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가는 길, 만두를 전화로 붙잡았다.
살을 빼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간간히 운동중이었지만, 어젠 정말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해야할 말이 무척 많았지만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껄끄럽게 토해내지 못하고 한번에 다 쏟아낼 것 같았다. 한꺼번에 쏟으면 식도가 타버릴지 몰라, 주의요망이다.

나는 할말이 참 많았고.
그 할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나름 살만한 인생이구나 싶어졌다.
유전자조작 옥수수로 만든 치즈볼을 끊기란 헤로인 중독자가 마약 끊기보다 더 어려운 듯.
결국 두바구니 내가 다 먹어 치웠다. 한잔 더 마시고 싶지만 내일을 위해서 참기로 했다.

연남동 이안을 지나, 둘러 둘러 집으로 오는 길.
럭비티 한벌 입고 오들오들 떨면서 어느새 목도리를 둘러야하는 계절이 왔음을 실감했다.
작년 잃어버린 목도리는 대학교 4학년 과동기들과 스터디 하던 도중 샀던 목도리. 추억이 있다면 꽤 담겨 있던 물건인데. 몇번을 잃어버려도 내 손에 다시 들어오길래,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을거라 방심했었다.
올해 다시 목도리를 사겠지만 5년간 두르고 다닌 그 목도리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

대신할 것들로 채워지면 나중에 너무 서글퍼 질지 모른다.
세상모든 것들을 '처음'과 '새것'으로 다 안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소중했던 것들이 나중에도 소중한 것들로 내 주변에 남아있길.

스물여덟, 조금씩 편해지고 익숙한 만큼 변하지 않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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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이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되겠어?' 하는 패배감이 어딘가 자꾸만 꾸물꾸물 새어나온다.
배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미 배워버렸다. 체념하는 법을.
나는 부정적이고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는 우울한 아이가 돼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돌규에게 정성스런 문자가 와 있었다.
언제나 나의 컴퓨터를 고쳐주며 27기 남편감 1등으로 자리매김한 돌규는 언제나 마음이 곱다ㅋㅋ 전에도 몇번이나 돌규는 내게 이야기했다. 내가 다시 교회 나올 때까지 기다릴거라고.
교회가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생각하는 '예수'와 일치점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교회를 박차고 나오지 않았겠지. 하지만 한국교회는 (절대) 변하지 않을거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영영 교회를 찾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언젠가 상처 받고 위로 받고 싶을 때 즈음해서 교회를 다시 찾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과는 뻔하다. 아마도 그 선택을 후회하고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꺼다. 내가 교회를 떠나 온 것은 위로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을 떠날 만큼 커다란 무언가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본질이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체력이 떨어졌다.
10미터 뛰는데 헉헉대는 내 자신을 보면서 이젠 정말 몸을 움직일 때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 환승 되면서 지하철까지 걸어다닐 생각을 못했는데 마음을 바꿨다. 퇴근길 신촌을 가로질러 걸어올 생각은 없지만 조금만 지나면 한적한 길이 나오는 홍대나 이대후문길을 천천히 걸어올 생각은 있다.
여튼 어제는 그 연장선상으로 내 '브로콜리'를 심혈을 기울여 닦고 연대를 관통해 북문 쪽으로 나와서 서태지 옛 주택을 지나 연희동을 한참 달렸다. 구름에서 빵을 사다 태일이를 만났고 스테레오에서는 드롭 500미리 간장통을 두개 샀다. 하나는 내꺼. 다른 하나는 블록버스터 공연 준비하느라 졸 바쁘게 보내고 있는 심신이 피곤한 만두 꺼. (나 마니또때도 그랬지만, 최근 느끼는건데 '연애의 때'가 온거 같다. 챙길 사람이 동네 친구들 밖에 없다는 게 때론 너무 슬프다 아놔 ㅋㅋ)
집으로 갈까 하다가 동네 놀이터에서 책 읽다가 돌아가야지 하는 결심이 선 순간 애들한테 전화왔다. 우리집으로 오겠단다 주저말고 승낙했다.

놀러온 쩡아와 금댕이랑 놀다가
내 책장에 <에밀>이 꽂혀 있는 걸 알았다. 나 교육학과도 아니었고 사범대 다전공을 한 것도 아닌데 대체 이 책을 언제 산거지? (내가 들은 건 향가론과 현대문학사 수업 뿐이었다고)
글씨 포인트 9 안되고 장평 좁고 줄간격도 엄청 좁은데, 번역이 너무 잘됐다 ㅠ_ㅠ b
쏙쏙 머리에 들어와 박히는데 아 놔 200년도 더 된 이 아저씨 왜 이렇게 논리적이니? 뭐 이렇게 설득적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가지 주제를 향해 푸는 '썰'이라는 걸 알겠는데 현란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전개. 너무 타당한 근거. 너무나 잘 정돈돼 가지런히 놓여 있는 논조. 그러면서도 여자를 무시하는 졸라 꼰대스러운 발언.ㅋㅋㅋ 여튼 한번은 다 읽어주리란 결심이 섰다. 잠자기 전 끄적 끄적 읽다 말고 침대 옆 테이블에 던져 놓고 나왔다. (자고로 책은 가까운 데 놓여 있어야 자주 꺼내 읽는 법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조금씩 일찍 당겨보겠다.
결심을 지키기 위해 11시 전에 침대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