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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의미

20세기 소녀 2009. 9. 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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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어느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이 사진을 불쑥 내밀었다고 한다.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근근한 용돈 하나 있으실리 없는 두 양반이
어느날 말 한마디 없이 이제 갓 돌 지난 널 데리고
이 사진을 찍고 왔더라고.

사진 속에는 아직 머리털도 채 제대로 자라지 않은 나와
(이후 머리를 한번 빡빡 민 덕에 지금의 풍성한 머리칼을 자랑할 수 있게 됐다)
길고 험난한 노동의 증거로 쌔까맣게 그을린 노부부가
인생의 황혼, 삶의 결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덩치 좋은(?) 큰손주를 안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 사진을 본인 둘이 갖고 싶어서 찍었을까?
장남, 큰아들에게서 처음 본 손주의 한살배기 모습을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었을까?
남은 생 죽는 날까지 큰손주와 한 집에서 같이 살 게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데
그게 이유였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시간. 우리는 너랑 같이 있었노라.
둘 다 떠나고 난 뒤, 행여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이 사진을 보면서 기억하고 추억해 달라고.
그것이 이 사진의 이유가 아닐까.
덧 없이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얼마 안있으면 할머니의 기일이다.

잊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살아갈 수록 많은 것들이 밀려들고 또 밀려와서
자꾸 희미해져가고 흐릿해져가고 언젠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면 어떡하지?

할머니! 나를 그렇게나 사랑해주었는데 자꾸만 그렇게 되어 버려서
그래서 나는  그게 참 많이 미안해.


나에겐 윤영이라는 친구가 있다. 우리집과 윤영이네. 두 집은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윤영이네도 딸딸아들 셋이었고, 우리집도 딸딸아들 셋이고. 윤영이와 나는 동갑이고, 윤영이네 막내 윤혁이와 우리 승용이가 동갑이고 그랬다. 두 집안은 모두 연희 교회를 다녔고, 초등학교 입학 전 같은 피아노 학원에서 얼굴을 트고, 초등학교 중학교 같은 교회 같은 성가대를 하면서 친구로 지냈었다.(이젠 별 교류가 없는 사이가 돼버렸으니 과거형이 어울리겠다.) 승용이는 윤혁이와 베스트를 먹기까지 한 사이였다. 그런 윤영이네와 우리네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할머니였다.

맞벌이하는 가정이었던 윤영이네와 엄마가 아빠랑 같이 남대문에서 장사하던 우리집. 우리집에도 언제나 할머니가 있었고, 어릴적 놀러갔던 윤영이네도 언제나 할머니가 계셨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승용이와 윤혁이 중, 먼저 입대한 건 윤혁이었다. 그러다가 얼마전 윤영이네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군에 보낸 손주에게 편지가 너무 쓰고 싶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편지에는 단 일곱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삐뚤빼뚤 제대로 쓰지 못하는 글씨로 딱 일곱자.

'윤혁아, 보고싶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우리 할머니만큼 나에게 무한한 축복과 애정을 쏟아줄 사람은 다시 없을 거라는 것. 부모와 자식은 애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불가결한 일이라면 할머니와 손주 관계는 조금 더 선택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선택엔 내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를 할아버지 옆에 묻어드리고 돌아온 날, 가장 먼저 맞닥드린 건 상실감이었다. 세상 속에서 이만큼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겠구나. 이제 다시 찾을 수 없을 애정에 대한 박탈감. 그래서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미친년처럼 눈물 콧물 쏟고 또 쏟고 세상 떠나가라 엉엉 울었다.

나 하나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을 애정일지라도, 크고 크게 쏟아 부으며 사랑해 줄. 우리 할머니는 이제 내곁에 없다. 그게 너무 슬프고 서러워서, 그 불쌍한 사람이 우리 할머니어서 울었다. 혼자 남은 내가 너무 안쓰러워 울었다. 


학교 다녀오겠다 밖에 나갔다 오겠다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 건네며  할머니 방문을 나서면 항상 한결 같았던 우리 할머니. 

'조심히 댕겨와'

그게 얼마나 큰 애정이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인지.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을 외롭고 섧은 사랑인지 몰랐던 건 아니지만.

전할 수만 있다면, 윤혁이네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편지를 쓴 것처럼, 꼭 그 크기만큼의 정성을 바쳐서

나도. 나도, 나도 우리 할머니한테 편지를 쓰고 싶다.  

'할머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