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자

소소한 수다 2010. 10. 28. 11:18


굉장히 좋아하는 만화 중에 <키 큰 지나의 다리>라는 만화가 있다.
샴쌍둥이로 태어난 지나는 분리수술을 통해 쌍둥이 형과 한쪽 다리를 동시에 잃는다.
그로부터 지나의 생은 오직 하나.
잃어버린 다리를 되찾겠다는 집념과 집착이 전부가 된다.

요즘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린다.
다시 되찾고 싶다고 생각한다.
놓지 않고자 했다면 놓지 않았을 것들이다.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새록새록 왜 자꾸 눈에 밟히는건지 모르겠다.

익숙한 것을 벗어난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이다.
돌아서는 모양새가 외롭기도 어지간히 외롭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대체할 것을 찾고자 한다.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다.
무엇이 '대체'가 될 수있을까.
세상천지 같은 것이 존재하는 법이 없고, 대신할 수 있는거란 없는데.

강수지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아이미스유아이미스유 '더욱 그리운데'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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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발이는 마침내 꿈을 이뤘다!
아침에 주발이네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주발이가 그립다. 문자를 보냈더니 이른 시간(그래봤자 10시를 넘긴시각이지만)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에 목소리 듣고 깔깔댔다. 
주발이가 자취를 시작하고 독립하면서부터 얼굴보기가 꽤 어렵다. 졸업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던데 그게 기억나더라

 ' 나. 니가 그 옛날 말하던 꿈 아직 기억해. 나 이러고 싶다고 스무살 때 철업이 주절거렸지. '대학을 10년 다니고 싶다. 4년은 너무 짧다!라고 했었잖니?'

진정 네가 꿈을 이루는구나. 01학번의 2010년의 졸업이라. 드림스 컴 트루! 무심결 내뱉은 꿈을 주발이가 정녕 이뤄내다니 너무 신기하고 내가 더 설렌다. 스무살은 학창시절로 가득차도 모자란 시기인걸 잘 안다. 인생의 황금기와 열정 가득하던 시기를 학교란 공간에서 꽉 채워 보낸 주발이니가 너무나 부럽다. 배도 아프다. 아이고 데이고 아이고 데이고 ㅠ_ㅠ



* 연대운동장을 돌 때마다 곱씹고 또 곱씹는다.
연대 운동장을 돌 때마다 시간이 남아돌아 곱씹어볼 추억이 참 많다.
10년 된 기억 15년 된 기억. 단물이 빠질법도 한데, 아직도 참 달다. 씹어도 씹어도 계속 나온다. 아마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인물은 아니기에, 내가 꺼내 씹는 그들이 나를 얼만큼 기억할지 모르겠다. 내가 무수히 떠올리는 얼굴들. 내 인생에 있어서 제법 중요한 등장인물들. 그들에게 나는 과연 주요인물이 될 수 있을까?
 대다수는 만나는 횟수와 자주 보는 빈도에 따라 비중있게 다뤄지겠지만, 적은 횟수로 긴 여운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단 몇 번의 순간. 몇개의 기억만으로도 무수히 추억하고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아주 가끔은 그애들에게도 그 사람들에게도 내가 그래줬으면 싶네.
 


* 강박 오빠의 결정과 그에 따른 불안감의 증가
최근 강박오빠가 화끈하게 지른 결정 때문에 나는 불안감에 시달리고있다. 언젠가 스물여덟의 나를 돌아 봤을 때 그때의 노력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쩌지? 내가 바라보고 달리는 것들이 모두 헛되고 헛되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면 어쩌지?
먼훗날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인해 지금을 참는다고 해서 지금의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도 행복하지 못한데 먼 훗날 행복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불행은 뭘로 보상받아야할까?

알쏭달쏭.
오늘은 또 이 문제를 가지고 머리 싸매며 운동장을 돌고 있을 것 같다.



* 스물 여덟 가을
몇년이 지난 다음. 2009년 스물 여덟의 가을은 어떻게 기억될까 생각해 봤다.
몇년 후의 주절거림을 벌써부터 말할 건 없지만, 여튼 내게 2009년 가을은 '포기와 체념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던 계절.' 로 기억할 것 같다. 원하고 바라고 자꾸 욕심내며 자라나는 마음. 그걸 매번 잘라내는 과정은 매번 얼마나 쓰고 아팠던지.(눈물 ㅠ찍!) 그리고 그 과정을, 그 기록을 일기장에 블로그에 친구들에게 말하면서 쉬지않고 드러냈다. (나 힘들어, 나 쉬고 싶어, 나 피곤해 불평불만이 전부였을지라도 말이지.)

누구든, 언제나 변해가는 과정 중에 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변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적도 있고 한방향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기도 한다. 뭐, 다들 그럴테지. 그래서 묻고 싶은 건 단 하나.
'지금, 나는 대체 어디쯤 있니?'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지워질 수도 있을텐데 굳이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더러더러 있어서 꽤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게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니까. 주로 일이 힘들다 불평 불만이 단골 메뉴이자 거의 대부분이지만. 그러면서 몇 년 후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볼까도 고민하고 남들은 대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고민하고. 난 뭐가 될까 생각하고. 뭐 여튼 그렇게 스물 여덞 가을도 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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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시작 전, 그냥 자연스레 쭈꾸미들에게 연락을 했다.
언제나 만나면 의례 순서인듯, 기름진 치킨으로 위장을 감싸고, 사이다 탄산이 주는 날카로운 목넘김을 즐긴 우리는. 어디로 갈까 이대로 헤어질까 주저하기에 내가 광분하며 의견을 냈다.
 

"나! 방송 일 시작하고 서울을 벗어난 것이 5번이 채 안된다. 이 밤을 이따위로 보낼 수는 없는 일! 홍얼이 차를 타고 어디든 가지 않는다면 이대로 혀를 깨물것!"

광분하며 이야기했지만 택한 곳은 (고작, 고작, 고작!!!) 선유도 공원.
난 여길 마음 먹으면 자전거 타고도 온다고 애원했지만 씨알도 안먹히는 이야기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온 그네들은 너무나 피곤했던 것!!! 게다가 유턴 하나 헛질 않고 바른 운전을 하면서도 뒷차가 새치기하면 광분하는 홍얼이가 운전대를 잡고 있어서 장거리 드라이브는 무리였다.

한강 도착 전,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 아이템 펑크로 인해 흐느끼던 나를 위로해준 그들은.
선유도 공원 곳곳을 돌면서 이것저것 참견을 더했다. 명절에 집엔 내려가지 않고 낚시대 드리운 아저씨들이 월척 낚는 현장을 목격 하기도 하고, 대통령 닮은 쥐를 보고 소리 좀 질러주고, 뎡이 그림자를 향해 참치마요네즈 전주비빔 같은 삼각김밥 닉네임을 달아도 보고.
자리를 이동했으면 배가 불러도 뭔가 더 채워넣겠다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내가 집은 건 스트로베리 라떼. 딸기 우유에 비하면 영문으로 표기된 이름엔 뭔가 고급스러움이 있지 않을까, 심지어 가격도 1000원이 더 붙었는데 특이한 깊은 맛이 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뚜껑을 땄지만 예상 외 신맛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인 침을 넘겼다. 라떼란 단어는 왜 붙어 있는거냐. 우유 맛은 하나도 안나는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날이 좋다. 좋아서 참는다.

아이스크림 음료수 하나씩 집어든 우리는 한강을 보며 일렬로 앉아 있었다.
섭맨은 밴드는 연애와 같다고 푸념했고, 실연 아닌 실연의 아픔을 토로하는 그를 위로했다. 나는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돈도 많이 벌고 싶다고 그래서 연희동에 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3년으로 집어드는 연애에 고민인 지점이 몇개 있다 말하는 뎡이가 있었고, 추석날 근무하면 돈을 많이 준다고 좋아라 하는 실리적은 홍얼이가 있었다.(진심이냐 너는? 이라고 재차 물었지만 정말 신나하는 홍얼이 얼굴 앞에 우리 모두 무릎을 꿇었지) 자기 소개서 면접은 대체 어떻게 봐야하는 거야? 돌규가 물어봐도 방송과는 다른 그 판에 관해서 대답을 해줄 수 없어서 답답했다.
푸념섞인 근황을 전하는 우리 모두 꼭 1년 3개월 뒤면 서른이 되는데, 서른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절이란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할 조건도 만족할 여건도 아무것도 갖춘 것은 없다.

서른이 되면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그말로 인해 제일 불안한 것은 내 인생, 고작 요정도 행복이 최상 정점이면 어쩌지?


서른을 얼마 남기지 않은 우리는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 우린 꼭 얼굴을 봤다. 닥쳐오는 중간고사 시험공부한단 핑계로 교회에 모이기 시작한게 중학교 3학년. 그때부터였으니까 꼭 14년, 15번 째다. 반드시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대게는 모여 있었고, 약속은 아니었지만 그냥 지나치면 허전했다.  

'모이자' 해서 모인 우리들이 아니니까, '헤어지자.'라는 인사가 없이 헤어진다 해서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걸, 너무 잘 안다. 근데 그게 또 가끔은 쓸쓸해서 견딜 수 없다.



돌규는 여기 저기 우리들의 모습을 찍었다.
그냥 한강 밤바람이 너무 좋았고, 사진으로 남을 우리들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남겨주는 돌규의 카메라. 쌀쌀한 바람. 둥그래져 가는 가을 달. 우리가 나눈 담담한 이야기, 서로를 위한 소소한 위로까지.
모두, 찍을 수만 있다면, 원형 그대로, 그대로. 가슴 속 싶은 곳에 찍어두고 아무런 효과 보정 없이, 원판 그대로 담백하게 남겨서, 언제고 외롭고 쓸쓸한 날,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일 모레 추석 달을 보고 이걸 빌어야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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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앞에서 우는건 참 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울음같은 짜증을 쥐어짜고 내 모든 속내를 친구한테 토로하다보면 그것만큼 시원한 일도 없다. (물론 '그걸'로 일이 해결된다거나 부조리가 없어진다던지 마음속에 얼룩은 가시지 않겠지만)

그냥 '이 답답함 호소할 데가 있는게 어디야' 그 위안이 참 큰 거 같다

요즘 난 내가 참 병신같다고 비굴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도 알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운다. 1리터 가득 찬 눈물 중에 아직 300미리 밖에 못내놨다 아직 700미리가 남았어.  주말엔 졸 슬픈 영화를 보고 마저 쥐어 짜내야겠다. (아마도 또.. '우리집 개 이야기'가 되겠지)

만두랑 맥주 사서 간 곳이 연희교회였는데,
교회에서 음주라니 이렇게 불손해도 되나 싶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가 얼마나 지금 졸불행한지 알고 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줄꺼라 생각된다

연희교회 등나무 아래서 버드나무를 봤는데
그러고 보니 나 대학 부총 떨어지고 과장 못구해서 쩔쩔 매고 있을 때 혼자 찾아와서 엉엉 울었던데가 여기였다.

불행도 돌고 돌고 인생도 돌고 도는구나.
그나마 내가 우리동네에서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더욱더 불행했을지 모를 일.
앞으로 몇번 더 등나무 아래서 울분을 토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토할꺼 다 토하니까 기분이 가벼워졌다 (종이 2-3장 정도?)

그냥 그때 생각이 나니까,
나 대학교 3학년 겨울. 그때도 정말 하늘이 무너진거 같았지.

캔맥주 갯수도 딱 적당했고 마지막엔 아몬드 빼빼로를 먹어서 기분좋아졌고
엄마한테 다 때려칠꺼라고 진짜 더 못버티겠다고 징징대던게 한참 미안했고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몇번을 더 울게 될지 모르겠지만
날짜 박아놓고 엑스표 치면서 하루하루 버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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