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연남장

20세기 소녀 2021. 8. 27. 14:28


안녕 연남장

지금 나와서 이 글을 정리하는 곳은 연남장.
나는 이곳을 몹시 사랑했다.

이 공간을 알게 된 것은 그 옛날 유리공장이 있던 시절부터지만, 그건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수십년 전 그 시절이니까. 그 이야기는 살짝 제껴두고.

이곳을 제대로 사랑하게 된 건 작년 여름 무렵이었다. 해가 뜨지 않고 습하기만 하던 작년 여름은 어찌나 숨이 막히던지. 그 와중에 코로나 특보로 방송은 심심하면 죽곤 했다. 출근하지 않는 일주일 중 사흘을 집에서 보내는 것도 버거운데 방송이 죽어서 집에만 있는 날이 빈번해졌다. 그 와중에 옆집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 아침 일곱시 반부터 들려오는 소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람이가 이곳을 알려주었다.
동네 오가며 이곳을 봤을 땐 場이라는 한자를 크게 써둔채 오랜시간 공사를 하길래 숙박 공간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근사하게 리모델링해서 1층은 커피숍 2층 일부는 공유오피스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말을 포함한 24시간 언제든 이용 가능 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집에서 도보 6분 거리... 그야말로 일하다 말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돌아올 수 있는 완벽한 시공간...

일주일에 출근하지 않는 사흘, 그리고 오전 출근하는 날 잠시 들렸다 가는 용도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뭔가 써볼까 하고 자료를 잔뜩 공부하기도 했었고, 알바가 들어오면 출퇴근 틈틈이 완성해서 리모델링비에 보태기도 하고. 그리고 막상 할 일이 없는 날엔 통창을 배경 삼아 넋을 놓기도 했었지.

나는 이곳에서 커다란 창문이 선사하는 4계절의 향연을 만끽했다.
겨울 어느 날이던가, 함박눈이 오던 날이었다. 여의도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방향을 바꿔 연남장에 들렀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눈이 오는 소리를 한참 듣고 일어설 정도로, 나는 이 공간이 주는 사계절의 기쁨을 잘 만끽해왔다.


매미의 노래, 낙엽이 지는 소리, 어두운 밤을 밝히던 함박눈의 냄새, 창문을 열면 스며드는 아카시아꽃들의 체취...

백수가 된 뒤, 이곳을 거점 삼아 집 공사를 하고 아르바이트 다큐도 몇 편 말았다. 잠시 기획했던 프로그램을 정리하고 나온 뒤 갈 곳 없던(?) 나를 받아준 것도 바로 연남장. 오래도록 이용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다니 아쉽지만, 훗날 내가 어떤 공간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대체 공유오피스에 어떻게 카스텔리106 정품 (심지어 빈티지도 아님) 이 서너개, 허먼밀러 임스체어가 놓여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의자가 어울릴만큼 한가하고 한산했고,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그 한산함 때문에 문을 닫는다는 건 이 부동산에 미친 서울에서 예상한 결말이 가능한 일이었고 1년간의 소중한 경험을 뒤로하고
이제 또 인사를 할 차례다.

안녕 연남장
이곳 밖을 내다보며 그리던 꿈들이 무척 그리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