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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04 후레쉬맨 5호기의 운명


금요일 부터 2박 3일 원고 쓰는 우울 모드로 들어갔다가 일요일 저녁 늦게 간신히 빠져나왔다. 휴가나온 우리집 막내, 다시 유학 떠나는 요섭이를 기념하는(?) 외가 모임이었다. 장소는 신도림 모 샐러드바. 어른들 없이 애들만 모인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내게는 외사촌동생이 하나 있는데 나이도 동갑이고 생일도 딱 하루 차이다. 샐러드를 몇접시 비우고 케이크에 몰입해 가운데 사촌이 한마디 한다.

"요즘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중이야."

너무 놀라서 씹지 않고 넘겼다. 그대로 목에 얹혔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니.
그녀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니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다니. 과연 '하나님'을 배제 한 채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놀라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춘기 방황 따위 일절 없이, 언제나 반에서 1-2등을 다투고 그것도 모자라 노래대회란 대회에서는 언제나 대상을 휩쓸던 그녀. 비록 그녀가 대학을 성악으로 선택하면서 입시에 좌절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나를 소외시키고 작게 만드는 존재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정의 평안함. 세상의 밝고 맑은 단면만 보며 밝고 긍정적으로 자라난 그녀.(얼마나 사랑스럽고 여성스럽게 자랐는지 '하나와 앨리스' 영화에 나오는 아오이 유우를 보면서 나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에 반해 그녀 넓고 깊은 사랑 앞에서 열폭하며 직설적이고 외설적인 말만 지껄여 대는 나는 얼마나 초라했는지. 모든 암담하고 우울한 현실만을 지껄이는 나에 반해 여유와 긍정 사랑을 이야기 하는 그녀는 참으로 대인배 였다. 그 앞에서 나는 언제나 작아질 수 밖에 없었고, 그녀가 너무나 반듯했기 때문에 내 비뚤어짐은 더욱 도드라졌었다.


단적으로 나타난게 후레쉬맨 놀이였다.
우리 때 후레쉬맨의 인기는 지금 동방신기 못지 않았을 때였고 애들이 모이면 맨날 하고 노는게 후레쉬맨 역할을 나눠갖고 역할극을 하는게 놀이의 전부였다.

모든 남자애들이 후레쉬맨 놀이를 할 때 1호기를 하고 싶어하지 별 비중 없고 눈에 띄지 않는 2호기나 3호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여자애들도 마찬가지다. 예쁜 노란색 치마를 입고 귀여운 구슬 방울을 무기로 가지고 있는 4호기에 비해 무거운 장화를 신고 땅에 균열이나 내는 5호기는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가;;;
비중 없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에피소드에서 갯수에서도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5호기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한개 밖에 없었다. 괴물의 미니어쳐를 데려다 키워서 친해졌는데 괴물이 커지자 결국 5호기가 자신의 손으로 처치할 수 밖에 없었던 처절한(?) 에피소드....
그게 끝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끝! 그녀가 주인공이 됐던 것은 그게 '끝!' 이었다.
 
후레쉬맨 놀이를 시작하면 그녀는 언제나 4호기를 도맡았다. 아무리 욕심을 내고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도 나에게 4호기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몇번을 부딪히고 결국 나는 5호기 전담반이 되었다.
(이와중에 하나 더 기억난건 여자였던 내 동생은 후레쉬맨 3호기를 했단 사실이다;;;; 당시 모여 놀던 멤버의 성비율이 남자 둘에 여자 셋이었으니 한명은 남자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진아! 미안하다. 돌이켜 보니까 언니가 진쫘 미안해!! ㅋㅋㅋㅋ)

후레쉬맨 4호기도 5호기도 모두다 자신만의 아픔이 있고 자신만의 고민이 있다.
사랑 받고 자라던 받지 못하던 상처 앞에 아파하고 소외에 서글퍼 진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한 거다. 인간은 일직선상 동등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차별과 차이 앞에서 당당해질 수 이는 유일한 이유.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이고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이 글을 한창 쓰고있는 있는 찰나,
철민 오빠가 하나님은 언제나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기억하라며 메신져에서 말을 건다.

오빠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노란색 짧은 치마를 입은 후레쉬맨 4호기가 예쁘다 칭찬할 때
뒤켠에 찌그러져 분홍색 무쇠신발 신고 쿵쿵 대는 후레쉬맨 5호기가 느꼈을 소외감.
하나님은 그 소외감까지 사랑해 주신다.
만드신 모습 그대로 보고 기뻐해 주신다.
그리하여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다.

(언제나 문제는 한국 교회에 있을 뿐이다. '비주류'까지, '없는 자'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한국교회가. 언제나 말썽이다)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오늘 같은 날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어서 그 말을 건네준 철민오빠가 참 고마웠다.
오빠에게 미안하긴 한데, 교회는 나가지 않을것 같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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