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동네 '언덕 위 하얀집'을 부수는 걸 눈 앞에서 보고
참담함에 일기를 쓴다.

'언덕 위 하얀집'이 정신병원을 말하는건  
골동품이 문화재로 바뀔만큼 오랜 시간된 유머인데, 
우리동네엔 아주 예전부터 이름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집'이 있었다 

곽지균 감독의 영화 <겨울나그네>에도 나왔던 집이고,
그 앞을 지나면 (그 근처 집들이 다 허우대 멀쩡하고 담높고 평수 좋은 집들이다만)
프로방스 식 아담한 집모양이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설레게했다. 

빨강머리 앤의 감수성에 반해 있던 꼬꼬마 시절
그 집에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해서 무얼하며, 
오죽하면 그 집에 살고 있는 먼훗날 연애의 대상을 상상해 본적도 있었지.
(모두 상상력이 뇌를 뚫고 하늘까지 뻗쳐가는 사춘기 시절의 일이다)

'마리아 칼라스'라는 까페 이름으로 바뀌었을 때 
개인 소유가 아닌, '투자'와 '이윤'의 공간으로 변질된 그곳에 대한 배신감은 얼마나 컸던가. 

그래도
까페의 모습으로라도, 계속 있어주길 바랬는데... 
 
언젠가 살고 싶던 집들이
언젠가 살고 싶던 삶들이 
꿈꾸던 것들이 자꾸만 실현 불가능함을 눈으로 목격하며 
나이를 먹는 것이 존재가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아득히 슬픈 일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루하루 닳아져 없어져 간다.
'존재'가. 

     

사막 속 우물

20세기 소녀 2010. 6. 17. 15:37


사실 난 이번 월드컵 우리나라를 응원할 생각이 그리 없다.
'대~한민국!'이라니!
신명나서 어깨를 들썩이는 것도 한 두 해지,
8년째 같은 리듬 타기 진부하다. 질리고 지겹다.
그래, 맞다! 나는 원래 변덕이 심하다.

내가 이렇게 나라에 대해 시큰둥해 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 나라가 나에게 해준게 뭐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몇개 없는거 같다는 결론과,
짝사랑도 한두 해다. 외사랑으로 끝날 사랑은 안하는게 낫겠다.라는 판단.
여튼 우리 나라, 우리 사회에 대한 실망이 한 몫한다.
국가최고 지도자랍시고 TV나온 사람에 대한 살의도 큰부분 차지한다.
(그 사람이랑 같은 국적인게 부끄러워 참나 살 수 없다! 미치고 돌아가시겠다;;;)

나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흡사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함께사는 권태기 부부'같은 모습이다.
별 수 없어 산다. 별일이 안생겨서 산다;;;;


지난주말, 재촬영과 재편집. 24시간만의 퇴근을 경험하는 와중에 그래도 간신히 짬을내 그리스전 축구 시청만큼은 허락됐다. 아빠도 나가셨겠다, 엄마가 애들 불러도 된다고 했겠다, 기회를 틈타 우리집으로 동네파를 불렀다.

동네파는 알러뷰 티셔츠를 맞춰입고 왔다.
피자를 두판 사왔다. 무한도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먹어치웠다.
싸구려 피자라 양이 적어 그렇다며. 다같이 변명을 했다.
손가락 빨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김마망이 40분 걸려 치킨을 배달했다.



닭관절을 씹으며 내가 말했다.
"난 요즘 우리나라 별로야. 권태기랄까? 국적을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어. "

콜라를 들이키며 만두가 말했다.
"그래도 연희동은 좋아."

그래. 만두의 말이 맞다.  
이딴 나라, 지긋지긋한 땅 구석, '국개'라 불려도 싼 사람들.
진절머리나는 틈바구니가 뭐가 좋다고,
모든걸 훌훌 털어버리고  이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동네에 있었다.

우리동네. 우리집, 우리 식구, 동네파, 친구들, 연희교회, 연세대, 사러가 근처, 꾸러기 놀이터.... 일억만금을 준다해도, 바꾸진 않을테다. 일억만금 값나가는 보물이 바로, 내가 사는 이 나라에 있었다. (아무도 일억만금 주고 사진 않을테지만 ㅎㅎㅎ)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야."
어린왕자가 말했었나, 여우가 말했었나?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나는 사막같은 세상 속,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우물' 하나를 숨겨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욕할 것 투성이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누구나 각자의 마음 속 우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백명의 마음속에는 백 개의 우물이. 천 명의 마음속엔 천 개의 우물이.

그래서 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모래투성이 사막일지라도,
 정녕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사는 이 못난 나라도 진정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생각해봤다. 
'대한민국~'까지야 못외치겠지만,
그래도 조금, 응원할 마음이 생긴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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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권태기 부부사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만취한 '민국이'와 '나'.

올해 나를 포함한 슈동은 큰 부담에 직면해 있다.
서른이 되기전 할 수 있는게 뭘까 고민이 많다.
어제 모여서 노는 자리에서 슈동에게 고민을 토로했더니,
목표를 설정해서 올 한해 제대로 놀아보잔 결론이 났다.




서른이 되기전 슈동이 꼭 해야할일

 1.슈동 티셔츠(슈퍼동네파다모였다) 입고 클럽가서 부비부비하는 애들 사이에서 우리끼리만 강강술래원그리고 춤추기 (연재 예정일 9월 30일 목요일)

2. 여행계해서 여행가기 (남해 or 제주도 건의 나왔음)

3. 윤댕이를 보러가자 (공군수련관인가 꼭 예약)- (동해에 발담글 수 있는 여름으로 결정)

4. 자전거 타고 난지캠프장 가서 캠핑 - 5월 예정(쩡뿌까는 대중교통 이용 요망)

5.뮤직비디오 찍기 - 수년간의 숙원사업임, 그러나 내가 편집을 배워야 하고, 만두가 노래를 작곡해야함. 만두가 작곡을 못할 경우 그냥 기성곡을 골라서 만들 수도 있음

6.할로윈파티- 각자가 맘에드는 의상과 분장을 하고 만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다가 클럽따위 들어가지 않고 홍대에서 맛있는걸 먹고 파함.

7.수상스포츠-
이구만이 강력히 건의, 레프팅이나 수상스키 바나나보트 타기. 10명인원이면 단체할인도 적용가능함. 김도도네 회사 콘도 이용하면 남한강에서 즐길 수 있음.

8.10명이 야외수영장가기-특히 선수용 수영복을 입어야서 튀겠다는 의견이 지배적

9.수영대회 - 8번과 동시에 진행 가능함. 두팀으로 나눠서 릴레이 하기로함. 튜부타고 떠다니는 사람들은 알아서 피해야함.

10. 눈썰매 타고 눈싸움 하기 (폭설시 즉시소집, 소집장소 연대 언덕, 쌀푸대 자루나 비닐봉지로 충분함)

11. (버니빼고) 의좋은 형제, 의상한 형제 하기

12. 총선후 선거하면 주는 고궁할인표로 궁궐방문-다과 및 샌드위치 준비, 꽃이 만발한때 사진찍기 , 사진을 스티커로 뽑기

13. 배드민턴 대회 (체육대회때 동시 진행가능)

14.밤중에 연대 인조잔디 위에서 치킨을 시켜먹고(앙증의견) 수건돌리기 하기(은경 의견), 이때 게스트로 이화연참가. 속행되는 게임은 아이엠 그라운드임. (이구만의견) 자신의 슈동이름에 맞는 모션을 꼭 만들어서 참여바람.

15.자연학습장 소풍 - 이번에는 제대로된 최선을 다한 도시락을 준비,이날의 이벤트는 사생대회, 제비를 뽑아서 서로 얼굴을 그려주는 대회를 열 예정. 이게 뭐냐고 눈물흘려도 어쩔 수 없음. 액자에 걸기

16.10:10 미팅 --->이 의견은 댓글통해 찬반 표시바람. 모두 찬성시 앙증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신청자를 모아 오디션볼것임.

17.복불복 대회 - 두팀으로 나누어 제비뽑기를 함

18. 밤에 연대 운동장에 모여서 숨바꼭질을 미친듯이 하고, 새벽에 찜질방에서 목욕하고 아침에 헤어짐. 찜질방 (숲속랜드, 봉원사 근처) 찜질방에서는 보드게임 예정

19. 12월 31일 신년 해돋이 보러가기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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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들릴 일이 있었다. 평소 지나던 우정골목이 아니라 연희교회쪽으로 몸을 틀었다. 골목 어귀 조금 낯선 풍경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감사했읍니다 건강하세요'. 비어버린 미용실을 들여다 봤다. '헤어킴 사장 미세스 김' 언니는 그렇게 떠났다.

'5000원짜리 학생커트 2만원짜리 파마'.
대학생들 동네 아줌마들 상대로 미용실이 참 많이 생겼다. 그래도 동네 아줌마들 줄줄이 머리에 수건을 얹고 TV를 보고 있는 미용실은 '헤어킴'미용실이 유일했다. 작년 이맘때 쯤 파마약 때문에 독이 올라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염색 안해요, 파마 안해요' 써붙여도 동네 아줌마들은 '이번 한번만', '나만'을 외쳤다. 그래서 결국 언니는 이렇게 안녕을 고했나보다.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진아미용실에서였다. 당시 언니는 '미스 김' 시절이었고, 진아미용실 사장에게 고용된 종업원이었다.  손님이 8명 9명 몰려 있어도 진아미용실 사장 아줌마는 가위를 들지 않았다. 밀린 손님은 모두 미스 김 언니의 몫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언니가 안됐다고 말했다. 엄마는 그게 사장과 종업원의 차이라고 말해주었다.
중학교 1학년 당시 커트비용 5000원. 그리고 나는 두달 전까지 언니에게 5000원을 내고 머리를 잘랐다. 언니의 손을 타지 않고 머리를 잘랐던건 진아미용실이 망했을 때 몇달, 대학교 졸업후 호일파마했을 때 세달, 언니가 출산휴가로 문닫았을 때 한달이 전부다. 모두 합하고 빼도 15년이 된다.

진아 미용실이 망했던건 나 대학때 일이었던거 같다. 몇달의 시간이 흘렀다. 우연히 동네 골목에서 마주친 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학생, 저 여기다 미용실 차릴거예요. 그럼 이리로 와요.' 언니는 드디어 사장이 됐다. (비록 종업원은 없을지라도) 그때 본 언니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우리 할머니 누워계시던 몇년. 출장까지 와서 머리 잘라주면서 단돈 천원도 더 안받으려고 했던게 생각난다. 나 맹장터졌을 때 3일 안감은 머리를 감겨주던것도 언니였다. 그러면서도 샴푸값 천원을 더 안받았다. 마음씨 참 착하다고 동네 아줌마들한테 칭찬도 자자했는데.
그 고운 마음씨 만큼 행복한 모습만 봤으면 참 좋았을텐데,
 
아기 낳고 한달 더 쉬고 싶었는데 신랑이 화내서 미용실 문열었단 말이 자꾸 맴돈다.
자기 수요일 하루 쉬는데 그날도 밀린 집안 일로 쉴새가 없다는 말도 생각난다.
언니의 남편은 변변히 하는 일이 없다는 동네 아줌마들 말도 생각이 난다.

언니를 기억하는 자리에서 '착취'나 '여성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언니를 처음알았던 시절에 나는 그런 단어를 알지 못했음으로. 언니와의 기억만으로 언니를 추억하고 싶다. 하지만 부정할수는 없다. 언니가 조금 더 행복하려면, (계몽 소설 같은 문구지만)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것. 적어도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많은 걸 바라는게 아니다.
착하고 순박했던 언니의 그 고운 마음만큼만, 딱 그만큼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바란다.
세상이 참 모질다. 비정하고 혹독하다. 그 '당연함'이 뭐 그리 '어려운가.
그게 너무 속이 상해서, 미용실 그 빈자리를 들여다 보는 내내 자꾸 눈물이 났다. 






*줄리아 하트의 노래를 미친듯이 찾아서 듣고 있다. 작년 9월에 미쳐있었던건 <브로콜리 너마저>, 작년 12월에 빠져 있었던건 <20세기 소년>이었지. 줄리아하트 2집은 이미 품절이다. 친구가 리핑받아줬는데, 노래 전체가 너무 다 좋다. 친구 쩡에게 팔 생각 없냐고 물어봐야겠다. 설마 나는 그녀의 친구인데, 웃돈을 더 얹어 받지 않겠지 ㅋㅋㅋ

*어제 저녁 6시 30분부터 10시 45분까지 4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회사 야근에 진저리가 쳐져서, 회사에 가방을 놓고 컴퓨터 켜 놓은채 도망 나왔다. 고딩때 가방 버리고 보충 띵기던 임*선 백*아 이런 애들이 떠올랐다.
연희동 <망향>가서 비빔칼국수에 만두 먹고 오래간만에 <노란손수건>도 찾았다. 멤버는 주기자, 버니, 그리고 뒤늦게 참여한 김도도. 여성이 하루에 사용해야하는 단어는 2만5천개라고 누가 말했던가? 역시 사람이라면 4시간쯤 수다도 떨어주고 연예계 뒷다마 좀 거론 해줘야 사는 듯 하고, 고조 숨통이 트이는 듯 하더라. 오늘 또다시 2만5천개를 사용하려면 누구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걸까?
아마 난 손가락이 불나게 네이트 창에 단어를 나열하고 있을꺼야;;;;

*어제 엎드려서 오정희 소설 <유년의 뜰>을 읽고 있고 있으려니, 문득 예전 가리봉동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한국나이) 6살 겨울에 연희동으로 이사 왔으니 태어나서부터 고작 5년하고 6개월 정도 그 동네에서 살았다. 어리고 짧았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선명해서, 내가 그 추억을 곱씹을 때면 엄마 아빠 할머니 모두 깜(짝) 놀(라곤) 했다.
어제 다시금 떠올린 장면은 아빠를 마중갔던 엄마와 우리 삼남매의 모습. 골목길 뒷켠 무수히 그리고 줄줄이 이어져 있던 공터. 공터를 지나고 나면 멀리엔 지하철(전철이었던가;;;)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빠는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곤 지하철에서부터 그 공터를 향해 걸어왔었지. 구불구불 보도블록이 튀어나온 길에서 유모차에 타고 있던 우리 막내, 그리고 유모차를 타겠다고 징징대던 영진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빨간볼에 못생겼던 나. 그리고 아직 30대 후반이던 파마머리의 젊은 엄마. 그런 단편적인 기억을 어떻게 포장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대게의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을 행복으로 포장한다. 뭐 지금도 나도 그때를 떠올리면 뭔가 따뜻한 그리운 감정들이 솟구치는데, 먼 훗날은 얼마나 더 그립게 될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십대 때 우리집에는 참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지나고 나면 수미상관. '그 옛날'과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 '지금'을 떠올린다면 똑같은 안정과 평안이 반복되고 있기에,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나름 행복했었다고. 아마도 우리 집은 언제까지나 아늑하고 그리운 느낌으로 남을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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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이런 아늑함을 말하는 건 아니고;;;;



* 주발이는 마침내 꿈을 이뤘다!
아침에 주발이네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주발이가 그립다. 문자를 보냈더니 이른 시간(그래봤자 10시를 넘긴시각이지만)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에 목소리 듣고 깔깔댔다. 
주발이가 자취를 시작하고 독립하면서부터 얼굴보기가 꽤 어렵다. 졸업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던데 그게 기억나더라

 ' 나. 니가 그 옛날 말하던 꿈 아직 기억해. 나 이러고 싶다고 스무살 때 철업이 주절거렸지. '대학을 10년 다니고 싶다. 4년은 너무 짧다!라고 했었잖니?'

진정 네가 꿈을 이루는구나. 01학번의 2010년의 졸업이라. 드림스 컴 트루! 무심결 내뱉은 꿈을 주발이가 정녕 이뤄내다니 너무 신기하고 내가 더 설렌다. 스무살은 학창시절로 가득차도 모자란 시기인걸 잘 안다. 인생의 황금기와 열정 가득하던 시기를 학교란 공간에서 꽉 채워 보낸 주발이니가 너무나 부럽다. 배도 아프다. 아이고 데이고 아이고 데이고 ㅠ_ㅠ



* 연대운동장을 돌 때마다 곱씹고 또 곱씹는다.
연대 운동장을 돌 때마다 시간이 남아돌아 곱씹어볼 추억이 참 많다.
10년 된 기억 15년 된 기억. 단물이 빠질법도 한데, 아직도 참 달다. 씹어도 씹어도 계속 나온다. 아마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인물은 아니기에, 내가 꺼내 씹는 그들이 나를 얼만큼 기억할지 모르겠다. 내가 무수히 떠올리는 얼굴들. 내 인생에 있어서 제법 중요한 등장인물들. 그들에게 나는 과연 주요인물이 될 수 있을까?
 대다수는 만나는 횟수와 자주 보는 빈도에 따라 비중있게 다뤄지겠지만, 적은 횟수로 긴 여운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단 몇 번의 순간. 몇개의 기억만으로도 무수히 추억하고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아주 가끔은 그애들에게도 그 사람들에게도 내가 그래줬으면 싶네.
 


* 강박 오빠의 결정과 그에 따른 불안감의 증가
최근 강박오빠가 화끈하게 지른 결정 때문에 나는 불안감에 시달리고있다. 언젠가 스물여덟의 나를 돌아 봤을 때 그때의 노력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쩌지? 내가 바라보고 달리는 것들이 모두 헛되고 헛되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면 어쩌지?
먼훗날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인해 지금을 참는다고 해서 지금의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도 행복하지 못한데 먼 훗날 행복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불행은 뭘로 보상받아야할까?

알쏭달쏭.
오늘은 또 이 문제를 가지고 머리 싸매며 운동장을 돌고 있을 것 같다.



* 스물 여덟 가을
몇년이 지난 다음. 2009년 스물 여덟의 가을은 어떻게 기억될까 생각해 봤다.
몇년 후의 주절거림을 벌써부터 말할 건 없지만, 여튼 내게 2009년 가을은 '포기와 체념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던 계절.' 로 기억할 것 같다. 원하고 바라고 자꾸 욕심내며 자라나는 마음. 그걸 매번 잘라내는 과정은 매번 얼마나 쓰고 아팠던지.(눈물 ㅠ찍!) 그리고 그 과정을, 그 기록을 일기장에 블로그에 친구들에게 말하면서 쉬지않고 드러냈다. (나 힘들어, 나 쉬고 싶어, 나 피곤해 불평불만이 전부였을지라도 말이지.)

누구든, 언제나 변해가는 과정 중에 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변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적도 있고 한방향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기도 한다. 뭐, 다들 그럴테지. 그래서 묻고 싶은 건 단 하나.
'지금, 나는 대체 어디쯤 있니?'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지워질 수도 있을텐데 굳이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더러더러 있어서 꽤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게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니까. 주로 일이 힘들다 불평 불만이 단골 메뉴이자 거의 대부분이지만. 그러면서 몇 년 후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볼까도 고민하고 남들은 대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고민하고. 난 뭐가 될까 생각하고. 뭐 여튼 그렇게 스물 여덞 가을도 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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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위로.

소소한 수다 2009. 8. 24. 12:43

27기 쭈꾸미들은 이번주 수요일 한반도 남단 섬으로 떠날 예정. 난 목요일 금요일 주말 내 사무실 죽치고 있을게 확정. 어제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 간 코스프레라도 해야겠다 결심했다. 만약 제주도 가면 해변에서 내리 쓰고 다녀야지 맘 먹었던 밀짚모자(코디용으로 나온게 아니고 말 그대로 밀짚모자. 대학 3학년 농활때 썼었고, 아빠가 할아버지 묘 잔디 정리할때 옥상 청소할때 애용하는 모자;;;)를 쓰고 연희동을 배회했다.
 동생이 쪽팔려서 살 수 없다며, 언니가 이 집 딸인거 22년째 동네 사람들 다 아는데 뭐하는 짓이냐고 쏴댔지만 무시했다. 내 불행의 강도는 너무나 단단하고 견고해서 그 어떤 태클도 가볍게 반사 상태다. 자전거 타고 가는 내 뒷모습을 보더니 노무현 대통령 코스프레냐고 비이냥 대는 소리를 한마디 더 던졌지만 상관없다. 노통이 봉하마을 사랑하듯 나는 우리 동네를 사랑해. 백번도 더 외칠 수 있다.

밀짚모자 끈 질끈 동여매고 바람에 날릴것을 대비했다. 실제 내 턱과 살이 만든 턱을 적절하게 구분지어주더라. 스테레오 도착 전에 질겅이면서 씹은 껌소리랑 자전거 체인 감기는 소리가 절묘하게 맞아들어가서 신났다. 한참 페달을 밟으니 구름 한점 없는 여름 끝자락.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연희동. 줄지어 있는 이층집들이 새삼 감동이다.
여섯살까지 가리봉동에 살았었다. 그때 우리집은 일층 후미진 집이었는데 이층양옥집인 외갓집이 그렇게 좋아보일 수 없었다. 나무 목조로 된 평범한 북가좌동 이층집은 어린 꼬꼬마의 눈에 보기엔 서양동화책속 집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한층 더 올라가면 2층이 있다는 사실과 정원에 밟고 디딜 나무가 있다는 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여유로운 집' '사람살기 행복한 집'하면 나는 아직도 정원이 딸린 이층양옥집을 떠올린다. 끝없이 줄지어져 있는 연희동 골목길. 집들 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겠지. 그냥 그 장면들이 소소하게 그려져서, 그런걸 떠올리면 세상은 참 동화같고 살만하구나 그런게 느껴져서 연희동을 떠나기가 싫다.

스테레오에서 한잔 가득한 더치커피를 빨아주시고 만두가 도착할 때까지 책을 읽었다. 만두 공연에도 못간 나는 그네를 근 2주 만에 만난다. 오징어 김밥을 사가지고 동우물 놀이터로 갔다. 벤치에 누웠는데 시야에 나뭇가지 하늘만 보여서. 예전같으면 끈적이고 짜증날것 같은 더위. 바람 부니까 서늘하게 땀이 씻기는 느낌이 들어서 마냥 좋았다.

집에 와서 만두랑 <푸른눈의 평양시민>을 봤다 다큐는 전달하는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수다 떨면서는 못보겠다 싶었다. 여백이 많은 <석류의 빛깔>같은 영화를 같이 봤어야 하는데 말이지. 만두랑 무한도전 <서바이벌 동고동락> 1편이랑 2편을 봤다. 아 나 캠핑 가고 싶어. ㅠㅠ 바다에서 구명조끼 안입고 수영도 잘할자신 있는데 말이지. 캠핑장 치고 야외에서 밥하는 것도 자신있다규! 무한도전을 보고 나니까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노랗게 얼굴이 뜬 만두를 끌고 결국 연대 운동장까지 갔다. 씻고 자겠다는 주기자를 불러내고 한참 신세 한탄하니까 우리 제법 그럴싸한 직업군인데(?)라는 결론이;;;; 한명은 뮤지션 한명은 방송인 한명은 언론이라규. 한참 웃었다. 그럴싸한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배고프고 곤궁한걸까?

인조 잔디를 심은 연대 운동장은 미시간에 있는 커다란 대학 운동장 못지 않다. 돗자리 가져와서 나중에 치킨먹어도 괜찮겠다. 사람이 빠질 새벽 무렵 트랙따라 동네파 자전거 릴레이를 해도 재밌겠다. 인조잔디 덕분에 넘어져도 안아프고 풀물도 안들거라고.

나는 제주도를 못가서, 심장이 없어졌지만(ㅠㅠ) 어제 하루의 여유로 기력을 차릴 정도는 됐다. 쉬는 일요일 나름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곳에서 함께 했으니 완벽한 동화는 안되지만 청소년 성장 소설 정도의 행복은 갖춰진 셈이라고, 위로해 본다.



우리동네

20세기 소녀 2008. 8. 12. 16:32

연희동

나는 연희동에서 자랄 수 있었음을, 아직도 살고 있음을 감사한다. 여섯살 겨울. 둘째 고모부의 차를 타고 건너 온 이 동네에서 스무해하고도 일년을 보냈다.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고층건물. 천편일률적으로 생겨 먹은 아파트 단지. 호화롭지만 갑갑하고 복잡한 주상복합 아파트들과는 달리, 단층 혹은 이층 건물로 이루어진 이 동네에서는 아직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하늘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전'모씨와 '노'모씨는 죽음으로 역사에 사죄해야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존해 있기에, 연희동이 '재개발지구'의 혜택을 입지 않는 건, 진정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변화만을 선택하는 이 사회는 숨이 막힌다. 넌더리가 난다. 언제나 '개발'이라는 글자 아래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허용하고 묵인하고 침묵하는 <서울>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두렵운 곳인가. 그런 서울에 살고 있음에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것과 관련없는 동네였기에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

그래서 내겐 연희동이 그렇다. 누구에겐 숭례문이 그랬다지만, '연희동'은 언제나 내게 고정된 상수였고, 내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천만이나 된다. 서울은 '내 고향'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겠지. 그래서 고향을 꼽자면, 스무해 하고도 일년. 느리게 변하고 변한듯 변하지 않는 '연희동'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돌아가고 싶고, 되찾고 싶을 '연희동'이. 앞으로도 살고 싶고, 다른 곳에서 산다 생각하면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 이 동네가 '진짜 내 고향'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