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선배 언니의 결혼식이었다. 탈 선배라서 더러더러 학생회관 사람들 얼굴은 보겠다 싶었다. 근데 거기서 사학과 03 후배를 만날줄은 꿈에도 몰랐다. (임마, 그러고 보니까 오티날 날짜 못맞춰서 나타난 너를 받은건 나였돠?? 근데 대체 왜 우리 옆동아리로 들어갔니?ㅋㅋ) 여튼 그 후배가 아직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 자체도 무시무시했는데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나 더 전했다.
 얼마 전까지 학교내에서 사학과 '01'을 볼 수 있었다고. 이제 몇개월 후면 '10'학번이 나타날텐데, 대체 어떻게 그럴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여튼 '01'이 있었다고. 그것도 군미필자인 여자가! 하나도 아닌! '몇 명' 있었다고 말이다.

졸업 후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 일 중 하나는 잉여인간으로 산다 하더라도, 학교를 박차고 나온 거였다. 이리저리 비벼보면 조교라던지 다양한 길이야 생길 수 있었겠지만, 백수로 살 지언정 정녕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저축 한 푼 없이 살았던 2년이었지만 세상으로 나왔고 여기저기 구르며 배운 것이 다 허튼 것만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나 자신의 한계를 체념했고. 그 덕에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다. 고민하고 부딪히고 찌질해지고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 이자리의 소중함을 잘 안다.

만일 내가 지금까지 학교라는 굴레에 매여 있었다면, 얼마나 소심하고 자랐을 것인가. 만나던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이미 떠난 사람들의 뒷자리를 보며, 이러쿵 저러쿵 말이나 전하고. 그네들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갈 동안, 같은 자리만 맴돌았을 수년. 그렇게 버려버렸을 내 인생을 상상해 보면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결국 학교란 자리에 평생 남을 수는 없는 일이고, 이 나이 먹고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곳에 적응한다 쳐보자.
아악! 생각만해도 군대 재입대 같이 힘겹게 느껴진다.
게다가 근 십 년 가까이, 같은 장소 같은 사람들과 마주하며 십수년 머무르면서 퇴적된 불평 불만은 얼마나 단단해져 나를 억눌렀을까. 숨이 막힌다. 지금 내가 참 다행이다.
 
다시 한 번 내가 있는 이 자리에 감사함을 느낀다. 2년 백수시절마자 고맙고 소중하다. 굴레를 끊을 수 있었던 내 용기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대단하다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입장에서 말이다)



* 선배 언니의 결혼식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참 많이 보였다. 이런 자리 아니면 이 그리운 얼굴들 다시 모이기란 참 힘들겠다 싶었다. 인사대 단대 회장보다 잘생겨서, 단지 그 하나만으로도 정말 나의 자랑이었던 01 회장오빠부터, 03년 내가 그렇게 속썩였던 정*언니는 길자님 꼭 닮은 아들을 데리고 왔다. *은 언니는 다음달에 시집가고, 내가 행복을 그토록 빌었던 컬쳐는 오늘 다시 카메라를 잡았고, 사범대 부짱님, 옆동아리 오빠, 학생회관 방송실 사람들. 다시 만나다 보니 이 자리, 드문드문 사라진 얼굴도 기억났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 했다. 그 얼굴들 앞에다 대고 깔깔대다 보니 오래간만에 가슴이 설렌다. 다들 그 시절을 다들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왜 안된다고만 생각했었을까. 그 어린날 내 단순했던 판단은 아직도 가슴 아프다. 평생 남겠다 싶었다. 지*언니가, 자꾸만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런말을 들으면 난 아직도 울고만 싶다. 난 너무 죄인이라 차마 미안하다고도 말을 못한다. 아직도.



*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유행가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시절, 귓가를 울리는 멜로디는 항상 같은 방 동아리 청맥의 공연곡이었다. 덕분에 80년대 학번 90년대 초반학번이 알만한 민중가요가 그 시절 내 유행가였다. 노래란, 기억이란,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이기에. 돌아오는 노래 옛 노래들이 떠올랐다. 옆동아리 오빠가 부르던 직녀에게. 얼굴찌푸리지 말아요. 그날이 오면. 나는 낭만 넘치는 센치한 여자기에. 그렇게 모두들 앞에서 깔깔거리고 나댔으면서도 뒤돌자 마자, '힘들고 버겁던 그 때'가 '그럼에도 다 함께 있었던 그시절'이 그리워 훌쩍훌쩍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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