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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3 10년 만의 만남-아들, 나를 일깨웠다네~ 4


꼭 10년 전 같은 반에서 '아들'이라고 부르던, 그네에게 '아빠'라고 불리던 내가
길고긴 공백기를 뒤로하고 해우하게 된 것은 며칠 전.
11일 연속출근과 근무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던 수요일.
밤을 새서 촬구를 써야하는 압박감 속에서 였다.

10년 전 내 아들이었던 그녀는 여성이 되었고, 한 남자의 부인이 되었고, 우리 사무실 옆 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렸고,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극적인 만남을 동네에서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쓰레빠 질질 끌고 아무렇지 않게.

근 십년만에 만난 친구가 묻더라.
"어떻게 2년 반이나 '막내' 일을. 방송작가 막내 일을 할 수 있냐고 난 5개월도 지옥같았는데 넌 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냐"

아들. 난 원래 어이 없는데서 잘 버텨.
맹장이 터졌음에도 일주일간 야근을 밥먹듯 했고 진통제 먹으면서 아무생각 없이 버텼던게 나야. 그게 바로 나지. '오 효과 좀 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터진 맹장 썩어가는데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겼었지. 참말 난 몰랐거든. 좀 아픈데 곧 낫겠지 스스로를 대단하다 넌 정말 성실한 애야. 칭찬했었지. 그 칭찬 하다 복막염으로 죽을 뻔했지만 말야...

아! 잘버틴 얘기는 또 하나 있어. 유럽여행 때는 프라하 전기나간 낡은 아파트에서도 잘도 하루를 버텼었지. 비오는 밤 중세도시 프라하가 얼마나 무서운지. 하얗고 창백한 피부에 붉은 머리털을 가지고 있는 서양 남자 귀신이 안 나오는게 더 이상했던 거미줄 쳐지고 전기 안들어오는 아파트에서 만 하루를 버티고 난 아침. 난 그날 묵었던 숙소에서 오늘 묵을 예정이라는 한국인 3명을 만났어. 난 불 안들어오고 낡아서 밤에 귀신이 덮칠 것 같이 무섭다고 미리 언질 좀 해줬지. 그리고 며칠 후 그네들을 오스트라이 빈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들은 그 밤 내내 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더군. 남자 둘에 여자 하나 우리 셋도 이렇게 무서운데 그 여자애는 혼자서 무슨 깡다구로 여기서 버텼냐며.
그냥 그날 밤 어둠속에서 서양귀신을 퇴치하기 위해서 찬송가 좀 중얼대며 잠을 잤을 뿐인데...

 
친구가 말했다.
"내가 방송일에서 인생의 멘토를 만나지 못한건 참 행운이야. 확실히 이 길을 접어야겠다고 결정을 내려줬거든"

아! 그러고 보니 그게 문제였구나. 난 인생의 멘토를 좀 만났어. 저렇게 쑥쑥 자라고 싶다. 저런 작가가 되고 싶다. 저 피디와 일하고 싶다. 이 3D업계에 열악한 노동환경에 근무조건에 치떨고 손 털고 딴 길 찾으면 그만인데, 내가 이루고 싶은 자잘한 꿈이 주렁주렁 열린게 문제였어. 그리고 중간 중간 불평 불만을 한껏 들어줄 친구도 참 많이 만났지. 그리고.
그게... 그게 문제였던거군. 그게 문제였구나. 인생의 멘토 따위 되고 싶은 롤모델 따위 안 만나고 없었던 게 내 인생에 백만번은 더 도움이 되었을텐데 말이지.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토나오도록 바쁜데 넌 어떻게 그 많은 애들을 만나고 있니?"

아들. 난 원래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참 잘해. 고등학교 땐 학교 임원을 하면서 학원을 다니고 그 중에 교회 고등부 행사의 핵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고. 대학교 3학년 때 동아리 학생회 과학생회 학회 내가 뛴 행사가 몇 개 인줄 알려줄까?
근데 포인트는 내가 행사 뛰는데 있는게 아냐. 그 와중에 친구들을 맨날 만나고 있었다는데 있지. 난 노는데는 못빠져. 나 빼고 노는 것만 생각하면 내 영혼은 가위 눌린 것 같이 어두워져. 50일에 하루 쉬는 와중이라도 금요일 주말이면 12시 넘은 야심한 시간 친구들 만나서 술을 마셨어. 동네 친구들 모여 있다면 15분이라도 더 놀아보겠다고 택시타고 총알같이 텨갔었지.
근데 지금도 나 빼고 놀면 분통하고 원통해서 눈물이 왈칵 나와.
아들. 내 친구 슈동이 궁금하댔지, 그 길고긴 막내 생활 중. 우연치 않게 일찍 끝난날 전화 걸면 언제나 '빨리 와'라고 말해주던 그네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고 생각하면 돼.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난 일보다 친구가 더 중해. 노는게 더 중요해. 내가 만화를 그만둔 이유는 거기에 있어. 사람들이랑 있는게 너무 좋아서 멈추질 못하겠더라고.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났다.
내가 지금 여기서 야근에 쩔쩔 매며, 내가 때려치고 만다 다 때려치고 만다 사직서 던지고 뒤도 안보고 도망간다 말만 나불대면서도 이 자리에서 컴퓨터를 붙들고 있는 이유를 단 박에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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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여기 붙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