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9.17 할머니 제사 풍경



어제는 세번째 맞는 할머니 기일이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로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 대한 부담이 한결 덜해졌다. 할머니가 의식을 잃으시는 그날부터 병원으로 옮기고 삼오제를 치르는 근 일주일. 가족이 왜 필요한지를 눈으로 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모두 언젠가 강화도선산에 묻힐 거라는 동질감. 그리고 앞으로 함께하는 피붙이의 이별의 순간, 이 짊을 함께 짊어질거란 느낌.

할머니의 장례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피붙이의 든든함을 알려주는 사람 가득한 온도.

부침개라도 부쳐야 하나? 회사 끝나고 서둘러 돌아오니 이미 부침질은 한판 끝난지 오래다. 이제 막 부쳐진지 오래지 않아서 집어 먹기도 딱 좋다. 동그랑 땡으로 골라서 대여섯개 집어 먹고 이 방 저 방에서 잠이 든 작은 엄마들에게 인사하고. 나도 그 옆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옥상에서는 남자들이 화투에 걸린 승패에 따라 이래저래 희비가 교차하는 추임새가 울려 퍼졌다.

해가 저물고, 남자들이 내려오자, 좁은 집이 더 시끄러워졌다. 막내고모가 왔는데 또다시 조카 얼굴 좀 보자면서 묻지도 않은 막내 고모부의 최신 근황을;;; 마구 털어 놓으셨다. 자전거를 음주 주행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생생한 현장을 들었다. 팔뚝을 다 긁혀서 아무리 더워도 긴팔을 입고 출근하신다고 아마도 오늘 제사는 (창피해서) 불참할 거란 통보도 들었다.
고모의 시니컬함과 수다는 여전했는데, 회색 정장을 입고 온 막내 작은아빠에게 '은갈치 같다'라고 해서 버럭하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신씨들이 모인 우리집은 언제나 시끄럽다. 친구들이 싸움난 줄 알고 몇번이나 놀랬던가?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모여서 수다를 떨고 화투를 쳤을 뿐인데, 동네에선 큰 다툼이 일어난줄 알고 몇번이나 신고를 망설였었다.

우리 아빠는 2만원을 잃었고 작은 아빠는 오늘밤 큰 형님이 한숨도 잠 못이룰 것을 예견했다. 작년 추석때 싹쓸이로 피자를 한턱 냈던 막내작은엄마는 막내작은아빠가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고스톱 패에 끼어서 광을 파셨던 할머니가 기억난다. 우리 아빠만 장남이라고 웃돈 더 얹어 주다가 작은 아빠들에게 걸려서 심한 핀잔을 받으셨었지.

저번 가족 모임에서 사진 기사로 활약한 작은 엄마의 사진이 가장 큰 화제였다. 나름 상도 타고 달력으로 출간되기까지한 작은 엄마의 사진은 이렇게 못난 신씨의 얼굴을 살려냈다는 감탄과 함께, 이 사진 값을 얼마 쳐줄 것인가 상당한 논쟁을 낳았다. 동교동 고모가 꺼낸 수표의 '0'자가 다섯개였는지 여섯개였는지 내눈으로 확인을 못했다. 이게 얼마야 백이야 십이야. 소리만 듣고 놓쳐버렸다. 그 옆에 있다가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교회를 나가지 않기 시작하면서 나도 제사에 동참하고 있다. 작년 까지는 네번 반 절하라더니 올해는 또 두 번 반이란다. 한 번, 두 번, 꾸벅 인사. 할머니에게 바라고 싶었던 내 마음을 되뇌인다. 할머니, 군대 가있는 승용이 잘부탁해요. 우리 이제 많이 화목해졌어요 계속 잘 지켜봐줘요.

할머니 있었을 때 보여 완성된 화목함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  
그게 언제나 미안하고 그래서 슬프고 그렇다.

설거지는 주로 나와 영진이 차지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시집 가면 명절 내내 설거지다. 니네는 하지 말아라'라고 말려주던 작은 엄마들은... '이래서 딸이 좋다'라는 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게 불만이라는 건 아니고. 이제 우리 나이는 작은 엄마들이 이집 시집오고 난 뒤 나이만큼 들어찼다. 세삼 세월과 나이의 힘을 느낀다.

나는 유년기를 두 작은 엄마와 함께 보냈었다. 집안 가득 어른이 계시고 떠들고 놀아도 엄마를 대신해줄 빈자리가 있다는 건 참 소중한 경험이다. 우리 식구 다 먹으려면 켄터키프라이드 치킨 큰 박스 통이 두개 있어도 모자랐었더랬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식구가 가득 들어찬 느낌. '작은 엄마'에 '엄마'란 호칭이 달리 붙어 있는게 아닌걸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큰할아버지 댁 큰아버지가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운 게 그냥 운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우리 아빠 작은아빠 못지 않게 큰아빠도 잃어버린거다. 작은 '엄마'란 존재를.

설거지가 끝나고 이래저래 술자리가 마무리 지어지고, 나는 좋아하는 고기 대신 회만 가득한 밥상을 불평했다. 사촌동생 지*이가 놀러왔다. 회사에 대한 이런저런 불평 불만이 한자락 가득이었다. '그래도 지*아, 넌 월급도 두 배고, 정기 휴가 월차 다 있잖니?'
'언니는 꿈이 있는거잖아.' '야 그깟 꿈 따위야! 이 언니는... 월급 두배 정기 휴일에 얼마든지 팔아치울 수 있다.'  당당하게 말했다. 사촌동생이 나를 더욱 불쌍하게 보는 것 같다.

새벽 두시경 해서 친척들은 우리집을 나섰다. 술상 판을 동생이 설거지하면서 우리의 임무도 끝을 내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추석 때는 제사를 생략하고 다같이 차례갔다가 싸간 음식을 한판 먹고 돌아왔다. 엄마가 립을 양념했던게 진짜 맛있었는데, 이번 추석은 어떨까?

가족들이 모인 자리는 힘들어도 언제라도 즐겁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 든든한 기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