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전봇대에 붙어 있는 <강아지 찾습니다> 용지를 봤다.
가볍고 날렵한 흰색 마르티스.
포상금까지 걸려 있는 전단지에서는 주인의 안타까운 심정이 물씬 느껴졌다.
나도 6년전 겨울 나도 우리집 강아지를 잃고
눈물과 흐느낌 속에 퉁퉁 부은채로 2박 3일 연대와 연희동 일대를 정신줄을 놓은 채 헤맸던 적이 있었다. 아련하게 흐릿했던 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통에 조금 센치해졌다.
(아흑 난다야!!!)
난다를 잃어버리고 재빠른 기동력(->전단지 붙이기)과 인적자원구축(->동네친구들,교회친구들)으로 '난다를 봤다'는 전화를 대여섯통 받았다.
하지만 모두다 우리 '난다'는 아니었다.
그냥 할일 없이 동네를 쏘다니는 '백구'는 너무나 많았다.
아니, 동네에서 놓아 기르는 개의 종류는 백구 밖에 없는 듯 했다.
전화를 받고 만난 개들,
그 중에는 우리 난다보다 훨씬 잘빠지고 늠름한 개도 있었고
눈이 땡그랗고 까매서 더욱 사랑스럽게 생긴 개도 있었다.
전화로 난다를 봤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눈에는
그 개와 우리 난다가 모두 똑같이 보였을 것이다.
신촌까지 쓰레바 차림으로 뛰어갔다가 터덜터덜 돌아오는 나에게
엄마가 한마디 던졌다.
"그냥 난다 대신 데려오지 그랬어?"
그럴수 없었다.
그 어떤 개도 우리 난다를 대신할 수는 없다.
대체불가결한 무언가가 있다.
세상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뽑아낸 물건들이,
같은 종의 생물들이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대체 불가결한 무언가가 있다.
진부하게 '그런게 길들인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감정은 언젠간 물탄듯 뿌옇게 흐려지기도 하는거니까.
그 순간 이게 아니면 안된다, 이것 아니면 안된다. 모든걸 다 버리고서라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있다. 그게 꼭 들어 맞는 순간 그런게 인생의 환희가 되는 것일까?
강아지를 잃은 주인의 애타는 심정이야
백번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반드시 이 시기에 만나라는건 아니지만,
그 강아지 없이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낄 즈음, 반드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 난다도 나와 대체가능한 다른 주인 만나서 어딘가 잘살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