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게 제법 많다.
주말 중 하루는 다부지게 공부해야겠다. 지금 맡고 있는 전 프로그램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정말 갈 길이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아아~
연산군 대 조정에서는 현덕 왕후 복위로 인한 피바람이 일었고, 나에겐 그 내용을 뒷받침할 그림이 없어서 피눈물이 인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적어도 선배님들의 발끝에는 미치는'작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트위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멘션 하나 날리고 마냥 댓글을 기다리고 있는 바보같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 무슨 미련이고 무슨 집착인가. 얘들아, 왜 이리 답이 없니? 나 씹힌거니? 초조하고 우울하다. 그러다가 스스로 바보를 자처하는 것 같아서 창을 닫아버렸다. 앞으로 며칠 봐서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트위터를 관둬야겠다.
 트위터를 시작한건 지난 총선, 자주 드나드는 다음 카페에서 내가 속한 당에 대한 공격에 상처를 너무 많이 받은 덕분이다. 나랑 비슷한 생각 하는 사람들을,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몇몇은 너무 말이 많다. 봐서 되도록 팔로잉은 100명을 넘기지 않을 생각이다. 누구는 첨가하고 누구는 삭제하고 꾸준히 주목해야겠다.

묘비명을 생각해봤다.
미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내 우물 쭈물 하다가 이럴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다음으로 좋아하는 묘비명은 '슬프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도 못한 채, 비상한 죽음을 당했다'으로 김옥균의 묘비명이다. 요 며칠 곰곰히 생각한 결과 나의 묘비명은
'나 이제 가니, 세상은 조금만 덜 재밌을 것.' 혹은 '지금부턴, 저 세상이 이 세상보다 재밌도록 노력하리라.'가 좋을것 같다.
저 세상에 간다 해도, 가장 속상한건 역시나 이 세상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의 묘비명이 유명해 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유명해지는게 급선무 인거 같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건 어제 회사에서 였는데,
급하게 제목을 단다고 가장 가까운 왼쪽 키보드를 두어개 두들겼다. 'ㅇㄷ'이라고 달아놨다. '야동'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대충 제목을 달 때도 신경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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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하트의 노래를 미친듯이 찾아서 듣고 있다. 작년 9월에 미쳐있었던건 <브로콜리 너마저>, 작년 12월에 빠져 있었던건 <20세기 소년>이었지. 줄리아하트 2집은 이미 품절이다. 친구가 리핑받아줬는데, 노래 전체가 너무 다 좋다. 친구 쩡에게 팔 생각 없냐고 물어봐야겠다. 설마 나는 그녀의 친구인데, 웃돈을 더 얹어 받지 않겠지 ㅋㅋㅋ

*어제 저녁 6시 30분부터 10시 45분까지 4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회사 야근에 진저리가 쳐져서, 회사에 가방을 놓고 컴퓨터 켜 놓은채 도망 나왔다. 고딩때 가방 버리고 보충 띵기던 임*선 백*아 이런 애들이 떠올랐다.
연희동 <망향>가서 비빔칼국수에 만두 먹고 오래간만에 <노란손수건>도 찾았다. 멤버는 주기자, 버니, 그리고 뒤늦게 참여한 김도도. 여성이 하루에 사용해야하는 단어는 2만5천개라고 누가 말했던가? 역시 사람이라면 4시간쯤 수다도 떨어주고 연예계 뒷다마 좀 거론 해줘야 사는 듯 하고, 고조 숨통이 트이는 듯 하더라. 오늘 또다시 2만5천개를 사용하려면 누구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걸까?
아마 난 손가락이 불나게 네이트 창에 단어를 나열하고 있을꺼야;;;;

*어제 엎드려서 오정희 소설 <유년의 뜰>을 읽고 있고 있으려니, 문득 예전 가리봉동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한국나이) 6살 겨울에 연희동으로 이사 왔으니 태어나서부터 고작 5년하고 6개월 정도 그 동네에서 살았다. 어리고 짧았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선명해서, 내가 그 추억을 곱씹을 때면 엄마 아빠 할머니 모두 깜(짝) 놀(라곤) 했다.
어제 다시금 떠올린 장면은 아빠를 마중갔던 엄마와 우리 삼남매의 모습. 골목길 뒷켠 무수히 그리고 줄줄이 이어져 있던 공터. 공터를 지나고 나면 멀리엔 지하철(전철이었던가;;;)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빠는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곤 지하철에서부터 그 공터를 향해 걸어왔었지. 구불구불 보도블록이 튀어나온 길에서 유모차에 타고 있던 우리 막내, 그리고 유모차를 타겠다고 징징대던 영진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빨간볼에 못생겼던 나. 그리고 아직 30대 후반이던 파마머리의 젊은 엄마. 그런 단편적인 기억을 어떻게 포장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대게의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을 행복으로 포장한다. 뭐 지금도 나도 그때를 떠올리면 뭔가 따뜻한 그리운 감정들이 솟구치는데, 먼 훗날은 얼마나 더 그립게 될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십대 때 우리집에는 참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지나고 나면 수미상관. '그 옛날'과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 '지금'을 떠올린다면 똑같은 안정과 평안이 반복되고 있기에,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나름 행복했었다고. 아마도 우리 집은 언제까지나 아늑하고 그리운 느낌으로 남을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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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이런 아늑함을 말하는 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