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일기는 온통 불안함 뿐이었다 자신을 다독이는 가운데서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 알량함이 드러나는 일기장이었다. 오늘 그거 하려고 했는데 못했다 꾐에 빠져 노닥거렸다 반성이 아닌 푸념에 가까운 글들이 가득했다 다시 읽어도 흥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 그만큼 절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배낭여행 일기장에는 온통 돈 이야기 뿐이었다 사치와 낭비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궁상과 쪼들림 두 단어가 지배하는 시기였다 어디서 얼만큼 줄여야하는지 대책이 없었다 식빵을 뜯으면서 '맛 없다' 한마디를 적어 놓지 못하는 그러면서 그 도시에 대한 온갖 불평이 나열 가득한 일기였다.
또 하나는 지루함이었다 역 앞에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마냥 기차를 기다리다 보면 말을 하고 싶어서 혀를 꺠물 지경이었다. 아무말이나 일기장에 주절거렸다. 학교 생각 집 생각 나라 걱정 동아리 생각 주변 친구들 얼굴. 떠오르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그래도 다시 보면 일기장에 그 모든 불평 불만과 무료함을 털어 놓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일기장을 사야겠다.
일을 시작하면서 일기를 그만 쓰게 됐다.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됐던것도 같다.
자판의 편리함. 언제든 쓰고 부끄러운 단어를 수정할 수 있는 웹상의 문서는 너무나 편리하다. 하지만 '삭제하시겠습니까' 한 단어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자꾸만 덧대고 수정해버려서 그때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지금을 토로하고 지금을 욕하고 지금을 불평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일기장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