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90년대 해적판 만화를 아느냐 - 꽃보다 남자 아니죠, 오렌지보이 맞습니다!

꽃남 열풍이란 말로도 모자란다고 했다.
남자 주인공 캐스팅을 보고 ‘완전 따오밍쓰네’라고 비웃던 나.... 드라마 2회 시청을 마치자마자, 노트북에 ‘구준표 폴더’를 만들었다.
연애 중인 친구는 구준표가 금잔디에게 키스할 때마다 기도하듯 경건한 자세로 두 손이 모아진다고 한다. 월요일과 화요일 10시와 11시대에는 여자들에게 문자 보내는 건 엄금이라고 했다. ‘아아아악 구준표!!!!!!!!!!!!!’란 문자 밖에 오지 않는다고 .

이미 임자 있는 몸인 20대의 여심과 순정을 뒤흔드는 이 드라마. 이 드라마 왜 이렇게 인기 있는 걸까? 이렇게 과열되어도 좋은 걸까? 나... 너에게 빠져도 되는거니, 구준표? ㅋㅋ

하지만 만화책 <꽃보다 남자>의 기억을 떠올려 보라. 이 인기가 부족하면 부족했지 과한 것은 절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알게 되어서 대학교를 졸업한 24살 때 끝난 (지독하리만치 장기 연재한) 만화. 일본 순정만화 역사사상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이 만화. 신간이 나온 날 학교에 가져가면 앞자리 1번부터 뒷자리 46번까지 전원이 돌려보고 한반 전체가 하나 되어 쉬는 시간마다 ‘황보명!’ 또는 ‘윤지민!’을 외치게 만든 만화.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갖고 싶은 만화는 ‘소유해야만’ 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 만화책을 가지고 있다. KBS 방영판 꽃보다 남자 5화를 보던 날이었던가? 결국 이 드라마는 옥상 창고를 뒤지게 만들었고. 7개의 라면박스를 다 흐트러트린 결과. 보물 같은 만화책을 찾아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찾아낸 만화책의 제목은 <오렌지 보이>. <꽃보다 남자>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히트친 만화의 (라이센스를 따지 않은) 불법무단복제판이 었기 때문에 네이밍센스가 이렇다. 이 만화의 제목이 ‘오렌지’보이 인건, 90년대 초반 유흥과 풍기 문란으로 당시 사회에 커다란 문제로 화두된 ‘오렌지 족’에서 왔다는 걸 기억할 사람들이 있을지..... 해적판을 찍어낸 번역가 입장에서는 F4가 오렌지 족으로 보였음직도...(충분)하다.

꺼내어 다시 놓고 보니, 그런데 이 만화 심상치가 않다. 이 만화가 건드린 사회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정유나(일본이름 츠쿠시, 한국드라마 이름 금잔디)를 향한 ‘왕따’는 당시 일본에서 큰 화두가 된 ‘이지메’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비뚤어진 사랑으로 정유나를 괴롭히는 후배 혜연(일본이름 사쿠라코, 한국드라마 에서는 이시영이 맡은 역)은 외모지상주의가 낳은 세기의 문제아(?) 이다. (비록 정유나의 도움으로 개과천선하긴 한다만;;)

하지만 그 어떤 것 보다 이 만화가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것은 ‘권력’이다. 그리고 ‘권력을 향한 항거’이다.

시장경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신(神)이란 돈을 의미했고. F4, 그들은 신의 아들이었다. 그들을 계급의 꼭대기에 올려 주고, 그 어떤 폭력과 범죄를 용인해 준 것 역시 돈이었고, 세상이 그들을 ‘돈’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 사회에서 ‘돈’으로 따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냐만은)

자기 힘으로 돈 한 번 벌어본 적 없는 주제에!’

정유나(=츠쿠시, 금잔디)의 대사 그대로 만화는 이 사회의 병폐를 그대로 꼬집어 내고 있다. 비록 '신데렐라'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덧칠해져 있긴 하지만.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토록 사회부조리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만화! 오렌지보이(꽃보다남자)가 순정 로맨스의 장르의 대서사시로 자리 매김한 것은 어찌보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오렌지보이가(=꽃보다남자) 자본이라는 절대 권력에 맞서는 한 여성의 용기를 그린 장작 37권에 걸친 만화라고 한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황보명도 정유나를 F4에 맞선 유일한 여성이라고 해줬는데?)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한 어른은 대한민국 여자들이 얼마나 돈에 집착하는지 보여주는 시청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달콤하게 포장해 내놓건 쓰고 악취 나게 내놓건 이 만화는 우리 사회, 더 나아가서는 현 인간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드러내다 못해 만천하에 까발린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고.

동화 속 공주들은 항상 왕자를 만났다. 재투성이 아가씨도 왕자를 만났다. ‘왕’이라는 피라미드의 꼭지점이 존재하는 한 신분사회에서는 윗 계급을 꿈꿀 수 밖에 없고. 사회구조가 그러한데 그걸 나쁘다고 마냥 욕할 수는 없다. 욕하기 전에‘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라는 십년 전 노래가사를 현실에 적용해 보는 게 조금 더 건설적인 일이 분명하다. 

만화가 연재될 당시인 1992년에도 그러했지만 여전하고 더 심화화 된 2009년 자본주의 사회. 그 절대 권력에 대항하는 정유나(츠쿠시 혹은 금잔디). 비록 그녀가 신데렐라의 삶을 살게 된다 할지라도(만화 속 둘은 이어지지 않은 채 미래를 약속하며 열린 결말을 맞이했다.), 손 댈 수 조차 없는 절대적인 권력에 맞서 끝까지 당당했던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아이스크림마냥, 로맨틱하고 달콤해야할 순정만화에서 조차 ‘절대권력’과 ‘계급’을 따지게 만드는 이 사회를 지탄해본다. 지금이야 이 썩어 문드러진 사회가 나를 이리 냉혹하게 만들어 권력과 계급을 계산하지만! 10년 전 <오렌지 보이>에 열광하던 나는 <오렌지보이>를 보며 백마탄 왕자님을 꿈꾸던 지고지순한 소녀였었기에....
 





* 꽃보다 남자가 아닌 해적판 <오렌지 보이>에서는 90년대 불법 복제된 해적판 만화의 온상을 알 수 있다. 애써 고등학생을 대학생으로 만들다 보니 나이를 잊고 무리하게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기모노가 한복으로 변하는 순식간의 변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부실해 보이는 ‘한국화’과정을 거친 컷들은 <오렌지보이>의 또다른 재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모노가 한복으로 변하는 과정. 참 쉽죠? 그래 참 쉽다;;;


* 대체 이 <오렌지 보이>는 해적판 만화인 주제에 자체 검열을 왜 시도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차피 불법인 주제에 청소년의 성윤리에 큰 타격을 줘서는 안 된다는 기준이 있었던 것일까? 여하튼 90년대 일본 해적판 만화를 즐겨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찐하고 애절한 키스 장면. 뜬금없이 등장해 여주와 남주의 입술과 입술을 가리던 꽃무더기. 어설프게 런닝 셔츠로 급조된(?) 속옷. 주름하나 없이 맨몸라인을 그대로 살려주는 정체불명의 티셔츠. 이런 자체 검열은 오히려 묘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걸 그들은 아나? 모르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별로 야하지 않은 내용인데, 갑자기 런닝셔츠기 덧입혀진 수정을 보면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금기는 상상력을 증폭시키는걸 정녕 삼성코믹스.. 니들은 모른단 말이냐?

* 전권을 읽고 나면 12년간 연재된 만화답게 작가 카미오 요코 의 날로 발전(?)하는 그림체를 볼 수 있다. 일취월장하는 그림체(그러기엔 너무 길지만) 도 이 만화의 중요 포인트다!

* 순정만화 답게 이들 사랑에 몇 번의 위기가 몰아쳤는지 모르겠다. 셀 수가 없다. 윤지민(일본판 루이, 한국판 김현중), 혜연(사쿠라코), 외국인 남자, 국회의원아들 종오, 하급생 모델, 해변에서 함께 오징어팔던 놈, 황보명의 사촌으로 사칭하는 놈, 황보명의 어머니, 기억상실증 걸리고 병원에서 만난 여자애 등등. 이들 사랑은 너무나 풍파가 많았다. 굳이 전권을 읽어볼 요량이라면, 또 다른 라이벌에 등장에 너무 놀라하지 말 것. 정유나(츠쿠시, 금잔디)의 인생이 너무 밑바닥에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해도 지치지 말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시 인기 있었던 해적판 만화는 절반은 정체불명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권수를 늘려 내야하는데 대책없이 얇은 페이지로 출판할 수 없다는 양심은 좋은데, 한 책의 3분의 2가량이 단편으로 채워지면 이건 잡지 연재물도 아니고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이러나 저러나 분통이터지기 마련이다



* 단순 멍청 무식한 황보명은 멍청해야 맛, 그리고 (짐승같이) 정유나를 향해 과도한 집착을 보여줘야 맛이다. 개인적으로 KBS판 <꽃보다 남자>에 황보명(구준표)의 질투심을 자극하면서 곳곳에 코믹적인 요소를 심어줄 상엽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원작 관련한 몇가지 tip

원래 꽃보다 남자의 ‘F4’는 ‘F5’였다고 한다(써놓고 보니 키보드 키 같다;;;) 근데 작가였던 카미오 요코가 다음회 예고를 넣기 위해 컬러 컷을 넣는다는 게 스케치를 끝내고 나니 남자 4명 밖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덕분에 F4로 대수정 되었다고.

카미오 요코는 원래 윤지민(일본판 루이, 한국판 김현중역)을 정유나(츠쿠시, 금잔디)와 엮어주려 했으나 자꾸 그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황보명과 엮어지는 바람에 어쩔수 없었다고;;;

*개인적인 드라마에 대한 요청.

구준표는 더 멍청해야 캐릭터가 산다. 개그가 안살아 있다. 게다가 철이 너무 일찍 들었다. 금잔디(정유나, 츠쿠시) 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과거를 뉘우쳐 가야하는데 이건 뭐... 혼자 다 커버려서 성장의 맛이 하나도 없다.

금잔디는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 중 하나이다. 그녀는 ‘보통’을 표현하는 대명사여야 하고, 이 만화 속에선 ‘유일하게’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금잔디는 마냥 떽떽대기만 하는 통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감정이입을 막고 있단 소리다.

구혜선이 억지스럽게 밥을 우걱우걱 먹는 씬은 8,9년 전 유행하던 명랑소녀성장기를 보는 것 같아서 촌스럽고 어색하다. 게다가 중간 중간 되도 않게 어설프게 우에노 주리가 연기해 낸 ‘노다메’를 흉내 낸 것은 몹시 불편하다. (원작인 두 만화를 봐라. 두 만화 속 두 캐릭터의 닮은 점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정상적이고 현실적인 여성 금잔디가 보고 싶다. 츠쿠시한테 쓸데 없이 ‘한(恨)’따위를 심지 말아 달란 말이다!




처음 첫사랑을 꿈 꾸기 시작한 그때가 언제였더라?

대게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열두살. 만화 대여점에서 300원에 책 한 권을 빌려 하루 종일 읽고 또 읽던 무렵이었다. 어른이라 부르기엔 미숙하지만, 어른의 모습을 하고. 풋사랑이라 부를지언정 ‘사랑’을 시작하는 나이. 이 만화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런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그 나이'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겨울. 나는 교회 겨울 수련회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두 뼘 내지 세 뼘 키가 큰 ‘오빠들’. 신발에 질질 끌리는 청바지. NIX와 GET USED, Calvinklein 따위의 메이커들. 문화적 충격과 세대간 격차를 몸으로 새기던 시절 나는 이 만화를 떠올렸다. 무언가 비슷해. 묘하게 닮았어. 두 손을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나는 나에게도 ‘그 시절’이 왔음을 상기해야 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유혜진’은 빨리 발돋움해서 오빠 같이 자라고 싶다. 자신의 오빠가 회장으로 있었던 고교 동아리 <JUMP TREE A+> 가입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오빠와 비슷한 승주 오빠를 만난다. 당연히 동아리 활동을 같이하는 단짝친구가 등장하고 한 살 차이일지언정 그 나이만큼 어른의 역할에 다가간 선배들이 등장하고. 그리고 첫 사랑도 나타난다.

만화는 순정만화답게, 보잘 것 없고 울보인 유혜진에게 4명의 남자가 쏠리는 러브라인을 구축한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의 선택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남자인 승주보다는 이미 동아리 내에 오랜 연인 이 존재하는 있는 태준이를 향한다.

만화의 마지막, 혜진이는 자신의 친오빠보다는 조금 작은 키로 자신의 열일곱을 함께해준 사람들과 사람들과 함께 웃는다.

아주 가끔 생각을 해본다. 당연히 그 나이가 되면 ‘꼭 만날 수 있을거라’ ‘당연히 존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 나는 한번도 ‘어른스러운 미성년’의 존재를 부정해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렇다. 비록 그러한 고교시절을 보내지 못했지만, 내가 겪지 못했다고 해서 그 존재가 없는 거라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난 십년이나 더 어린 그 애들보다 더 어린 스물 일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88만원 세대로 세상을 마주쳤을 승주오빠와 태준이 오빠는 무얼 할까? 꿈과 현실의 괴리속에서 꿈을 선택한 터프한 민휘경은 자신의 삶에 후회가 없었을까? 나보다 ‘선배’로써 ‘첫사랑’을 앓았던 만화 속 주인공들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 참 많다.

여하튼 이 만화를 읽고 나면 그렇다.

백뮤직으로 등장하는 이오공감이나 푸른 하늘의 노래, 90년대초 이승환의 노래를 다시 꺼내 듣고 싶어지고. 그 시절, 그 거리, 명확하게 지칭되지 않았던 그 때가 떠오르고. 누구라 허공에 발차기 하고 싶을 만큼 부끄러울 지언정 잊지 못할 첫사랑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오공감이라니, 누구에게는 개유치할지 모르겠지만, 90년대 첫사랑을 해본 나에게는 아직 세상 최고의 낭만이고 순수고 열정이고 그렇다.



*다른 이에겐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에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이오공감’만큼 낭만적인 노래가 아직 없다. 10점 만점의 10점을 부르는 세대 속에서. 관리 소홀로 늘어나 버릴지도 모르는 가냘픈 테잎에 녹음된 ‘한사람을 위한 마음’ 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 모든 순정만화가 그러하듯이 만화는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모든 설정이 전개 된다. 사랑받을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주위에 등장하는 수 많은 남자들의 애정과 헌신... 그리고 그녀에게 마냥 관대한 주변 인물들... 잊지 말자.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자 상기시키자. 이 만화는 여자들의 판타지와 희망을 그린 ‘순정 만화’다.

* 역시 모든 순정만화가 그러하듯, 남자 등장인물 중 장발이 등장하지 않으면 순정만화가 아니다. 남자 고교생의 머리가 어떻게 허리까지 오는지 헤비메탈 그룹과 비슷한 퍼머까지 가능한지 스타일인지는 묻지 말자. 이 만화는 90년대 ‘순정만화’라는 면죄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캠프파이어 시간에 나오는 BGM 가사를 읽어보라. 어쩌면 당신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의 노래가사를 그냥 지나쳤을지도 (아예 모를지도) 모른다. 94년 당시에 고교생이었던 그들의 현재나이를 곰곰이 계산해보길 바란다.

*당시 순정만화지 <댕기>에 연재되었던 이 만화는 한국 순정만화 최고의 르네상스시기를 구축하며,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었다. 90년대 인기가 많았던 만화가 재판 삼판 수어번의 재탕 출판되는 것에 반해 이 만화는 단 한 번의 재판 외에 새로 판을 찍지 않았다. 특별한 근황이 전해지지 않는 작가인데 책이나 더 찍어주지 두문불출 뭘 하고 지내는지(아울러 그녀의 수입원은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하다. 책을 구하고 싶은 팬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그것도 대여점을 한번 거친 상태인 나쁜 상태의) 옥션 책의 가격을 보면 바짝바짝 애가 탄다. 헌책방을 지나다가 이 만화책을 본다면 주저말고 구입하라! 팬이라면 만화를 소장했단 기쁨에 몸부림을 칠 것이고, 팬이 아니라면 옥션에 올려 짭잘한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만화를 보면서 드는 가장 큰 의문은 과연 이 대사를 고등학생이 읊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다. 어릴 때야 아 고등학생이 되면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진지해’지나보다 싶었지만, 나는 서른이 돼서도, 마흔이 되서도 저런 대사를 읊을 일이 없을것 같다....(일단은...)

예시가 될 만한 몇 개의 컷을 붙여 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물 일곱의 나도 한번 읊어 본적 없는 이 대사. 집착은 커녕 소유조차 해보지 못한 내 인생이 아련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대사를 후배 앞에서 읊을 수 있는 용기. 열 아홉 아니라면 할 수 없을 객기이리. (비록 십년후 손발이 오그라들지라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병아리라니 누가 병아리란 말인가. 열아홉살의 입장에서 보자면 열일곱도 병아리로 보일수 있을 게다. 하지만 이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은 무엇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흔 여덟이 되더라도 평생을 걸쳐
읊어보지 못할 듯한 대사다.




하지만 이 수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이 만화를 꺼내볼 때마다 설레이는 서정적인 <녀성>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이 만화를 읽을 때는 ‘90년대 감성’을 잊지 않은 채 만나야 맛이다.


90년대를 풍미한 한국 만화가를 고르고자 한다면 정말 수 많은 이름이 스쳐지나간다. 그럼에도 내 첫 번째 손가락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강경옥. 그야말로 한국 순정만화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1990년대. 십대가 등장하는 만화는 무수히도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는 내게 국내 최고의 순정 만화가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사람’이다.
단지 ‘사람’앞에 보통이란 단어를 받고 싶지 않은 기분을 느낄 뿐이지.
그것이 17세의 어린 객기에서 오는 것이든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오는 것이든
알 수 없는 미래가 남아 있기에 지금의 나는 어떤 특별한 가능성을 꿈꿔보는 것이다.
설사 현실은 같은 일의 반복이더라도 그래서 결국 보통 사람이다 하더라도 말이지.
오늘도 어제의 연속일 뿐인 이 생활
어제의 연속인 이 생활에서 나는 어떤 특별한 꿈을 꾸고 싶어하는 것일까.

평범한 열일곱이 꿈꿀 수 밖에 없는 오늘. 그리고 그 나이가 아니면 하기 힘든 고민들. 학교, 친구, 진로, 이성문제... 턱없이 작았다 비웃을지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 나이는 목숨을 걸 만큼 커다란 문제였고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였다.

내 이름은 강세영. 고등학교 1학년에 별 배역 맡아본 적 없는 연극부원.
현재 좋아하는 남자애는 소꼽동무 정현우에다
라이벌 비슷한 애도 한명...
그리고 집과 학교, TV, 분식집, 친구들...
그런 당연하고 평범한 것들에 싸여서
그렇게 어떤 시작도 끝도 없이
생활의 중간에 있었다.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아이들이 등장하는 만화. 평범한 세상 속 아이들은 예외 없이 자라나고, 그 과정 중 성장통을 앓기 마련이다. 그 시절. 내가 누구인지 현재가 어떤 과정인지 의문 갖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만화는 열일곱 살에 누구나 한번 쯤 써봤을 법한 일기장 같은 이야기를 담는다. 그리고 커다란 결론 없이 자잘한 결론들로 마지막을 맺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누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본인의 마음이다.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거다.
선아도 연호선배도 현정이도 현우도 혜미도 모두...
그리고 나도..

여우도...
누구를 위해 무얼 하는가는 여우의 마음인거다.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고민하던 시간들. 상처 받고 싶지 않아 외면했던 마음들. 나는 무엇이 될까 하는 두려움. 수 많은 고민은 등장하지만 어떤 끝도 결론도 낼 수 없었던 나이 열일곱.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라 말하기는 참 쉽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얼마나 열일곱이 안고 있었던 고민을 하는지.

아픈 통증을 수반하는 ‘성장기’. 그럼에도 다가오는 내일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그 때.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면면히 모여, 인생이 만들어지는거란 생각해본다. 그 사실을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그렇게 열일곱의 나이는 지난다.

  • 이 만화의 주제곡은 단연 김민우의 <사랑일 뿐야>이다. 혹시 세월이 너무 흘러 노래를 모른다면 꼭 노래를 먼저 듣고 만화책을 읽어주기 바란다. 연우 선배가 우연히 등장하는 씬에서 노래의 음향을 느낄수 있어야 만화의 극적인 묘미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실은 <17세의 나레이션>을 먼저 다룰까, <현재진행형 ing>를 먼저 이야기 해볼까 참 많은 고민을 했었다. 어릴 적에는 조금 더 경쾌한 톤의 <17세의 나레이션>을 더 좋아했는데, 커서 읽어보니 <현재진행형 ing>의 빼어남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작가가 그린 두 개의 성장 만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만화는 같은 톤으로 다른 두가지 이야기를 차분하게 읽어준다.
  • 세영이가 소꿉친구 현우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어린왕자>. 여우에 대비한 연극은 정말이지 적절한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여백을 살린 그림과 나레이션이 실제 <어린왕자> 이야기와 묘하게 어울려서 더욱더 깊은 감동을 준다.
  • 강경옥의 모든 만화가 그렇지만, 가볍게 줄거리를 읽어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말칸 대사 하나하나가 한번쯤은 생각해볼법한, 그리고 생각해야만 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화책 분량에 비해 속도가 더디다 하더라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장미는 화사하게 피고, 순결하게 지네 - 대혁명의 장미 오스칼


씨네 21에서 국방부가 선정 할 불온작품에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올려 놓았다.
아! 정말 이제사, 이 만화의 반사회적 코드를 알아주는구나. 앙뜨와네트의 휘황찬란한 드레스와 보석, 가장무도회와 불륜에 가리워져 이 만화의 참된 존재의 이유를 몰라주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 엄마도 개중 일원이었다. 바람난 왕비 애기가 뭐 그리 재밌냐고 질색했었지. 엄마! 난 적자부인의 사랑놀음 따위를 좋아했던건 아니거던뇨!)

이 만화에 대해서 내뱉고 싶은 말 투성이다. 그리고 내뱉고 싶은 만큼 간직하고 싶은 것 투성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 만화가 시작이었다. 16년 만화 오타쿠 인생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단 제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아우라! '베르사이유'라는 이름만 해도 상당한 부담인데(여성들이 애용하는 명품 이름같다;;) '장미'까지 더하라면 문제가 좀 심각해 진다. 18세기 서유럽의 궁중 문화와 파티, 화려한 목걸이와 고데기로 만 머리, 지름 2미터는 됨직한 과한 드레스. 30여년이 지난 지금이야 난감하게 다가오는 철지난 코드지만, 70년대 소녀적 감성에서는 이 만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유혹적이었을지.... (오그라드는 부끄러움에 대비해) 상상력을 발휘해주기 바란다!

이 만화는 진정한 묘미는 역사에 스며드는 스토리 라인과 팩트와 픽션을 오가는 서사 구조. 시대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해주면서도 순정만화의 기본기를 놓치지 않는 충실함이라고 하겠다.

엔틱 문양이 금박으로 새겨진 가죽 하드 커버 책이지만 열어보면 깜짝 놀랄만한 혁명서랄까? 모양새는 이리 갖추고 있지만 제목과 내용은 엄연히 다른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 이 만화 한권만 떼면 절대왕정을 지나, 산업혁명을 거친 프랑스의 한세기를 아울러 당시 유럽의 패권 분포까지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신분의 차이를 사랑으로 포장해 모두에게 감정이입시키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맘에 앙드레가 잔디에서 풀뜯으며 절규할 때, 나의 마음도 오그라드는거 같았더랬다! )  

일본 순정만화가 제 틀을 잡기 시작할때 캔디캔디와 더불어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은 이 만화. 더불어 순정만화의  거대한 신화로 이후 무수한 아류작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김혜린과 황미나도 데뷔 당시엔 이 만화와 엇비슷한 코드의 작품을 그려냈었다)

세계사수업 따위로 배울 수 없는 당 시대가 직면한 수 많은 일화들.
민중을 알고, 귀족과 부르조아를  배우고, 생쥐스트 로베스피에르 당통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하다 못해 루소의 소설 누아엘로이즈까지 소개해주는.
18세기 로코코 시대가 화려하게 꽃피운 궁정문화에서 그 끝자락에 휘몰아쳐 대던 대혁명의 시대까지! 역동과 격정의 시절, 프랑스 혁명. 진정 그 시대를 알고자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만화를 추천하고프다.

그리하여 나는 이 만화의 제목을 다시 짓자면, '대혁명의 장미'라고.....(-_-;;) 수 많은 소녀들을 울렸던 오스칼 (그러나 여자;;). 신분의 벽을 넘어 총탄에 피흘리면서도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그녀. 장미처럼 순결하게 져가던 혁명 전사에게 진정 잘 어울리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이 만화는 대원동화에서 1권부터 11권까지(1-9권. 10권 11권은 내용과 별도의 외전), 애장판 전 3권 (3권사이즈를 한권으로 합쳐 놓은 것, 책이 잘 갈라지고 보관이 어렵다)으로 나왔다가 2001년에 아주 작은 사이즈(보통 일본만화가 나오는 사이즈로 A5보다 작다. 총 11권) 로 한번 더 출간되었다. 외전에 등장하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그림체는 믿기 어렵겠지만 동일 작가 이케다 리요코의 그림이다. 다만 십수년이 흐른 후, 그림체가 상당히 손상된 뒤 팬들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 솜씨가 변질되버렸다.
2001년판은 인쇄가 마모되거나 흐릿하게 나온 선이 많아서 이게 과연 20년 이후의 인쇄술인가? 의문이 든다. 본 내용을 다 안다면 차라리 일본 헌 만화책 가게에서 전권을 더 구입하는 편이 아름다운 오스칼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겠다.  


* <베르사이유의 장미 - 미스테리와 진실> 이란 책도 나왔는데, 그닥 추천하지 않는다. 일단 미스테리가 별로 없고, 진실이랄 것도 없다. 정보가 진부하기 그지 없을 뿐더러, 팬이라면 대다수 알고 있는 내용이 전부다. 일러스트도 제대로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진정 베르사이유의 장미 오타쿠가 되길 원한다면 굳이 책을 사서 보기 보다는 웹상에서 넘쳐나는 베르사이유 장미 관련만 찾아보아도 충분하다.


* 우리나라 락 그룹인 <네메시스>가 <베르사이유의 장미>란 노래를 불렀다. 개인적으로는 만화의 기본 스토리에 충실한 노래기 때문에 노래방에서 부를땐 오그라드는 친구들의 손발을 감상할 수 있다. 덧붙이면 가사 중, '잠들지 말아요 아직은 안돼요'부분은 오스칼이 앙드레에게 하는 말이고,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랑보다 더 큰 변화'란 프랑스 대혁명을 의미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마이크를 쥐고 가사를 음미하면 오그라드는 '자신의 손가락'도 발견할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