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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5 비오는 버스 드라이브


뎡이 웨딩 촬영에 입을 티셔츠를 인쇄하러 동대문에 갔었다.
티셔츠 인쇄해줄 아저씨와 다섯번의 전화통화 끝에 무사히(간신히)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사무실로 출근하기 위해 검색으로 찾아 놓은 261번을 버스를 탔다. 
내 손에는 얼음통에 넣어온 곰다방 더치커피가 있었으며 이번주 한겨레21과 시사인이 들려 있었다. 네이버 추정 58분의 소요시간도 두렵지 않았다.

한참 가고 있는데 하늘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소낙비가 아무리 세차다 해도 국회의사당 부터 뛰면 되겠지 싶어서 시크하게 무시했다.
지금돌이켜보면, 버스 안내 방송에서 '외대'를 외쳤을 때 좀 이상하다 여겼었어야 했다.  

한참 가고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다. 월계동;;; 여긴 어딘가요? 성북역은 또 뭔가요? 한예종 앞은 왜 지나치나요? 광운대는 갑자기 왜 나오나요? 버스 탄지 약 오십분 만에 나는 버스 노선을 확인하기 위해 엉덩이를 똈다. 노선을 확인하자 마자 내리는 벨을 눌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굵은 빗방울이 새까만 콘크리트 바닥을 후려치는 화요일 오전.
낯선 동네에서 우산도 없이 261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버스지만 이번엔 반대 방향이었다.
일상탈출! 비오는 풍경. 익숙한 듯 새로운 낯선 동네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버스에 다시 타고 비내리는 풍경을 한참을 봤다.
광운대도 지나고 한예종도 지나고, 좀 지나면 외대가 나오겠구나. 학교가 많은 동네구나 싶었다. 우리 동네 같겠다. 이 동네에도 이 동네를 '고향'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골목마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눌 친구들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2차선 도로는 무척이나 좁았고 낮은 건물 아파트 상가들의 소소함이 마음에 들었다.
분명 이 동네를 즐길줄 아는 사람이 이 동네에 살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갑작스런 비 때문인지 버스에 타는 사람들의 손엔 우산이 없었다.
젖은 옷의 물기를 털어내기에 바빴다. 그들이 털어내는 물줄기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을만큼, 혼자 앉아 에어콘 바람을 쌀쌀하게 느끼지 않을 만큼, 버스는 딱 그만큼 한산했다.

외대가 나왔다.
이 동네에서 추억이라곤 곰언니와 파전에 동동주를 먹었던 기억밖에 없다.
갑자기 곰언니 생각이 나면서 울컥해졌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창밖에는 추적 추적 비가 오고 있었고, 난 완전 쌩뚱맞은 낯선 동네에 있었으며, 버스 맨 앞자리 울어도 아무도 모를 위치였고, 반이상 마신 곰다방 커피 덕에 내 감성은 충분히 말랑말랑해졌으며, 내 엠피쓰리에서는 옛 회상과 감상을 리플레이시켜줄 음악이 줄창 흘러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이다.

도망쳐 나온 사람은 변명할 거리밖에 못찾는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부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떠오린 장면은 대학교 3학년 끝무렵. 과학생회장으로 온 몸과 마음이 너덜거릴 때였다.
그 당시 나를 위한 변명을 시작하자면
내가 속한 단대 학생회 사람들과의 싸움이 지긋지긋했고, 사람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을 때였다. 성공이라기 보단 실패가 주는 열패감이 머리 끝까지 차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나서고 싶지 않았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건데? 왜 내가 해야하는건데?
부총 후보 나가라고 설득하던 선배 언니들 전화 피하던 시절이었고 강의 끝나면 사람들 눈에 띌까 도망치기 바쁠때였다.

학교를 정리하고 사라진 곰언니가 나를 만나러 온건 그 때였다. 꼭 1년만이었다.
언니는 나에게 그 어떤 말도 묻지 않았다.

'앙증, 많이 힘들구나.'

차라리 왜 그렇게 비겁하게 숨기만 하냐고 추궁했다면,
그따위로 도망다니는 후배 나는 둔적 없다고 매몰차게 말했더라면,
너밖에 나갈 사람 없으니까 니가 나가야한다고 강요했다면.

아마도 나는 선거를 나가지 않았겠지.

그냥 그 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1년간 입었던 상처를 고름 터뜨리듯, 엉엉 우는 내 곁에
말 없이 있어준 언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그 고마운 기억이 쓸데 없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
아마도 '이상한데서 잘운다'의 운세를 타고 난건 서눈물이 아니라 바로 '나'인듯.

다시 원점 동대문에 도착했을 땐 하늘이 말끔하게 개어 있었다.
버스 바깥 곳곳 처치곤란인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어제 섭맨의 명대사 '여자들은 다 똑같애'를 노래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이들었다.
문자를 넣었다.좋단다. 가사는 나보고 쓰란다.
어제밤 고작 맥주 한캔을 마시면서 땀을 뻘뻘 흘린 이유가 오늘에 있었구나.

코러스 가사만 쓰겠다고 했다.
나는 '남자들이 더 똑같애'라는 가사로 후렴구로 넣고 싶다.

여자들은 다 똑같아. 남자들의 능력만 보잖아.
남자들은 더 똑같아. 여자들의 외모만 보잖아.

제법 그럴싸한 노래를 만들 수 있을것 같았다. 어제 밤 놀이터, 둘다 루저인 채로 맥주 캔이나 따고 있는 우리들 옆에는 고양이 두마리가 눈이 맞고 있었다. 고양이마저 짝이 있는데 내 짝은 없는 더러운 세상.

하지만 나도 섭이도 실패자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삶들이 모여 있을 뿐.

을지로를 지날 때는 엉덩이가 아팠다. 길도 막혔다. 감상으로 풍경을 즐기기엔 이미 두시간 가까운 시간을 버스에 앉아 있었다. 오늘 사무실에 나가서 할 일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녕 (말이 좋아) 프리랜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주는 장점은 이것 하나구나 생각했다.

261번 버스는 여의도 마저도 빙빙 돌아서 나를 국회에 내려주었다.
이번 글을 수미상관으로 끝내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뎡이와 세준이의 웨딩 촬영용 티셔츠가 잘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