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하트의 노래를 미친듯이 찾아서 듣고 있다. 작년 9월에 미쳐있었던건 <브로콜리 너마저>, 작년 12월에 빠져 있었던건 <20세기 소년>이었지. 줄리아하트 2집은 이미 품절이다. 친구가 리핑받아줬는데, 노래 전체가 너무 다 좋다. 친구 쩡에게 팔 생각 없냐고 물어봐야겠다. 설마 나는 그녀의 친구인데, 웃돈을 더 얹어 받지 않겠지 ㅋㅋㅋ

*어제 저녁 6시 30분부터 10시 45분까지 4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회사 야근에 진저리가 쳐져서, 회사에 가방을 놓고 컴퓨터 켜 놓은채 도망 나왔다. 고딩때 가방 버리고 보충 띵기던 임*선 백*아 이런 애들이 떠올랐다.
연희동 <망향>가서 비빔칼국수에 만두 먹고 오래간만에 <노란손수건>도 찾았다. 멤버는 주기자, 버니, 그리고 뒤늦게 참여한 김도도. 여성이 하루에 사용해야하는 단어는 2만5천개라고 누가 말했던가? 역시 사람이라면 4시간쯤 수다도 떨어주고 연예계 뒷다마 좀 거론 해줘야 사는 듯 하고, 고조 숨통이 트이는 듯 하더라. 오늘 또다시 2만5천개를 사용하려면 누구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걸까?
아마 난 손가락이 불나게 네이트 창에 단어를 나열하고 있을꺼야;;;;

*어제 엎드려서 오정희 소설 <유년의 뜰>을 읽고 있고 있으려니, 문득 예전 가리봉동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한국나이) 6살 겨울에 연희동으로 이사 왔으니 태어나서부터 고작 5년하고 6개월 정도 그 동네에서 살았다. 어리고 짧았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선명해서, 내가 그 추억을 곱씹을 때면 엄마 아빠 할머니 모두 깜(짝) 놀(라곤) 했다.
어제 다시금 떠올린 장면은 아빠를 마중갔던 엄마와 우리 삼남매의 모습. 골목길 뒷켠 무수히 그리고 줄줄이 이어져 있던 공터. 공터를 지나고 나면 멀리엔 지하철(전철이었던가;;;)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빠는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곤 지하철에서부터 그 공터를 향해 걸어왔었지. 구불구불 보도블록이 튀어나온 길에서 유모차에 타고 있던 우리 막내, 그리고 유모차를 타겠다고 징징대던 영진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빨간볼에 못생겼던 나. 그리고 아직 30대 후반이던 파마머리의 젊은 엄마. 그런 단편적인 기억을 어떻게 포장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대게의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을 행복으로 포장한다. 뭐 지금도 나도 그때를 떠올리면 뭔가 따뜻한 그리운 감정들이 솟구치는데, 먼 훗날은 얼마나 더 그립게 될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십대 때 우리집에는 참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지나고 나면 수미상관. '그 옛날'과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 '지금'을 떠올린다면 똑같은 안정과 평안이 반복되고 있기에,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나름 행복했었다고. 아마도 우리 집은 언제까지나 아늑하고 그리운 느낌으로 남을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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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이런 아늑함을 말하는 건 아니고;;;;



나에겐 난독증이 있다.

줄리아 하트를 여짓껏 줄라이 하트로 알고 있었다;;; (7월의 심장이라니 아 푸르른데! 라고 생각해온 나는 대체;;;) 나의 난독증 우쩔껴. 부레옥잠을 부옥레잠으로 읽었다. 외국인 이름에서 특히 장난아니었는데, 난 10살때 홈즈를 읽었던 나는 21살때까지 와트슨을 와스튼으로 알고 있었다. 성격 급한게 이런데서 뽕뽕 드러난다.



베이비 펌을 할꺼얌
파마를 하고 싶다. 정확하게는 베이비 펌을 하고 싶다. 내 머리 길이로는 도저히 안된다고 해서 내버려 두고 있다. 정확하게는 '머리를 기르는게' 아니라, '자르지 않고' 있다. 덕분에 뒷머리가 어깨에 닿겠다. 안그래도 목도 짧아 죽겠는데 덥기까지 해서 아주 불편해 뒤지시겠다. 이렇게 몇달 추리한 걸 참고 기른 뒤, 거금을 투자해서 머리를 했는데, 안어울리면 어쩌지? 다음날 바로 머리를 감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우짜지? 구불구불한 머리로 샴푸질 하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 어쩌지.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하고서라도 베이비 펌을 해보고 싶다.
너무나 큰 머리통이 걱정일 뿐이다.



롯데 월드에 가야겠다
며칠전 미투데이에도 글을 남겼는데 유너오빠에게 롯데월드 같이 가자는 신청이 들어왔다.
주말에 가자길래 그 날짜는 안된다고 강경하게 못박았다. 전 주말에가서 고작 4-5개 타고 오는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9시 반 개장 시간에 맞춰 에스컬레이터 뛰어올라가고 한 30개 쯤 타는 그런 여자거든요. 야간 퍼레이드도 보다 말고 그거 끝나면 바로 놀이기구 타려고 다른 놀이기구 앞에 줄서는 그런 여자거든요. 11시 다돼서 하는 레이져 쇼 안 보고는 차마 집에 안가는 그런 여자거든요. 롯데월드 가기 전부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OST' 들으면서 마음 준비하고 그러거 든요.
에버랜드는 왜 안가냐고 하길래, '삼성의 현금줄이라서 안가요.' 라고 말했다가 솔직한 변명을 말했다. '놀이기구와 기구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몇 개 못타요.' 라는 나의 소신을.
나. 진정, 놀고 싶다.
 

과분한 꿈에 관하여.
친구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항상 이루고 싶은 꿈을 온 우주를 향해 내뿜는다고 했다.
근데 난 몇번 해봤는데 모두 다 실패다. 수 없이 많았던 실패 속에서 덜 상처 받기 위해선 한물 지난 유행어 '아마 난 안될꺼야' 란 말만 되뇌이는게 낫다. 과한 욕심을 부릴 땐 기대를 10분의 1만 남기고 깎아 내는 것이 '희망고문'의 폐해라도 줄이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기대 안하다가 이뤄지는게 100배는 더 기쁘잖아!
잔뜩 기대했는데 이뤄지지 않으면 상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벼랑끝이 되는 거고.

이번주 한겨레에는 소설가들의 글이 실렸다.
정말 100퍼 공감하는 글들이 있기에 짧게 인용한다.


시니컬해진 20대엔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은 것'이란 정의를 내렸고, '돈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늘어놓곤 했다. 실패가 주는 굳은살들이 내려앉을 때 마다 나는 긍정이 아닌 부정이 가진 힘을 믿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잦은 실패로 생긴 생채기 때문에 아무도 가슴에 든 멍으로 나는 피기도 전에 꺾여 버렸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난 상처를 달래주는 법을 배워야 했는데 그것이 내겐 자조와 위악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성공'보다는 인생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에 대한 태도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9월 14일 <한겨레 21> '대신 인생'이 기적을 불렀다. -백영옥 에서 발췌




투덜투덜 입이 댓발 나와 있어도 내가 선택했다.
아직까지 돌이키고 싶을 정도의 후회는 없다. 타이밍 딱 떨어지는 몇 번의 이동도 있었고, 정말 정말 원하고, 바라고, 꿈꾸고, 기다려왔던 팀. 목표하던 곳에서 일했던 확률이 3번 중 2번이면... 이거 꽤 높은 확률이잖아! 이래서 내가 포기를 못해.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더 버틸래. 기운내기로 했다.
내가 한 노력 보다 더 큰 미래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보다 노력해서 더 큰 미래를 만들 수 있길. 내 가능성을 바라고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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