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기로 마음먹은 날은 버스티켓이 매진돼 있었다. 덕분에 바릴로체에 예정보다 하루 더 묵어야 하는데 내가 묵는 호스텔에 방이 없었다. 묵었던 호스텔의 체크아웃 시간과 묵어야할 호스텔의 체크인 시간에 텀이 있길래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바릴로체 센트로에 앉아 있다. 탁트인 파란 하늘과 호수가 보이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못한다. 내 옆에 놓인 배낭과 트렁크 덕분에 심정적으론 갈곳 없는 이민자의 심정. 흑흑

18일 금요일 날 같은 버스를 타고 헤어진 세이지를 마지막으로 며칠째 동양인 콧배기도 못보고 있다. 그토록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낸가 한국말은 커녕, 짧은 영어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어젯밤 같은 방 프랑스 여자애에게 '신, 너 영어 하는 거 맞니?' 라는 굴욕을 당했지만 뭐 난 괜찮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흑흑.

(생각하면 만난다고 방금 세이지와 마주쳤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버스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고 센트로는 정말 발도장만 찍고 사라진다고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면 깔라파떼에서 만났던 한국인들이 많겠지. 갑자기 엘찰뗀 버스 터미널에서 들었던 쓸쓸한 마음이 엄습한다. 에잇! 이 우울한 감정을 떨치기 위해 싸놓은 사과라도 먹어야겠다.)

 


 

오또 산으로 향하는 길
만세 만세! 그토록 소원하던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투어가격을 아끼느라 여행안내소에서 대충 버스 노선을 묻고 빠뉴엘로 항구로 향했다. 유람선은 안타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그냥 항구 구경이라도 해야겠단 심정이 들어서 여기저기 서성이다가. 자리를 잡고 주저 앉아서 싸왔던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점점 드는 생각인데. 내가 싸온 샌드위치는 참 맛 없다. 그냥 시중에서 사는 빵이랑 쥬스를 사마시는 게 나을 정도. ㅠㅅㅠ 그냥 아무 빵이나 사먹는 것보다 훨씬 진짜 훨씬, 맛이 없는데 계속 요리를 해야하는 걸까 커다란 의문이 든다.

여튼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가기 위해서 20번 버스를 한 없이 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애정행각을 보이는 커플이 보였다. 제길 이놈의 남미 휴양지! 남녀만 있다하면, 부둥켜 있고 얽혀 있네! 속으로 외치며 당연히 나와 일말의 공통점 없는 서양 사람이겠거니 그들을 지나쳤다. 근데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
 
“저기요,”

대체 며칠만에 들어보는 한글로 완벽 표기 가능한 언어인가? ‘꺄악’하는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둘의 손을 얼싸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깜빠나리오 언덕으로 GOGO. 언덕에서 리프트를 타고 전망을 다 구경하고 난 다음에는 잠시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기로 했다.



다시 만난 언니 오빠는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여*언니와 철*오빠. 직장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한 4년차 부부. 둘은 세계 일주를 목표로 한국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둘이 여행을 떠나게 된 동기는 우연히 보게된 BBC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죽기 전에 꼭 봐야할 100가지’를 보고 정말 죽기전에 가봐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어느 날 내가 계산을 해봤어요.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운 좋게 휴가를 많이 얻어봐야 1년에 15일이 정도. 그것도 월차 같은 걸 눈치 안보면서 썼을 때 이야기더라고요. 운 좋게 직장이 망하지 않아서, 오래 한 직장을 다닌다고 쳐도 20년. 그럼 15(일) 곱하기 20(년)은 300. 1년도 안 되는 날짜예요.
그래서 우리 부부는 전세금을 빼서 딱 1년간의 휴가를 갖기로 했어요.”

그토록 긴 인생에서 딱 일 년. 전세금을 빼서 시작한 세계 여행. 하지만 주변에서 말리는 만류의 목소리도 많았다고 한다. 미쳤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무모한 용기 아니냔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게 바로 이 여행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거라고 언니와 오빠는 말해줬다.
한국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던 1년이라는 공백. 하지만 인생은 길다. 수십번의 일년이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 수십번 중에서 1년도 짬내기 어려운 삶이란 무언가 고민이 든다.
 
떠나기 전 비행기에서 심심풀이로 읽었던 동물농장의 대사가 떠오른다. 동물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다 죽어가는 가축들을 일깨우기 위한 지도자의 말이었다.

“영국에서는 어떠한 동물도 태어나서 1년이 지나면 행복이나 여가란 말의 뜻을 모르게 됩니다. 영국에 있는 동물들에게는 자유가 없고 불행과 예속이 전부입니다.”

백여년 전. 당시 노동자들이 러시아 혁명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쓰였던  저 문장이 나와 내 친구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불과 몇시간 전 새벽. 호스텔 입구를 몰라서 헤매고 또 헤맸던 것이 모두 꿈 같다. 간신히 입구를 찾아 자고 있던 직원을 깨우는 민폐 끝에 받게 된 도미토리 룸. 짧은 다리로 2층 침대에 올라가지 못해 나는 고요한 암흑속 침대에 매달려 몇분간 바둥거려야 했다. 서너번의 추락도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나는 간신히 2층 침대 위에 안착. 깔깔이를 입은 채로 꿈나라로 들어갔다.

강렬한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눈파란 서양인 아저씨 둘이 나를 향해 좌우대칭으로 손을 흔들고 있넹-. 대머리 영국인 아저씨의 이름은 팀. 미국인 할아버지뻘 아저씨의 이름은 탐. 이름을 듣고 빵터졌다.
그리고 나는 초면이고 하나도 안친하다는 무례를 무릅쓰고 둘에게 (그어떤 말라깽이도 살을 찌우고야 마는 저주받은 악마의 간식)'팀탐'을 아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쉽게도 모르고 있었다. 캐나다산 과자인데 무척 맛있다는 간단한 설명만 덧붙였다.
보기만해도 나 활달해 나 기분좋아 온몸으로 말하고 조증돋는 아저씨 탐은 샌프란시스코 출신이다. 그에게 짧은 영어지만 '이프유고잉투샌프란시스코~'라며 노래를 불러줬더니 더더욱 기뻐했다. 

오늘의 가장 큰 과제는 떠날 버스표 예매하기였는데, 불행하게도 내가 원하던 날짜에는 버스표가 없다. 할일도 없는데 하루를 더 머무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게다가 정말 오늘 하루종일 동양인을 단 한명도 마주치지 못하는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슬슬 불행의 화살이 날 겨누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기운내기로 했다.

여튼 오늘의 계획.
1. 저녁을 먹는다. 쇠고기를 먹는다. 배터지게 먹는다. 
2. 없군. 

불의 기억이나 마저 읽어야겠다. 




  
저녁을 먹은 뒤에 쓰는 일기
나이 서른을 먹었지만 신세대 돋게 '헐...?'이라는 한 단어로 스스로에게 반문 중이다. 지금 내가 본게 맞는지, 정말 제대로 본게 맞는지 몇번이고 다시 새기고 있다. 나 지금 팀의 엉덩이를 본거 같아;;;; 내가 유럽유스호스텔에서도 돈아끼느라 대부분 믹스 룸에 있었는데, 그때도 남자 엉덩이를 본적은 없었다. 근데 나 지금 방금 전 이 방에서 물론 살짝 뒤돌아 있긴 했지만 팀의 엉덩이를 본거 같아;;;;; 팀 내가 지금 버젓히 짐 정리하고 있는데 대놓고 옷갈아 입은거 맞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맹세컨데 중요부위는 못보고요 일단 엉덩이를 봤는데요 그게 엉덩인줄 어떻게 알았냐면 썬텐자국난 백인의 피부색이 그대로.....

담배맛은 모르지만, 그냥 오늘은 왠지 담배가 피우고 싶다.

사실 나는 팀을 붙잡고 말하고 싶다. 팀 나를 남자로 아는거 아니지? 아니면 동양인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건? 너따위로 생겨서 레이디 대접은 바라지 말라는 뜻인가? -_- (그 옛날 그림그린다고 난리 쳤을 때 누드크로키도 다녀봤던 나지만)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여튼 일기를 다 쓰고 할일이 없을 예정이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일단 <불의 기억>이나 마저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