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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은 가고

소소한 수다 2010. 8. 29. 22:05
그때는 참 좋다 생각했는데, 지금보면 그만큼 좋지 않은 것들이 있다.
굳이 꼽자면 왕가위의 영화나 박희정의 만화. 부활의 노래. 몇몇것들이 그렇다.

시대가 지났기에 빛바래는 것은 어쩔수 없다 치지만
그건 단순히 시간이 흘러서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좀 더 세련되고 화려한 것들이 등장해서도 아니다.  

나는 아직도 강경옥의 만화에 공감하고 감탄하며
십대시절 만났던 90년대 가요를 MP3에 빠트리지 않고
그때봤던 최고로 꼽던 영화들을 아직도 최고로 꼽는다.
그건 분명히 별개의 문제였다.

몇 년 전 왕가위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본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무엇이 문제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다. 
동양과 서양의 거리적 차이는 있었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코트자락을 휘날리고 고독했는데, 어린시절 '너무 멋있어, 너무 낭만적이야'라고 말하던 그 장면에 대해서 100분의 1, 아니 100만분의 1도 공감할 수 없었다.

20대를 꿈꾸고 기대할 때는 그것이 나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다.
가능성은 포용의 문을 열었고 나는 이해하고 공감하고 한편으론 기다리고 희망했다.  

막상 내가 겪어본 '어른'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 꿈과 같은 '낭만'이 자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곳에 '현실'이 서 있었다.

꿈에 대한 고민보다는 영어시험 하나 본 적 없는 내가 어디에 취직할 수 있을까에 머리를 쥐어 싸맸고, 어떻게 하면 무얼하면 쉽게 돈벌고 먹고 살까를 매일같이 궁리했으며, 출근하기 싫다는 고민은 누구나가 그렇다며 간신히 스스로를 다독였다.

현실은 너무나 또렷하고 구체적이었고, 구체적이고 확실할 수록 매력은 반감됐다.
꿈꾸고 상상할 자유마저 빼앗아 가니까. 낭만은 희망할 새도 없이 더더욱 멀어져갔다.

아무리 멋진 야경에 비싼 코트를 걸쳐 입고 돌아다닌들,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 같이 일하는 동료가 밉다거나, 일만 죽도록 시키는 상사가 짜증난다거나 하는 고민이라면 그 고민은 결코 낭만적일 수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 사랑과 만난 순간 깨져버린 회중시계를 들고 아메리카 사막 한 가운데서 의자를 놓고 앉아서 내 키만한 해바라기를 드는 일은 없다.
한참동안 찾아가지 않던 죽어버린 옛애인의 무덤에 찾아가는 일도...있을 턱이 없다.

여튼 왕가위의 영화도, 박희정의 만화도, 부활의 노래도.
나에겐 모두 거짓말이 됐다.
그 감정들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은 묘지명에 이 한마디 남겼다는데,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것
나의 현실은 이렇다.
(십대때 꿈꾸던) 낭만은 가고, (엄혹한) 현실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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