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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속 우물

20세기 소녀 2010. 6. 17. 15:37


사실 난 이번 월드컵 우리나라를 응원할 생각이 그리 없다.
'대~한민국!'이라니!
신명나서 어깨를 들썩이는 것도 한 두 해지,
8년째 같은 리듬 타기 진부하다. 질리고 지겹다.
그래, 맞다! 나는 원래 변덕이 심하다.

내가 이렇게 나라에 대해 시큰둥해 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 나라가 나에게 해준게 뭐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몇개 없는거 같다는 결론과,
짝사랑도 한두 해다. 외사랑으로 끝날 사랑은 안하는게 낫겠다.라는 판단.
여튼 우리 나라, 우리 사회에 대한 실망이 한 몫한다.
국가최고 지도자랍시고 TV나온 사람에 대한 살의도 큰부분 차지한다.
(그 사람이랑 같은 국적인게 부끄러워 참나 살 수 없다! 미치고 돌아가시겠다;;;)

나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흡사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함께사는 권태기 부부'같은 모습이다.
별 수 없어 산다. 별일이 안생겨서 산다;;;;


지난주말, 재촬영과 재편집. 24시간만의 퇴근을 경험하는 와중에 그래도 간신히 짬을내 그리스전 축구 시청만큼은 허락됐다. 아빠도 나가셨겠다, 엄마가 애들 불러도 된다고 했겠다, 기회를 틈타 우리집으로 동네파를 불렀다.

동네파는 알러뷰 티셔츠를 맞춰입고 왔다.
피자를 두판 사왔다. 무한도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먹어치웠다.
싸구려 피자라 양이 적어 그렇다며. 다같이 변명을 했다.
손가락 빨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김마망이 40분 걸려 치킨을 배달했다.



닭관절을 씹으며 내가 말했다.
"난 요즘 우리나라 별로야. 권태기랄까? 국적을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어. "

콜라를 들이키며 만두가 말했다.
"그래도 연희동은 좋아."

그래. 만두의 말이 맞다.  
이딴 나라, 지긋지긋한 땅 구석, '국개'라 불려도 싼 사람들.
진절머리나는 틈바구니가 뭐가 좋다고,
모든걸 훌훌 털어버리고  이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동네에 있었다.

우리동네. 우리집, 우리 식구, 동네파, 친구들, 연희교회, 연세대, 사러가 근처, 꾸러기 놀이터.... 일억만금을 준다해도, 바꾸진 않을테다. 일억만금 값나가는 보물이 바로, 내가 사는 이 나라에 있었다. (아무도 일억만금 주고 사진 않을테지만 ㅎㅎㅎ)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야."
어린왕자가 말했었나, 여우가 말했었나?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나는 사막같은 세상 속,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우물' 하나를 숨겨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욕할 것 투성이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누구나 각자의 마음 속 우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백명의 마음속에는 백 개의 우물이. 천 명의 마음속엔 천 개의 우물이.

그래서 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모래투성이 사막일지라도,
 정녕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사는 이 못난 나라도 진정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생각해봤다. 
'대한민국~'까지야 못외치겠지만,
그래도 조금, 응원할 마음이 생긴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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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권태기 부부사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만취한 '민국이'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