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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위로.

소소한 수다 2009. 8. 24. 12:43

27기 쭈꾸미들은 이번주 수요일 한반도 남단 섬으로 떠날 예정. 난 목요일 금요일 주말 내 사무실 죽치고 있을게 확정. 어제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 간 코스프레라도 해야겠다 결심했다. 만약 제주도 가면 해변에서 내리 쓰고 다녀야지 맘 먹었던 밀짚모자(코디용으로 나온게 아니고 말 그대로 밀짚모자. 대학 3학년 농활때 썼었고, 아빠가 할아버지 묘 잔디 정리할때 옥상 청소할때 애용하는 모자;;;)를 쓰고 연희동을 배회했다.
 동생이 쪽팔려서 살 수 없다며, 언니가 이 집 딸인거 22년째 동네 사람들 다 아는데 뭐하는 짓이냐고 쏴댔지만 무시했다. 내 불행의 강도는 너무나 단단하고 견고해서 그 어떤 태클도 가볍게 반사 상태다. 자전거 타고 가는 내 뒷모습을 보더니 노무현 대통령 코스프레냐고 비이냥 대는 소리를 한마디 더 던졌지만 상관없다. 노통이 봉하마을 사랑하듯 나는 우리 동네를 사랑해. 백번도 더 외칠 수 있다.

밀짚모자 끈 질끈 동여매고 바람에 날릴것을 대비했다. 실제 내 턱과 살이 만든 턱을 적절하게 구분지어주더라. 스테레오 도착 전에 질겅이면서 씹은 껌소리랑 자전거 체인 감기는 소리가 절묘하게 맞아들어가서 신났다. 한참 페달을 밟으니 구름 한점 없는 여름 끝자락.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연희동. 줄지어 있는 이층집들이 새삼 감동이다.
여섯살까지 가리봉동에 살았었다. 그때 우리집은 일층 후미진 집이었는데 이층양옥집인 외갓집이 그렇게 좋아보일 수 없었다. 나무 목조로 된 평범한 북가좌동 이층집은 어린 꼬꼬마의 눈에 보기엔 서양동화책속 집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한층 더 올라가면 2층이 있다는 사실과 정원에 밟고 디딜 나무가 있다는 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여유로운 집' '사람살기 행복한 집'하면 나는 아직도 정원이 딸린 이층양옥집을 떠올린다. 끝없이 줄지어져 있는 연희동 골목길. 집들 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겠지. 그냥 그 장면들이 소소하게 그려져서, 그런걸 떠올리면 세상은 참 동화같고 살만하구나 그런게 느껴져서 연희동을 떠나기가 싫다.

스테레오에서 한잔 가득한 더치커피를 빨아주시고 만두가 도착할 때까지 책을 읽었다. 만두 공연에도 못간 나는 그네를 근 2주 만에 만난다. 오징어 김밥을 사가지고 동우물 놀이터로 갔다. 벤치에 누웠는데 시야에 나뭇가지 하늘만 보여서. 예전같으면 끈적이고 짜증날것 같은 더위. 바람 부니까 서늘하게 땀이 씻기는 느낌이 들어서 마냥 좋았다.

집에 와서 만두랑 <푸른눈의 평양시민>을 봤다 다큐는 전달하는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수다 떨면서는 못보겠다 싶었다. 여백이 많은 <석류의 빛깔>같은 영화를 같이 봤어야 하는데 말이지. 만두랑 무한도전 <서바이벌 동고동락> 1편이랑 2편을 봤다. 아 나 캠핑 가고 싶어. ㅠㅠ 바다에서 구명조끼 안입고 수영도 잘할자신 있는데 말이지. 캠핑장 치고 야외에서 밥하는 것도 자신있다규! 무한도전을 보고 나니까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노랗게 얼굴이 뜬 만두를 끌고 결국 연대 운동장까지 갔다. 씻고 자겠다는 주기자를 불러내고 한참 신세 한탄하니까 우리 제법 그럴싸한 직업군인데(?)라는 결론이;;;; 한명은 뮤지션 한명은 방송인 한명은 언론이라규. 한참 웃었다. 그럴싸한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배고프고 곤궁한걸까?

인조 잔디를 심은 연대 운동장은 미시간에 있는 커다란 대학 운동장 못지 않다. 돗자리 가져와서 나중에 치킨먹어도 괜찮겠다. 사람이 빠질 새벽 무렵 트랙따라 동네파 자전거 릴레이를 해도 재밌겠다. 인조잔디 덕분에 넘어져도 안아프고 풀물도 안들거라고.

나는 제주도를 못가서, 심장이 없어졌지만(ㅠㅠ) 어제 하루의 여유로 기력을 차릴 정도는 됐다. 쉬는 일요일 나름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곳에서 함께 했으니 완벽한 동화는 안되지만 청소년 성장 소설 정도의 행복은 갖춰진 셈이라고,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