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은 오늘 아침 우리집에서 직장으로 향하는 15*번 버스에서 일어난 일임을 밝혀둡니다.
첫번째, 존재 알리기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그는 버스기사 앞에 섰다.
13분, 아니 15분만에 한대가 왔다면서 운전대를 잡은 기사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틀렸다.
기다리는 시간을 13분이라고 말했다가 갑자기 2분을 뻥튀기하는 바람에 신용도는 바닥을 쳤다. 시시각각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그 어떤 사실도 왜곡하는 인간임을 드러냈을 뿐이다.
두번째, 존재 드러내기
기사가 받아주지 않자 그는 화제를 바꿨다. 아니, 분노 표출 대상을 바꿨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대상은 버스 안의 존재로 옮겨졌다. 버스를 채우고 있는 전 승객을 향해 성질을 냈다. 9시 30분이 지났는데 사람이 왜그렇게 많냐며 청년 실업과 사회 불안을 탓했다.
모든 직장인들이 9시에 출근한다는 편협한 사고를 가진 인간이었다.
나는 백수가 사회낙오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수를 사회 낙오자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존재하기에 졸지에 사회낙오자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나는 과한 업무에 시달리는 사무실의 농노란 말이다!
세번째, 남을 공격한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가치가 빛나는 것은 아닐텐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버스에 타셨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흘낏 뒤를 돌아다 봤다. 아직 서계시는거 같기에 이 자리 앉으시라고 일어났는데, 할아버지 앞에는 버젓히 빈자리가 있었다.
"나 이제 곧 내려. 괜찮아."
양보와 사양의 미덕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흡사 도덕책이 뭐냐 바른생활을 넘겨본것 같았다. 어저쩡하게 다시 자리에 앉으니까 내리기 편한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아가씨가 일어섰다.
"그럼 여기 앉아계세요."
할아버지는 내게 했던 대답을 그대로 옮겼다. 한학년 올라간 도덕책이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사나이는 자신의 등장과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장면에서도 소외되기 싫었나보다.
다시금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기 시작했다. 삐딱한 정체성의 위용을 드러냈다.
노친네들이 경로석에 앉지 않으면 젊은 사람들이 앉지를 못한다는 둥. 지하철 경로석 두고 왜 일반석 쪽으로 오냐는 둥 거침 없는 공격을 시도했다.
우리야 아까부터 그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타인을 공격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 막 버스를 타신 할아버님은 사전 정보가 없었을 것이다. 혹시 '그저 늙은 내가 공공대중교통 이용하는게 죄다.' 라고 생각하셨으면 어쩌지? 할아버지가 겪었을 당황스러움과 민구함에 내가 송구스러울 지경이었다. 여튼 할아버지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셨다.
'할아버지 저 인간 아까부터 저랬어요'라고 한마디 해드리고 싶었다.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의 존재감 드러내기는 멈추지 않았다.
맞받아 쳐주는 이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그가 언제까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지는 모르겠다. 그는 그토록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채 비뚫어진 분노는 자칫 잘못하면 저멀리 은하계를 건너 저먼 장미성운 말머리성운을 지나 안드로메다까지 향한다.
결론. 방향이 잘못됐으면 틀기라도 했어야지.
그는 어쩌면 소외되고 소외되어서 외로운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존재감은 오늘 만천하에 드러났을지 모르나, 버스 안의 수많은 사람들은 목소리와 욕설 따라 드러나는 그의 존재감을 철저히 무시했다.
드러낸다고 해서 모두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상쾌한 나의 아침을 돌려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