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뒷걸음질이 여의도로 놀러왔다.
전화통화만 근 일년째였고 네이트로 자판 두들기는 게 최근 우리들의 안부전달 방식이었다. 내용은 대게 한결 같다. 보고 싶다, 언제보냐, 만나면 할말 백만개. 그렇게 미루고 밀리다가 만났다. 드디어 만났다. 얼굴 보고 나니 할말이 어찌나 많던지. 만나면 할말 백만개는 정녕 과장이 아니었다.
뒷걸음질. 그네는 이번 만남에 소싯적 사진 사진을 수백장 들고 왔다.(과장 아니다, 반어법도 아니다, 정말 수백장이었다;;;) 곧 결혼하는데 처치 곤란이라며. 사진의 내용을 보니 참 그럴만도 하다.
앞머리 하트시절 사진이라니, 아 정말 나 스무살적 사진이구나. 답사 사진 해외여행사진 학술제 사진. 그냥 강의실에서 찍은 사진. 소풍가서 찍은 사진. 이렇게 못난 얼굴을 하고 정말 찍기도 많이 찍었다. 이것저것 저장용 사진을 가져가고, 뒷걸음질이 소장하고 있어선 "절대" 안되는 처참한 사진도 골라내고.
영원히 베스트 먹을 것 같은 열댓명 되는 여자아이들은 결국 두동강 난 채(정확하게는 네동강 다섯동강인가?)로 헤어졌지만, 이젠 아무 느낌이 안든다. 그저 한발짝 멀리서 관망하고 '그랬었지'라고 되뇌이는게 전부다. 4년 5년 정도 시간의 거리를 떨어져 냉정히 판단하면 확실하게 전체가 보인다. 어차피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자주 볼 얼굴은 아니었다. 해봤자 결혼식이 축의금 내주고 뒷줄 서서 단체사진찍는 정도였겠지. 근데 그 관계에 대해서 난 참 많은 의미를 부여했었다. 4학년에 올라가면서 애들이 갈라질 기미를 보일 시절엔 그게 참 안타깝고 어쩌면 좋을까 걱정도 많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걱정이 참 부질 없다. 어차피 그정도 밖에 안되는 관계였다.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으니까.
그렇다. 관계는 일방적일 수가 없다. 욕심으로 계속 이어질 선이 아니었다.
여튼 문제의 그 사진이 나왔다.
3학년 말, 학생회 선거 떨어져서 졸라 울고 정말 목이 쉬게 울고 또 울고 쪽팔려서 학교 못다니겠다고 퉁퉁 부은 눈의 내 사진. 하지만 사진 속,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위한답시고 애들이 학교 곳곳에 붙은(심지어 에스컬레이터 타야하는 M관에서 떼온 포스터도 있었다) 선거포스터를 떼왔다. 그리고 나에게 싸인 받고 있었다. 나름, 신** 싸인회라면 싸인회 인데 그 비참하고 억울하고 창피하고 분통터지는 그 순간에 뭐 좋다고 나는 활짝 웃고 있더라.
나는 그 사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시절. 그렇게 울고불고 깨방정을 떨던 와중, 이게 절망의 나락이 아니면 뭐냐며 꽥꽥댔던 그 때에, 한번쯤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하루쯤 울고 나면 다음날부턴 웃을 수 있는 망각의 미(美)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엔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이야 돌고 돌아 바뀌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다. 울더라도 다음날엔 웃을 수 있는 '나'.
그 사진을 뒷걸음질에게 받아왔다.
퉁퉁 부은 눈에 하트머리에 살도 지금보다 더 쪄 있고, 못나기도 오지게 못났지만.
그날 내가 눈물 속에서 웃음을 적당히 비빌줄 알았듯, 앞으로의 삶도 적당히 비비면 살만할 것 같았다. 눈물과 웃음의 농도를 적당히 조절하는 법. 이걸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참 살만하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