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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기억

20세기 소녀 2009. 3. 11. 15:48

프롤로그.

옆구리가 결린건 20일 정도부터였다. 정확하게 골반 아래 내장이 쑤셨다. 근육통 생긴듯이 욱씬거리는데 자는게 더 소중했다. 그냥 요즘 편히 잠을 못자서 그렇거니, 내가 요즘 변을 잘 못봐서 그러나 싶었다. 죽을 만큼 아픈건 아니니까 병원 가는걸 차일 피일 미뤘다.

월요일에 도저히 못참고 그냥 근처 내과로 향했다. 의사가 딱 잘라 진단했다.

1. 대상포진.
2. 배에 가스차고
3. 허리디스크가 골반으로 내려온다.

난 그말 믿고 지어준 약만 먹었을 뿐인데....

약봉지엔  타이레놀이 한알씩 들어 있었고 그 덕에 통증완화가 되어 나는 4일이란 시간 동안 병원을 찾지 않았다.
에라이 이 돌팔이 의사야! 아무래 내과라도 그렇지 내가 오른쪽 골반 아래 내장이 아프다고 말했냐? 안했냐?
4일 만에 고통을 못참고 찾은 병원에서는 맹장염 같다고 동네 외과를 찾으란다. 간신히 택시 타고 동네로 와보니 복막염으로 번진 것은 물론 맹장이 터진지는 일주일이 지났단다. 터지다 못해 아예 썩어 있단 판정까지 받았다.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을 찾지 않았냐며 냉대하던 의사의 싸늘한 눈을 잊을 수가 없다.


하나. '맹장 터진 나'
이렇게 맹장이 터지고 보니 그간 했던 많은 일에 수식어가 붙는다.

맹장 터진 채 새벽 출근해서 야근하고 퇴근하던 나.
맹장 터진 채 가스 뺀다고 허리 운동 하던 나
맹장 터진 채 6kg짜리 디스크 체어를 나르던 나
결국 나는 민감하고 예민하지 못한건 큰 죄라고 욕 먹고 있다.


둘. 같은 방 지연이

동신병원 327호실. 같은 방 쓰는 동기(?)는 열한살 먹은 꼬마 지연이. 게다가 우리는 연희초등학교 선후배 사이. 게다가 함께 구준표에 열광할 수 있는 소녀의 순정까지 둘 다 지니고 있었다.
이제 새학기 4학년에 올라가는 지연이는 교통사고 나서 학교 안가는게 신난다고 했다.

"지연아, 학교 안가니까 신나냐?"
"네"
"언니도 회사 안가서 신나.
"근데 지연아"
"네?"
"회사 안가는건 학교 안가는 것 보다 두배는 신나."

승부를 내겠다는 건 아니지만 여튼, 내가 이겼다.


셋. 떼어냄의 아픔
수술 하고 난 뒤 '새 내장'이 생겼다. 고무 호스로 연결된 그 주머니에는 나의 혈액이 들어 있으므로 내 신체의 일부로 여기기로 했다. (비록 하루에 한번 갈아내긴 하지만).
문제는 문병온 김형균과 유맹근이었다.
"내가 여기 입원해봐서 아는데 (김형균은 고1 때 급속히 자라는 키가 원인으로 기흉에 걸렸었다) 너, 이거 잡아 뺀다. 호스를 잡고 그냥 예고 없이 쑥 빼버려. 너 호스랑 연결 된 내장과 전체 부속품이 튀어나오는 고통을 느낄걸."

"뻥치시네."

냉소했지만 실은 무서웠다.
그러더니 김형균은 친절히 간호사를 붙잡고 자신이 주장하는 호스 떼는 법의 진위여부를 재확인 시켰다.
정말? 정말 그렇게 확 잡아 빼? 내장튀어나오면 어쩌라고? 배에 구멍 나듯이 잡아 빼는게 진짜냐고?!?!? 피는 안나? 내장이 같이 빠지면 어째!?!?!?

다음 날 온갖 겁을 집어먹고 외과로 내려가서 호스를 빼는데, 안아프다. 그냥 위장이 울컥하더니 무사히 제자리 찾는다.

그냥 호스 잡아빼던 의사가 웃었을 뿐이다. '신**씨, 이것도 안아파요?' 라며 껄껄.
정말 아프지 않았다. 그냥 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쉬움이 남을 뿐.


넷. 항생제의 공포

병원에서 제일 견딜 수 없었던건 링겔 뽑은 자리 비비는 바람에 혈관이 터진 것도 아니었고, 소변볼 때마다 엄습하던 내장을 쥐어짜는 고통도 아니었고, 3일 금식도 아니었다. 노란색 항생제의 공포!
슈동 놈들 여섯명 침대 근처에 옹기 종기 앉아 있는데 간호사 언니가 상냥하게 다가와 노란색 항생제를 투입하면 혈관을 따라 할퀴는 고통에 웃을 수가 없었다. 믿어줄지 모르지만 하이킥 보면서 웃는 그녀들 속에서 나는 정녕 고독을 느꼈다.

'인간은 모두 혼자인가?'
'개인의 고통은 오롯이 개인에게 주어질 수 밖에 없는가?'

아픈 사람은 '혼자' 아프니까, 외로울수 밖에 없고, 그래서 비뚤어지고 냉랭해지는 것 같다. 난 자주 안아파서 참 다행.


다섯. 병원에서 되찾은 꽃사슴
고등학교 때 난 산혜선을 좋아했다. 그녀의 천진난만함을 가장한 뼈 있는 말투. 따라 잡을 수 없는 찰나적인 재치. 연북중학교 시절에도 신혜선 못지 않게 내가 사랑한 애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연희동 꽃사슴 박*영이었다.
수술 끝난 다음 날 간신히 앉아서 책읽고 있는데 열린 병문 사이로 누군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치다 병실에 새겨진 '신**' 세글자에 '에이 설마'라고 생각했댄다. 근데 열린 문큼 사이로 너무 익숙하고 커다란 덩치가 앉아 있었댄다. 그게 바로 나.

'으왁 박*영!!!!!'
"엄마가 말하던 건너편 방 맹장터진지 일주일 지나 입원한 인간'이 너였냐?"

병원에서 벌써 유명해졌나 본데, 그게 니 중학교 동창 맞아. 그게 바로 나지.
대답은 필요 없었다.  

금식 중인 나를 위해 5가지 맛 자일리톨을 사다준 것도 그녀였고, 인디아책을 빌려준 것도 그녀였고, 어머니가 퇴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방문해 딸기를 사다 앵긴 것도 그녀였다.

나는 그녀를 연희동 아닌 서대문구 꽃사슴으로 부르기로 했다.
서대문구 꽃사슴! 받기만 해서 미안해. 너만 괜찮다면 언제든 너에게 떡볶기를 쏘게 해줘.


일곱. 무한도전의 잔학성

못 먹는 것 보다 더 한 고통은 웃을 수 없는 고통이다. 수술한지 하루 밖에 안된 배를 붙잡고 무한도전을 보는건 빨갛게 달궈진 쇠철판 위를 맨발로 걷는 것과 비슷한 강도의 고통이었다.
자막 하나하나 왜 그리 웃기던지. 입술을 깨물다 못해 '푸!'하고 침을 분무기처럼 뿜어 대기를 두번. 결국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근데 들리는 음향만으로도 웃길건 또 뭐람.

무한도전, 무시무시한 프로그램이다. 맹장수술한 환자는 보지 말라고 경고해달라.


여덟, 고마운 사람들
엄마. 너무 수고 많았고 수발드느라 욕봤어. 하지만 병원에서 하룻밤도 잠 안잔건 평생 기억할꺼야. ㅋㅋ
영진아. 이틀이나 병원서 자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의사가 진찰하러 왔을 땐 좀 일어나 앉지 그랬니? 의사가 널 냉대한건 아니야. 너같이 자느라 아침이 오는 줄 모르는 보호자도 대다수라고.
아빠. 아빤 나 수술하는 날 잠시 있다 갔지? 그리고 아무리 기억하려해도 기억에.... 없더라 ㅋㅋㅋㅋ
빡세, 윤호오라버니. 와주셔서 감사. 내가 제일 아플 때 와서 정말 제대로 대접도 못했네. 비록 내가 먹지는 못했지만 내 대신 식구들이 딸기 잘 먹었대.
지은언니. 먼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구요. 이렇게 챙겨줘서 고마워요. 전 언제부터 마실 모임에 나갈 수 있을까요?  ㅋㅋ
선화. 과자 맛있는 것만 골라 사와서 또 다른 고통이었다구. 우리 조만간 만나. 인자기 관해서 할말이 많아. 귀여워 미치겠다고.
은실. 오랜만에 얼굴봐서 좋구나. 비행 다니는 친구는 중간 중간 휴일이 있어서 참 좋아. 다음에 그분과 함께 보경이도 함께 봐. 나는 널 괴롭힐테야.
오줌싸개. 노고산 함께가자. 언니 이제 쇠도 씹어 먹어. 니가 사온 떡볶기 맛있었어. 날 '아내의 유혹'의 세계에 빠트리다니.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짓이야!!! ㅋㅋ
뒷걸음질. 먼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 학교 수업 마치고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우린 멀리 떨어져 살아서 만나려면 참 먼길 와야하네. 다음엔 내가 동네로 갈께. 맛있는거 먹자. 과일통조림 잘 맛있더라.
뚱토. 비오는 날 오느라 수고 했구나. 밥을 많이 먹어서 네 떡볶기를 반기지 못했어. 마음에 담아두지 마 ㅋㅋ
선주. 화환 대신 보낸 쇼콜라 케잌은 평생 잊지 못할껴. 맛있는건 둘째치고 덕분에 빠진살 다시 쪘어. 가끔 경민이 뿡뿡이가 되줄테니 꾹참게나.
27기들. 유맹근이가 사온 던킨도너츠를 열심히 비우던 홍얼을 잊지 못하겠다. 미식거리고 아플때 와서 많이 반겨주지도 못했구려.
미디어 ** 팀원들. 그저 죄송할 뿐. 미련한게 죄지, 저 없는 새 제 일처리하러 분주했을 팀사람들 생각하면 그냥 민망할 따름이예요.
유맹근&김*균. 니들이 내게 준 호스의 공포는 무사히 이겼다. 곧 맥주 함께해. 그나저나 뒷침대에 이쁜 여대생 있는건 언제 봤니?
나의사랑우리슈동. 하루 빼고 나타나준 쩡아, 벨기에 다녀온 이후 매일 와준 만두. 최소 2번 이상의 출석률을 보여준 전 멤버들! 수고 많았어. 때때로 아프고 피곤할 때 냉대해서 미안해. 작은 서랍속에 넣어 두는건 좋은데 너무 자주 열지는 말자. 너네 없으면 그 긴시간 어떻게 버텼겠니? 다양한 방문과 함께 하던 티비시청... 덕분에 잊지 못할 입원기간이었어.


아홉. 읽은 책들.

책 읽으려면 지금이 기회인거 같아서 사뒀다 못읽은 책들, 얻어 와서 안 읽은 책들 해치웠다. <다섯째 아이><인디아><내 친구 엘링을 소개합니다><자기만의 방><안개><3기니><앗 뜨거워 HEAT!>
런던 스케치는 아직 읽다 말았네. 만화도 열심히 다시 봤는데 다시 읽은 쿨핫은 아직까지 정말 대단한 만화다. 얼마전에 구입한 석정연 만화책도 다시 읽었다. 열왕대전기랑 잔혹한신이 지배한다는 정말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 충분히 괴로워지는 찐한 다크 초코 같은 만화로구나. 다시 되새김질!


열. 안녕 병원.
회사 복귀 하고 나니까 언제 병원에 있었는지 꿈같이 느껴진다. 현실감도 없고 내가 그렇게 긴 시간 있었는지 실감도 안나고. 병원에서의 하루하루는 비슷하고 똑같이 닮아 있었기 때문에 9일동안의 기억이 하루라 해도 보냈다해도 믿겠다.그냥 병원의 기억은 영역 지정해서 잘라내고 다시 출근하는 아침부터의 기억을 'ctrl+E'해서 붙여 넣은 것 같다.

꿈같은 휴식을 마치고 나는 다시 제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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