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동네 '언덕 위 하얀집'을 부수는 걸 눈 앞에서 보고
참담함에 일기를 쓴다.

'언덕 위 하얀집'이 정신병원을 말하는건  
골동품이 문화재로 바뀔만큼 오랜 시간된 유머인데, 
우리동네엔 아주 예전부터 이름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집'이 있었다 

곽지균 감독의 영화 <겨울나그네>에도 나왔던 집이고,
그 앞을 지나면 (그 근처 집들이 다 허우대 멀쩡하고 담높고 평수 좋은 집들이다만)
프로방스 식 아담한 집모양이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설레게했다. 

빨강머리 앤의 감수성에 반해 있던 꼬꼬마 시절
그 집에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해서 무얼하며, 
오죽하면 그 집에 살고 있는 먼훗날 연애의 대상을 상상해 본적도 있었지.
(모두 상상력이 뇌를 뚫고 하늘까지 뻗쳐가는 사춘기 시절의 일이다)

'마리아 칼라스'라는 까페 이름으로 바뀌었을 때 
개인 소유가 아닌, '투자'와 '이윤'의 공간으로 변질된 그곳에 대한 배신감은 얼마나 컸던가. 

그래도
까페의 모습으로라도, 계속 있어주길 바랬는데... 
 
언젠가 살고 싶던 집들이
언젠가 살고 싶던 삶들이 
꿈꾸던 것들이 자꾸만 실현 불가능함을 눈으로 목격하며 
나이를 먹는 것이 존재가 닳아 없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아득히 슬픈 일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루하루 닳아져 없어져 간다.
'존재'가. 

     

사막 속 우물

20세기 소녀 2010. 6. 17. 15:37


사실 난 이번 월드컵 우리나라를 응원할 생각이 그리 없다.
'대~한민국!'이라니!
신명나서 어깨를 들썩이는 것도 한 두 해지,
8년째 같은 리듬 타기 진부하다. 질리고 지겹다.
그래, 맞다! 나는 원래 변덕이 심하다.

내가 이렇게 나라에 대해 시큰둥해 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 나라가 나에게 해준게 뭐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몇개 없는거 같다는 결론과,
짝사랑도 한두 해다. 외사랑으로 끝날 사랑은 안하는게 낫겠다.라는 판단.
여튼 우리 나라, 우리 사회에 대한 실망이 한 몫한다.
국가최고 지도자랍시고 TV나온 사람에 대한 살의도 큰부분 차지한다.
(그 사람이랑 같은 국적인게 부끄러워 참나 살 수 없다! 미치고 돌아가시겠다;;;)

나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흡사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함께사는 권태기 부부'같은 모습이다.
별 수 없어 산다. 별일이 안생겨서 산다;;;;


지난주말, 재촬영과 재편집. 24시간만의 퇴근을 경험하는 와중에 그래도 간신히 짬을내 그리스전 축구 시청만큼은 허락됐다. 아빠도 나가셨겠다, 엄마가 애들 불러도 된다고 했겠다, 기회를 틈타 우리집으로 동네파를 불렀다.

동네파는 알러뷰 티셔츠를 맞춰입고 왔다.
피자를 두판 사왔다. 무한도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먹어치웠다.
싸구려 피자라 양이 적어 그렇다며. 다같이 변명을 했다.
손가락 빨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김마망이 40분 걸려 치킨을 배달했다.



닭관절을 씹으며 내가 말했다.
"난 요즘 우리나라 별로야. 권태기랄까? 국적을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어. "

콜라를 들이키며 만두가 말했다.
"그래도 연희동은 좋아."

그래. 만두의 말이 맞다.  
이딴 나라, 지긋지긋한 땅 구석, '국개'라 불려도 싼 사람들.
진절머리나는 틈바구니가 뭐가 좋다고,
모든걸 훌훌 털어버리고  이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동네에 있었다.

우리동네. 우리집, 우리 식구, 동네파, 친구들, 연희교회, 연세대, 사러가 근처, 꾸러기 놀이터.... 일억만금을 준다해도, 바꾸진 않을테다. 일억만금 값나가는 보물이 바로, 내가 사는 이 나라에 있었다. (아무도 일억만금 주고 사진 않을테지만 ㅎㅎㅎ)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야."
어린왕자가 말했었나, 여우가 말했었나?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나는 사막같은 세상 속,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우물' 하나를 숨겨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욕할 것 투성이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누구나 각자의 마음 속 우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백명의 마음속에는 백 개의 우물이. 천 명의 마음속엔 천 개의 우물이.

그래서 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모래투성이 사막일지라도,
 정녕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사는 이 못난 나라도 진정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생각해봤다. 
'대한민국~'까지야 못외치겠지만,
그래도 조금, 응원할 마음이 생긴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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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권태기 부부사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만취한 '민국이'와 '나'.



남 앞에서 우는건 참 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울음같은 짜증을 쥐어짜고 내 모든 속내를 친구한테 토로하다보면 그것만큼 시원한 일도 없다. (물론 '그걸'로 일이 해결된다거나 부조리가 없어진다던지 마음속에 얼룩은 가시지 않겠지만)

그냥 '이 답답함 호소할 데가 있는게 어디야' 그 위안이 참 큰 거 같다

요즘 난 내가 참 병신같다고 비굴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도 알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운다. 1리터 가득 찬 눈물 중에 아직 300미리 밖에 못내놨다 아직 700미리가 남았어.  주말엔 졸 슬픈 영화를 보고 마저 쥐어 짜내야겠다. (아마도 또.. '우리집 개 이야기'가 되겠지)

만두랑 맥주 사서 간 곳이 연희교회였는데,
교회에서 음주라니 이렇게 불손해도 되나 싶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가 얼마나 지금 졸불행한지 알고 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줄꺼라 생각된다

연희교회 등나무 아래서 버드나무를 봤는데
그러고 보니 나 대학 부총 떨어지고 과장 못구해서 쩔쩔 매고 있을 때 혼자 찾아와서 엉엉 울었던데가 여기였다.

불행도 돌고 돌고 인생도 돌고 도는구나.
그나마 내가 우리동네에서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더욱더 불행했을지 모를 일.
앞으로 몇번 더 등나무 아래서 울분을 토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토할꺼 다 토하니까 기분이 가벼워졌다 (종이 2-3장 정도?)

그냥 그때 생각이 나니까,
나 대학교 3학년 겨울. 그때도 정말 하늘이 무너진거 같았지.

캔맥주 갯수도 딱 적당했고 마지막엔 아몬드 빼빼로를 먹어서 기분좋아졌고
엄마한테 다 때려칠꺼라고 진짜 더 못버티겠다고 징징대던게 한참 미안했고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몇번을 더 울게 될지 모르겠지만
날짜 박아놓고 엑스표 치면서 하루하루 버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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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에 20년 이상 살다 보면 그 동네 풍경이 된다.

며칠전 문득 내린 결론이다. 매해 유입되는 인구와 다시금 밖으로 나가는 인구(지방에서 유학하러 왔다가 취직과 동시에 밖으로 떠나는 Y대생)가 유달리 많은 동네.
 
출근 할 때면 밀물 밀려오듯 등교하는 대학생 사이에서 혼자만 역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흡사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된 기분이다. 분식집 분식집 하숙집 하숙집 치킨집 분식집 하숙집 원룸 하숙집.... 그래도 그 사이 참 변하지 않는 풍경들이 너무 많아서 낯설지 않은 건 다행이고.

우리집 1층에서 삼삼오오 앉아 아침밥 먹는 하숙생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열살 이상 차이나는 오빠 언니들이었고 어느 순간 인사 나누긴 다소 어색한 또래들이었고 이제는 파릇한 새내기들로 바뀌어 채워져 있다. 요즘 다시 어린 친구들과는 인사를 나누는데 매번 너무 자주 바뀌는 얼굴들이라 못 알아볼 때가 부지기수다.

늦은 밤 퇴근길 무심코 탄 작은 4번 마을 버스.
오래간만에 오줌싸개랑 인생한탄하면서 전화통화하고 있는데 그 작은 봉고차에 날 아는 얼얼굴이 셋이나 앉아 있다. 중학교 옆반 친구, 중학교 같은 반 친구, 교회오빠. 카드 단말기 찍는데 한명 그 뒷줄 뒷줄에 한명 맨 뒷자리에 한명. 셋이 나란히 앉아 있다. 어디 앉기도 뭐하고 누구부터 인사하기도 어색한 상황. 아이고 지겨워. 근데 실은 또 반가워.

새벽엔 만두에게 문자가 왔다. 한잔 하자길래 나에게 연애거는거냐고 한마디 해주니까 다시 냉랭한 문자가 돌아온다. 결국 실실대면서 자리에 누웠다. 진짜 다행인 건 나만 이 동네 붙박이가 아니라는 거다. 그게 참 다행이다.

십년 후 이십 년 후 지금 연희동에 유입됐다 밖으로 나갈 대딩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저 하숙집 아직 여깄네, 저여자는 아직도 사네'라고 진저리 칠 정도로, 사라지면 어색하고 쓸쓸한 빈자리로 남도록. 나는 우리 동네의 <오랜 풍경>으로 남고 싶다.
 



우리동네

20세기 소녀 2008. 8. 12. 16:32

연희동

나는 연희동에서 자랄 수 있었음을, 아직도 살고 있음을 감사한다. 여섯살 겨울. 둘째 고모부의 차를 타고 건너 온 이 동네에서 스무해하고도 일년을 보냈다.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고층건물. 천편일률적으로 생겨 먹은 아파트 단지. 호화롭지만 갑갑하고 복잡한 주상복합 아파트들과는 달리, 단층 혹은 이층 건물로 이루어진 이 동네에서는 아직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하늘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전'모씨와 '노'모씨는 죽음으로 역사에 사죄해야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존해 있기에, 연희동이 '재개발지구'의 혜택을 입지 않는 건, 진정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변화만을 선택하는 이 사회는 숨이 막힌다. 넌더리가 난다. 언제나 '개발'이라는 글자 아래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허용하고 묵인하고 침묵하는 <서울>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두렵운 곳인가. 그런 서울에 살고 있음에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것과 관련없는 동네였기에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

그래서 내겐 연희동이 그렇다. 누구에겐 숭례문이 그랬다지만, '연희동'은 언제나 내게 고정된 상수였고, 내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천만이나 된다. 서울은 '내 고향'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겠지. 그래서 고향을 꼽자면, 스무해 하고도 일년. 느리게 변하고 변한듯 변하지 않는 '연희동'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돌아가고 싶고, 되찾고 싶을 '연희동'이. 앞으로도 살고 싶고, 다른 곳에서 산다 생각하면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 이 동네가 '진짜 내 고향'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