아직 어렵기만하다.


"교수님. 저요, 변하긴 했는데, 많이 변하진 않았어요."

교수님이 뭐라고 답해주셨건,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할머니

20세기 소녀 2006. 8. 24. 15:57

. 손 작은 건 우리 할머니를 닮았어.
발 작은 것도 우리 할머니를 닮았지
.
코 못생긴거랑 뚱뚱한거 살 단단한거

얼굴 똥그란거 조급하고 성질 급한거.

승부욕 강해서 지고는 못사는 거.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까정 할머니를 닮았어.
안 닮은게 하나 없이 우리 할머닐 꼭 닮았어
.

그 옛날 밥 차리기 귀찮다고 할머니랑

고추장에 밥비벼 먹던 가리봉동 집.
나 옆집 놀러가 있는데 우리 집서

승*야 승*야 할머니가 귀청 떨어지도록 소리 지르면
놀다 말고 입이 나발 나와서 집에 가야했던 거.
기지배가 기지배가 이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내가 기지배면 할머니도 기지배야 라고 했다가

빗자루로 두둘겨 맞은거.
뭐 하나 사와서 얼마냐고 할머니가 물어보면

뭐가 그렇게 비싸냐고 핀잔주니까

항상 반값도 안되는 가격 말해야 했던거
연예인들 야하게 옷 입고 나와서 춤추면
티비 보다말고
 지랄하네 하고 할머니가 욕하던 거.
요 몇 달 우리 할머니 같지 않게 너무너무 마르고 기력도 없어서
,
할머니 더 드실려 물어보는건 대답도 안하면서
,
할머니 나 누구야 하면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승희!'하고 이 이름은 꼭 불러주던 거.

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머니 없이 살아본 적이 없어서.
기억나는
 것도 참 많고 기억하면서 살고 싶은거 투성이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아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서 그게 참 슬퍼.
그게 서러워서 눈물 나고 막 그래
.

할머니
.
나 할머니한테 꼭 한번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물어볼 기회가 너무너무 많아도 물어보질 못했어.

이거 물어 보다 말고 막 목소리 떨리다가

펑펑 울어 버릴까봐 차마 물어 보질 못했어.

달덩이 같은 할머니새끼 우는 거 보면

더 속상 할까봐 일부러 묻질 않았어.

그리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꺼 같아서 그랬어.

 

 

할머니.
그 옛날 우리 고모들이 호박댕이 호박댕이

나 못생겼다 그렇게 놀려도
그 드센 고모들 다 후려치면서

조선 최고 부잣집 맏며느리로 시집갈꺼라고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로 말했어?

머리털도 제대로 안나서 꾸역 꾸역 주는 우유만 받아 먹던

달덩이 같은 손주가
뭐가 그렇게 예뻐서,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안바꾼다 안바꾼다 세상 다 줘도 안 바꾼다고 했어?



이 못생긴 내가 뭐 그리 예뻤냐고,

아직도 그렇게 이쁘냐고 물어 볼 수도 있었지만
나 아직도 할머니한텐 너무너무 이쁜 손주인거

말 안해도 알아서 일부러 안물어봤어.

묻지 않아도 너무 잘 알아서 안물어봤어.

 

그러니까 할머니.

거기서 더 행복하게 더 재미나게 살어.

우리 할머니한테 최고 이쁜 달덩이 같은 손주도 여기서 잘 살께.

할머니 말처럼 세상 복 다 누리면서 살께.

 

할머니. 그리고 나도 말야.

나도 우리 할머니 세상 다 준다 다 준다 해도 안 바꿔.

그 누구랑도 안 바꿔.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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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그대 나를 위해 웃음을 보여도
허탈한 표정 감출순 없어
힘 없이 뒤돌아선 그대의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만 보네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이것이 마지막 이라는 것을
서로가 원한다해도 영원할수는 없어요
저 흘러가는 시간앞에서는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말고 기억해줘요




고등학교 졸업식 내내 이 노래가 생각났다.
소란하고 소란하던 교실, 다른반 친구들이 기웃대던 복도, 선생님들이 계셨던 교무실, 고등학교 졸업하던 그날 나는 속으로 이 노래를 100번정도 다시 부르기를 하면서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머리속에 기억하겠노라 다짐하고 그러다가 실은 아무도 못볼때 눈물나는걸 주먹으로 훔치곤 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우리 스무살때

언젠가 비오던 날 이 거리는 술잔에 흔들렸고
떠나는 그대는 바람이었어라 바람이었어라
나는 보았네 그대 두눈에 가득 고인 눈물
할말도 못한 채 돌아서야했던 바보같던 시절
사랑하나 못하면서 사랑을 앓던 시절
손뼉을 치면 닿을 것 같은 스무살 시절의 추억
먼훗날 그대 이름조차도 잊혀질지라도
어딘가 남아있을 듯한 그때 우리 모습들




인사를 나누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
함께 웃을수 있었던 동기들,
마냥 좋아했던 선배들,
정말 소중하고 예뻤던 후배들,
인사하고 작별을 고하는 틈새 틈새 고이 고이 이 노래를 끼워 넣었다.


어느새 학교에서 떠나버린 선배들의 모습들,
새내기 시절 깔깔대던 내 웃음,
온힘을 다해 춤을 추며 들어올린 팔뚝질,
그 언덕 오르내리며 나누었던 인사들,
쩌렁쩌렁 온학교에 불러대던 친구들의 이름들,
해볼 수 있을꺼라는 의기양양했던 행복들,
나의 모자람에 괴로움에 막 훔쳐대던 슬픔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거라 감싸쥐던 좌절,
기억하고 기억하자고 되뇌이던 장면들,

그 모습.
내 4년,
어디로 가버렸을까?


지켜봤던 지난 졸업식 때마다
어우러져 아련하게 사라져버린 선배들의 모습처럼,
나는 이 곳을,
나는 이 곳에서,
그리고 이 곳을,

지난 4년,
무척이나 가득 채워 좋아하고
온 힘껏 미워할 수 있었던 상명
'우리 스무살때'를 노래하다.



-이공공오 공이 이삼
속상함에 메어오는 기억들에 정신 없었던 날
우리스무살때를 노래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