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마저.

소소한 수다 2010. 6. 7. 21:50

나는 꿈마저 다큐로 꾸나보다.

친구 중에 자신의 꿈을 맛깔나게, 블로그에 정리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따라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도 어제 내가 꾼 꿈에 대해서 좀 논하고 싶다.

오늘 심야근무가 예상되길래 어제는 일찍 잠에 들었다. 0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본다면, 나의 하루는 언제나 똑같다. 만화책으로 점철되는 약간의 여가와 새벽 2시경 이루어지는 잠. 어제는 무려 밤 10시에 침대에 누웠다.  특별히 할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되어버린, '내일'이 바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잠은 오늘 아침 8시까지 이어졌다.

꿈은 세 편이었다.



첫번째 꿈.
이제 한달 된 우리 자료조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억이 맞다면 굉장히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선배님 저 내일부터 안나가요. 참 프리뷰 테잎이 *개 남았어요.' 라고 말했던거 같다. 그래 떠나는 너에게 무슨 근거로 프리뷰를 마저 하라고 하겠냐.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나는 내일 있을 빡빡한 일정을 짜보며 괴로워했던 것 같다.

다행이다. 막내는 오늘 무사히 출근했다. 그누구의 출근보다 그녀의 출근이 궁금했던 오늘이었다. 프리뷰도 다 마쳐주었다. 그 덕에 나는 편구를 무사히  써냈다. 이 꿈의 근거는 요즘들어 유달리 어두워 보이는 우리 막내의 표정 덕분이라 하겠다.



두번째 꿈.
정확히 11년 전이었다. 나는 무려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3반이 우리반이었다. 11년만에, 우리반은 뒤집혀 있었다.
 전학생 하나가 왔다. 그녀는 자기네는 남녀 합반인데 짝궁을 했다고 했다. 누군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우리도 남녀 섞어 짝을 하고 싶다고 외쳤다. 요청은 요구가 되어 거세어졌다.
영진은 남녀 짝을 시켜준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이 자신의 짝을 찾기 시작한 건.  2학년 때 내 번호는 40번이었으니까 나도 남자 짝을 찾고 있었다. 남자 10번은 누구였니? 나는 출석부에서 이름을 뒤졌다. 하지만 이름을 찾지 못했다. 궁금해서 이 애 저애 묻고 다녔다. "니가 10번이니?" "아니면, 누가 10번이니?"
서*혜는 좌절하고 있었다.  꿈 속에 그녀는 유*과 짝궁이었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섭의 짝궁이었다. 11년 후에도 그녀들은 그들의 짝인 운명이었나보다.  
아무래도 내가 이 꿈을 꾸게 된 건, 금요일날 정*은과 곰다방에서 기나긴 데이트를 했기 때문인것 같다. 우리가 한반이었던 건 참 다행이었다. 나는 선거 후유증을 열변으로 뭉쳤고, 단단하게 뭉친 감정을 밖으로 마구 끄집어 냈다. 그녀가 동의해줘서, 그런 그녀를 알고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집을 뒤져보면 2학년 3반 명렬표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꿈에서 찾지 못한 남자 10번을 찾겠다. 나의 짝궁을 찾는다 해도 이젠 더이상 짝궁이 되지 못하겠지만, 누가 될지 (기대는 커녕) 너무나 두렵다;;; ㅋㅋㅋㅋ



세번째 꿈
학생회관 사범대실에 앉아 있었다. 대학시절 학생회관 왠만한 방은 다 내방드나들듯이 드나들었다. 4층 동아리방은 말할 것 없이 사대 자대 문만 열만 친구들 얼굴이, 인사하는 후배들의 목소리가, 고개를 숙여야할 선배들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는 시크하기로 정평난 짝수 학번 선배들을 닮고 싶었다. 하지만 시끄럽게로 유명한 홀수학번을 닮아가고 있었다. 선거 끝무렵이었다.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정체 불명의 요리는 이제 그만 먹고 싶다고 선본짱을 닥달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시절이었다. 나는 내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뚫리는 것 하나 없이 갑갑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미워할 것이 너무 많았고, 바꿔야할 것 투성이었다. 때론 미워할 대상에 내가 포함돼 있기도 했었다. 나 자신이 부조리한데 누가 누굴 욕해. 비겁한 내가 싫었고 그런데도 겁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절이 뭐 그리 좋다고 뭐 그리 그립다고 이런 꿈을 꾸고 있나.

이 꿈의 근거는 절친노트 서울예전 재방송을 봤기 때문인 것 같다. 언젠가 학생회관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동창회를 해보고 싶다. 그자리 그대로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말을하고 그때를 기억하고 싶다. 다시 한번 재연되는 그 상황 속에서 그때 우리는 무얼하고 있었는지 다시 되새겨 보고 싶다.



나는 꿈마저 이렇다.
창의성 씽크빅 한번 휘갈기지 못하고 있는 팩트 그대로, 있을 법한 일들이나 이미 있었던 일들을 재연(?)하질 않나, 사실에 근거해서 사실에 근거한 꿈만 꾼다.
꿈속에서 만이라도 하늘을 날고 바다를 가르고 창공을 휘저으며 스펙터클한 어드벤쳐의 세계로 날아보고 싶다.

꿈의 구성마저 너무나 평이하다. 재미 없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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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빼빼로 데이도 어김없이 남들이 받은 빼빼로를 질겅이는 것이 전부였다.
낭만을 기대할 나이는 지났지만, 그렇다고해서 아무 것 없이  보내고 싶단 말은 아니고.
종잡을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휩싸인 채로 나는 오늘도!
옆팀 막내작가에게 온 빼빼로, 우리팀 에이디가 받아온 생초코렛을 주워 먹었다.  


빼빼로 데이가 전국적으로 홍보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올해로부터 근 10년. 아몬드 빼빼로 통빼빼로 나오기 전의 일이다. 우리 학교에서 별나지 않은 애를 찾는 일이 더 힘들다지만, 말 수 없음으로 유명한 남자애가 있었다. 말이 적던, 벙어리던 상관하지 않았던 나의 오지랖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특별한 친분은 없었던 그애. 근데 그날 정말 뜬금없이 그 애가 나에게 빼빼로를 던져줬다.

"너 먹어."

'평소 천성이 밝고 남을 의심할줄 모르던' 나는 여꼴통들과 신나라 하면서 '진짜 주는거야? 나 먹어도 되는거지? 무르기 없는거지' 터진 입이라고 주절대면서 그 빼빼로를 까먹었고, 그 일은 곧 잊혀졌다. 당시 빼빼로 가격 500원. 특별한 날이라곤 하나, 같은 반 애들 사이에서 빼빼로 한통에 별 의미를 다는게 더 이상한 시절이었다.

일주일 중 6일이야 학교에서 마주치는 게 다반사였고 기억할 이유도 없다. 내가 그 애를 아직도 생각하는 건 의외의 장소에서 만났기 떄문이다. 한달에 3만원, 저렴하기 그지 없는 모 단과학원 같은 교실 안에서. 왕따처럼 각자 다녔던 우리 둘은 그 뒤로 저녁밥(=떡볶기)를 함께 먹으며 학원을 다녔다. 주로 내가 주절대고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사이였지만, 나는 눈치 깔 수 있었다.
그 빼빼로는 원래 임자가 있었음을.

십년 전 그 빼빼로.
아마도 그애가 마음에 둔 그애에게 주려고 준비했다가
꼭꼭 손에 쥐고 또 쥐고 있다가 너무 떨린 나머지
그냥 눈에 띄던 '시끄러운 나' 에게 던져준 것이리라.
그걸 좋다고 까먹던 나와 여꼴통들은;;; 정말이지...


여튼 이런 날이 되면 그애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두 눈을 감은 채 사과하고 싶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고백하자면,
네 순정을 짓밟아 놓아서 미안타. 성*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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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고등학교 동창생 남자애를 만났다.
그애는 내리는 역이었고, 나는 그애가 내리는 찰나 입구 앞에 서 있는 그 애를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가 나눈 말은 몇마디 되지 않았다.

"으앗! 김*석!"
"오! 신승*!"

남자애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며 웃었다.
그리고 열려진 문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너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톡쏘아 받아칠 내 말은 마저 듣지도 않고 그렇게 황망히 가버리다니...



작년 최*빈 결혼식.
근 7년 8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얼굴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렇기 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자리에 나선 건 그때문이었다. 이제 다시는 못볼지도 모르는 애들이 궁금하다는 호기심...) 그리고 예상 그대로 최*빈의 결혼식은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애, 심지어 전학간 얼굴까지 다시 모여 있는 만남의 장이었다. ㅋㅋ

고등학교 때보다 더 훤칠하게 자란 남자애들은 키작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말을 똑같이 남겼다.

"넌 어떻게 하나도 변한게 없냐."

내가 그날 코트를 입고 목도리로 이중턱을 가리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더 쪘다.




작년 가을, 상상마당.
영화 한편 때리고 나타나서는 고등학교 동창생 여자애를 만났다.

"꺄아! 신승*!!"

헤어스타일이 변하고 옷차림도 몹시 변해 그야말로 '홍대'스런 마인드를 가지게 된 그녀의 변화를 나는 단박에 눈치챘다. 그녀는 나를 보고 폴짝 뛰었다.

"어쩜 하나도 안변했구나."

나 나름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준답시고 앞머리 일자로 잘랐는데 그거 안보이냐??
끝내 그녀는 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듯.



오래간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짠듯, 언제나 나에게 같은 말을 건넨다. 
자주 보는 친구들이야 내 성장의 과정을 듣고 보고 느끼고 공감해주겠지만,
그들은 그 길고 긴 시간을 뛰어 넘어 '여전하고', '그대로인' 모습만 눈에 담는가보다.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사건과 함께할 공간은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 시절 꾸었던 꿈을 꾸고 있다.
그게 비록 '언제나'가 되지는 못하지만,

가끔,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쓸쓸해진다.
나만 이 자리 혼자 남아, 몽상으로 치부 될 부질없는 꿈을 꾸는 것 같아, 외롭다.
그 때 꾸던 꿈이 허황됐나. 이루지 못한 꿈이라 미화되었나?
작년 봄, 대학에 찾아가 나이든 교수님을 봤을 때도 그랬었지.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을 다시 돌이켜 본다.
영영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세월에 부대끼다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하더라도
그 꿈이 있어서, 그 꿈만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 '꼬꼬마시절 감수성 풍부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낭만스런 소녀 마인드'로 돌아갈 수 있는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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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것은
청춘의 꿈을 레몬색으로 덧칠하는 허황된 만화.
'허니와 클로버'를 읽고 잤기 때문.

서른이 가까워오니 이루지 못한게 많아서 부질없이 꿈만 꾸고 상상만 한다;;;;
 
 





내가 나온 모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거의 매주 채플이 있었는데 이대강당에서 드리는 전체 예배도 있었고, 방송 예배도 있었고, 반별예배도 있었다. 공부를 안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설교가 들어가는 그 순간. 예배시간은 수업이랑 다를 바 없어지기 마련이다. 대게 그 시간은 졸거나 딴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던 우리를 흥분시키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가 처음으로 춤을 선 보인 것은 바로 채플시간이었다.
반별로 진행되던 예배시간. 그 시간에 우리는 조별로 찬송에 맞춰 율동을 준비해야했다.
당시 젠틀한 이미지로 아버지감 1등이었던 종교부장 최*진이 치는 기타 반주에 맞춰 불러야했던 찬송가 '손을 높이 들고'.
그러던 그 순간 벌어진 것이다.

뭔가 지렁이가 흔들어대는 듯한 느낌으로 박자 무시하고 꼬부랑 거리던 그의 허리춤! 춤까지는 좋았으나 벗은 것도 아닌데 대체 거기는 왜 손으로 가리며 춤을 추는 건지. 그는 허리를 아주 신명나게 흔들어댔는데...
여학생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결코 환호가 아니었다. 그는 '비'가 아니었을 뿐더러 우리 역시 그의 팬이 아니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그 불쾌감으로 이그러지는 입모양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종교라는 것은 나름 '벌'이라는 것을 내포하는 절대적인 영역인데 성스러운 노래를 저렇게 더럽히다니!! 광분하면서도 차마 역정은 내지 못하고 소리만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야 이 새끼야 그만해!!!



2학년 가을 소풍은 북한산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들이 단체로 아무거나 생각나는데로 적어놓고 제비뽑기 한 것 같이 참으로 센스 없는 소풍장소다.
우리가 암반을 타겠는가 산정상에서 깃발을 꽂겠는가? 할일도 없고 무료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먹는 일 뿐! 김밥을 절반 정도 먹었던가? 두껍게 썰기로 유명한 우리 엄마의 김밥을 입안에 넣는 그 순간. 산 위쪽에서 전교생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의 이번 스테이지는 북한산 바위 위! 차라리 신화 춤을 추는 전*기는 깔끔했다!  
떨어질지도 모르는 그 높은 곳에서 그 기름진 춤을 춰대다니!!!
음악도 비쥐엠도 없었지만, 전교생들이 우러러(?)보는 그 장소에서 그는 더욱더 흥을 느낀듯 했다.

야 이 새끼야 그만해!!! 김밥맛 떨어지잖아?!?!?!?

뒤늦게 학생주임이 돌을 던져 그의 춤을 멈추게 했지만;;;;
영원히 회자되는 혼돈의 소풍이었다.
춤을 추는 것은 그네였는데, 왜 내가 부끄럽고 창피한지 알 수는 없지만 여튼 그랬다.



2학년 학기의 끝자락.
영어 과목을 맡았던 담임은 기를 써서 토요일 하루를 우리반을 위한 시간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날 1년간 모아 놓은 지각비로 떡을 하고 오락시간을 가졌다. 
당시 오락시간의 사회자였던 나는 그토록 반대했으나 몇몇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그의 등장.

팬들의 요청이라고 생각했는지 더욱더 화려하고 현란한 동작과 업그레이드 된 춤으로 응수했던 그!

그의 춤을 보다간 백설기에 박혀 있던 콩이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아서 나는 교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그는 교탁 밑으로 숨은 내쪽으로 계속 춤을 전진(?)시켰다고 한다. 에라이 이씨밤바?멍ㅎ먀ㅐ어ㅔ랴ㅐ버ㅔㅐ험ㅇㅁ레!!!

세번째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그 스물거림에 여학생들은 경악을 했으며
남자애들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다 못해 고개를 숙였고
당시 담임선생님이던 영진은 얼굴이 씨뻘개 진채로
'들어가~!!! 들어가!!'를 외치며 그의 등짝을 때렸으나
맞아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끝을 향해 달려가던 그의 춤.

그 춤의 느낌이 어땠냐면....
꼭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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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이 느낌... 따악~ 요 정도의 스물거림과 느끼함....
식용유를 한대접 삼킨거 같이 토하고 싶지만 토한다 해도 깨끗하지 못할 것 만 같은
끈적한 이 느낌..


이 방송(?)과 몹시 닮아 있던 이형*군의 춤의 이름은 '공포의 거시기 춤'
역류하는 백설기를 억누르며 댄스에 이름까지 붙인 불어반 이한나의 작명센스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