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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언니에게

20세기 소녀 2009. 10. 9. 17:33

언니, 저 어제 우연히 서랍을 뒤질일이 있었어요.
근데 우연히 딱 하나 고른 일기장이 그 겨울 일기장이지 뭐예요.

페이지 넘겨보는데 정말 3분의 1은 죄다 언니 이야기.
그 겨울 저의 최대 인생 화두는, 역시 언니와의 이별이었나봐요.
가을에는 언니가 사범대 애들한테 잘해줘서 질투난다, 동아리 동기가 언니한테 이쁨 받는다. 언니 있는거 알면서 일부러 인사 안했다 시시콜콜 툴툴대며 가을을 나더니, 결국 겨울엔 반성이 한가득이더라고요. 이럴줄 알았으면 언니 말 잘들을걸 속썩이지 말 걸 간부수련회 따라가서 사진도 많이 찍을걸. 이런저런 후회와 푸념이 가득한 일기였어요.

난 언니랑 헤어지는 마지막 데이트(데이트가 명칭이었는지, 스타와의 만남이 명칭이었는지 이젠 기억이 잘 안나네요)날을 기점으로 그 이박삼일 전부터 울어제낀 정말 별난, 이상한 후배였으니까. 그렇게 언니를 좋아하고 따랐으면서 좋아한다 내색 한번 제대로 안하고 관심 끌려고 인사 마저 안하는,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도 아니고 참 유치하죠? 근데 그게 바로 '저' 니까 별수 없죠 뭐.

언니, 전 작년겨울에서 올해 넘어가는 그 겨울이 신경숙 <외딴방>을 읽었거든요.
나 말이죠, 진짜 읽는 내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요.
그 두꺼운 한권 다 읽는데 정말 그렇게, 간절히 언니가 보고 싶을 수가 없었어요.  
내게 글재주가 있다면, 그 시절 곰언니게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나를 얼마나 변화하게 만들어준 사람인지, 내게 제일 처음으로 손꼽히는 인생 영웅은 왜 언니 하나 뿐인지, 구구절절 말할 수 있을텐데 말이에요. 에필로그는 '그리고, 그럼에도, 결국 변하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못된 후배인 나'로 씁쓸하게 완성해야 하지만 말이죠.

일기장엔 왜 이렇게 사람들과 다 헤어지며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새벽에 쓴게 분명한) 주사 비슷한 일기도 있었는데, 내가 이런 소리까지 했었나 하면서 소리내서 웃었어요. 푸하하 거리면서. 지금보다 5년이나 어렸으면서 이런 소리를 하다니. 아.. 쓰면서도 창피해요.


전 아직도 언니가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길 뜻한바대로 용기 있게 살아가길 기도해요.
정말 많이 챙피하고, 다시 언니 앞에 서지 못할 만큼 이기적인 후배지만
행여 다시 볼 수 있는 날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기 위해서.
그래도 조금씩이지만 열심히 살아요.
곰언니는 '언제까지라도' 결과가 아닌 과정의 나를 사랑해주고 인정해 줄 선배임을 아니까요.


마지막 덮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페이지에 나랑 동기인 수진이가 해준말을 적어 놨더라고요.
아 놔.. 너무 뻔해. 눈에 선한거 있죠. 나 이거 쓰면서도 미친여자처럼 펑펑 울면서 일기 썼을껄요.

"야 그래도 곰언니 가기전에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우리 승* 잘부탁해' 였어"

그리고 진짜 웃긴게, 고작 그 한줄 다시 읽고 말예요....
그 한마디가 너무 좋고 다시 봐도 너무 좋아서.
'흐윽' 외마디 터뜨리며 왈칵 눈물을 쏟을 만큼.

전 아직도 언니가 너무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