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마포촛불연대에서 하는 주점이 있었다. 사람들과 같이 간곳에서 대학 동기를 만났다.
너무 너무 반가웠는데 애가 한참 취했는지 뽀뽀하려고 하길래 그대로 도망쳐 나왔다.
도망가는 걸음 뻔장인데 직무유기죄로 탄핵할꺼란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어떻게 맡게 된 뻔장인데, 탄핵은 안 되는데;;; 2MB도 버티는데 내가 왜 못버틸것 같냐며, 잘있으라 손 흔들고 나왔다.
그냥 이런데서 동기 애들을 만나면 마냥 반갑고 그러면서 서글프기도 하고 그때가 그립기도 하고 너무 많은 감정들이 밀려와서 버겁다.
내가 내색은 안해서 그렇지 내 대학 4년 너희가 전부였다고 때때로 과학생회 일로 도망가서 그렇지 진짜로 너희가 전부였다고, 내가 진정 젊게 청춘 같이 살았던 때는 학생회관에서 보냈던 3년이라고
그걸 말해주고 싶었다.
금요일엔 소주 두 병 반을 마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소주 두병을 넘게 마신건 손에 꼽는다. 신촌 구석진 술집. 그리고 깊숙한 골방안엔 졸업 후 몇년만에 모인 얼굴들이 있었다. 특별한 인사도 필요 없을만큼 익숙한 얼굴이었고, 그 익숙함이 우스워서 웃었다.
동네파. 여꼴통. 쭈꾸미. 내 친구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말은 참 많다. '얘들'을 그냥 '친구'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애들을 '동기'라고 부른다. 내가 '동기'라고 지칭하는 건 세상에 그 애들 뿐이다.
친구라고 부르기에 밋밋한, 조금은 다른 기억과 의미들이 '그 애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여튼 그렇다.
다행히 그녀들은 내 진상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난 쏘주를 마시다 말고 푸념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데모를 더 열심히 할걸 그랬다. 비정규직 투쟁, 노동자대회 빠지지 말고 열심히 나갈걸 그 벌을 지금 받나보다.
사실 나 말고도 진상을 준비해온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비록 임지가 라꾸라꾸 방언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걸로 무마가 됐다. 그게 참 다행이었다.
사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없었다. 우리는 어느날 모이자 해서 짜여진 모임이 아니라, 자잘한 만남으로 서로 끈이 닿아서 연결된 사람들이었으니까.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는 1학년 새내기시절에 만났다. 단대도 다르고 소속도 다르지만 농활을 같이 가고 각종 학생회 행사에 동원되면서 서로 금방 얼굴을 텄다. 그 시절에는 아는 사람을 늘려가는 게 참 재미나고 신났었지. 학교 교정이 다 울리도록 서로 이름 부르고 시비거는 게 삶의 낙이었다.
2학년 때부터는 우울함이 조금 덧대여지기도 했다. 새내기를 받고 선배가 되는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18박 19일 통선대는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것 같이, 교집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애들이 각기 다른 과에 과장이 되는게 왠지 신이났다. '대표'라는 이름과 의미가 바래가는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겁도 났다. 하지만 '쟤도 하고, 걔도 하고, 얘도 하고 그러니까 나도 하고' 이 생각 하나면 겁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3학년 때는 또 어땠더라. 다른 애들은 참 쉽게 말하던데, 실은 나는 아직도 그때 이야길 잘 못한다. 황소곱창집에서는 한잔씩 마주하는데 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내가 다른 말보다 꺼내야 할 무언가가 있단 뜻이다.
미안해.
실은 언제나 미안했었다. 가슴 한쪽에 묵직하게 너네 버리고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던 그 일년이. 그게 단 한번도 아문적 없는 상처가 되버려서, 꺼낼때마다 죄스러워서, 항상 사과하고 싶어서. 실은 마주할 용기 없이 숨어 지나친적도 있을만큼 말이다.
나도 너무 힘들었었어.
이 말을 한다 해서 용서가 될꺼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말로 꺼낸건. 그래도 알았으면 싶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에게 '아무개'가 아니다. 도망쳐도 자꾸 돌아볼만큼 소중한 니들이었다고. 그만큼 니들을 좋아한다고.
그날 밤 난 2학년 때 부터 꿈꿨던 뻔장에 취임했는데, 장작 6년만에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