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90년대 해적판 만화를 아느냐 - 꽃보다 남자 아니죠, 오렌지보이 맞습니다!

꽃남 열풍이란 말로도 모자란다고 했다.
남자 주인공 캐스팅을 보고 ‘완전 따오밍쓰네’라고 비웃던 나.... 드라마 2회 시청을 마치자마자, 노트북에 ‘구준표 폴더’를 만들었다.
연애 중인 친구는 구준표가 금잔디에게 키스할 때마다 기도하듯 경건한 자세로 두 손이 모아진다고 한다. 월요일과 화요일 10시와 11시대에는 여자들에게 문자 보내는 건 엄금이라고 했다. ‘아아아악 구준표!!!!!!!!!!!!!’란 문자 밖에 오지 않는다고 .

이미 임자 있는 몸인 20대의 여심과 순정을 뒤흔드는 이 드라마. 이 드라마 왜 이렇게 인기 있는 걸까? 이렇게 과열되어도 좋은 걸까? 나... 너에게 빠져도 되는거니, 구준표? ㅋㅋ

하지만 만화책 <꽃보다 남자>의 기억을 떠올려 보라. 이 인기가 부족하면 부족했지 과한 것은 절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알게 되어서 대학교를 졸업한 24살 때 끝난 (지독하리만치 장기 연재한) 만화. 일본 순정만화 역사사상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이 만화. 신간이 나온 날 학교에 가져가면 앞자리 1번부터 뒷자리 46번까지 전원이 돌려보고 한반 전체가 하나 되어 쉬는 시간마다 ‘황보명!’ 또는 ‘윤지민!’을 외치게 만든 만화.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갖고 싶은 만화는 ‘소유해야만’ 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 만화책을 가지고 있다. KBS 방영판 꽃보다 남자 5화를 보던 날이었던가? 결국 이 드라마는 옥상 창고를 뒤지게 만들었고. 7개의 라면박스를 다 흐트러트린 결과. 보물 같은 만화책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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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낸 만화책의 제목은 <오렌지 보이>. <꽃보다 남자>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히트친 만화의 (라이센스를 따지 않은) 불법무단복제판이 었기 때문에 네이밍센스가 이렇다. 이 만화의 제목이 ‘오렌지’보이 인건, 90년대 초반 유흥과 풍기 문란으로 당시 사회에 커다란 문제로 화두된 ‘오렌지 족’에서 왔다는 걸 기억할 사람들이 있을지..... 해적판을 찍어낸 번역가 입장에서는 F4가 오렌지 족으로 보였음직도...(충분)하다.

꺼내어 다시 놓고 보니, 그런데 이 만화 심상치가 않다. 이 만화가 건드린 사회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정유나(일본이름 츠쿠시, 한국드라마 이름 금잔디)를 향한 ‘왕따’는 당시 일본에서 큰 화두가 된 ‘이지메’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비뚤어진 사랑으로 정유나를 괴롭히는 후배 혜연(일본이름 사쿠라코, 한국드라마 에서는 이시영이 맡은 역)은 외모지상주의가 낳은 세기의 문제아(?) 이다. (비록 정유나의 도움으로 개과천선하긴 한다만;;)

하지만 그 어떤 것 보다 이 만화가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것은 ‘권력’이다. 그리고 ‘권력을 향한 항거’이다.

시장경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신(神)이란 돈을 의미했고. F4, 그들은 신의 아들이었다. 그들을 계급의 꼭대기에 올려 주고, 그 어떤 폭력과 범죄를 용인해 준 것 역시 돈이었고, 세상이 그들을 ‘돈’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 사회에서 ‘돈’으로 따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냐만은)

자기 힘으로 돈 한 번 벌어본 적 없는 주제에!’

정유나(=츠쿠시, 금잔디)의 대사 그대로 만화는 이 사회의 병폐를 그대로 꼬집어 내고 있다. 비록 '신데렐라'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덧칠해져 있긴 하지만.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토록 사회부조리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만화! 오렌지보이(꽃보다남자)가 순정 로맨스의 장르의 대서사시로 자리 매김한 것은 어찌보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오렌지보이가(=꽃보다남자) 자본이라는 절대 권력에 맞서는 한 여성의 용기를 그린 장작 37권에 걸친 만화라고 한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황보명도 정유나를 F4에 맞선 유일한 여성이라고 해줬는데?)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한 어른은 대한민국 여자들이 얼마나 돈에 집착하는지 보여주는 시청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달콤하게 포장해 내놓건 쓰고 악취 나게 내놓건 이 만화는 우리 사회, 더 나아가서는 현 인간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드러내다 못해 만천하에 까발린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고.

동화 속 공주들은 항상 왕자를 만났다. 재투성이 아가씨도 왕자를 만났다. ‘왕’이라는 피라미드의 꼭지점이 존재하는 한 신분사회에서는 윗 계급을 꿈꿀 수 밖에 없고. 사회구조가 그러한데 그걸 나쁘다고 마냥 욕할 수는 없다. 욕하기 전에‘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라는 십년 전 노래가사를 현실에 적용해 보는 게 조금 더 건설적인 일이 분명하다. 

만화가 연재될 당시인 1992년에도 그러했지만 여전하고 더 심화화 된 2009년 자본주의 사회. 그 절대 권력에 대항하는 정유나(츠쿠시 혹은 금잔디). 비록 그녀가 신데렐라의 삶을 살게 된다 할지라도(만화 속 둘은 이어지지 않은 채 미래를 약속하며 열린 결말을 맞이했다.), 손 댈 수 조차 없는 절대적인 권력에 맞서 끝까지 당당했던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아이스크림마냥, 로맨틱하고 달콤해야할 순정만화에서 조차 ‘절대권력’과 ‘계급’을 따지게 만드는 이 사회를 지탄해본다. 지금이야 이 썩어 문드러진 사회가 나를 이리 냉혹하게 만들어 권력과 계급을 계산하지만! 10년 전 <오렌지 보이>에 열광하던 나는 <오렌지보이>를 보며 백마탄 왕자님을 꿈꾸던 지고지순한 소녀였었기에....
 





* 꽃보다 남자가 아닌 해적판 <오렌지 보이>에서는 90년대 불법 복제된 해적판 만화의 온상을 알 수 있다. 애써 고등학생을 대학생으로 만들다 보니 나이를 잊고 무리하게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기모노가 한복으로 변하는 순식간의 변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부실해 보이는 ‘한국화’과정을 거친 컷들은 <오렌지보이>의 또다른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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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노가 한복으로 변하는 과정. 참 쉽죠? 그래 참 쉽다;;;


* 대체 이 <오렌지 보이>는 해적판 만화인 주제에 자체 검열을 왜 시도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차피 불법인 주제에 청소년의 성윤리에 큰 타격을 줘서는 안 된다는 기준이 있었던 것일까? 여하튼 90년대 일본 해적판 만화를 즐겨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찐하고 애절한 키스 장면. 뜬금없이 등장해 여주와 남주의 입술과 입술을 가리던 꽃무더기. 어설프게 런닝 셔츠로 급조된(?) 속옷. 주름하나 없이 맨몸라인을 그대로 살려주는 정체불명의 티셔츠. 이런 자체 검열은 오히려 묘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걸 그들은 아나?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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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별로 야하지 않은 내용인데, 갑자기 런닝셔츠기 덧입혀진 수정을 보면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금기는 상상력을 증폭시키는걸 정녕 삼성코믹스.. 니들은 모른단 말이냐?

* 전권을 읽고 나면 12년간 연재된 만화답게 작가 카미오 요코 의 날로 발전(?)하는 그림체를 볼 수 있다. 일취월장하는 그림체(그러기엔 너무 길지만) 도 이 만화의 중요 포인트다!

* 순정만화 답게 이들 사랑에 몇 번의 위기가 몰아쳤는지 모르겠다. 셀 수가 없다. 윤지민(일본판 루이, 한국판 김현중), 혜연(사쿠라코), 외국인 남자, 국회의원아들 종오, 하급생 모델, 해변에서 함께 오징어팔던 놈, 황보명의 사촌으로 사칭하는 놈, 황보명의 어머니, 기억상실증 걸리고 병원에서 만난 여자애 등등. 이들 사랑은 너무나 풍파가 많았다. 굳이 전권을 읽어볼 요량이라면, 또 다른 라이벌에 등장에 너무 놀라하지 말 것. 정유나(츠쿠시, 금잔디)의 인생이 너무 밑바닥에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해도 지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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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인기 있었던 해적판 만화는 절반은 정체불명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권수를 늘려 내야하는데 대책없이 얇은 페이지로 출판할 수 없다는 양심은 좋은데, 한 책의 3분의 2가량이 단편으로 채워지면 이건 잡지 연재물도 아니고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이러나 저러나 분통이터지기 마련이다



* 단순 멍청 무식한 황보명은 멍청해야 맛, 그리고 (짐승같이) 정유나를 향해 과도한 집착을 보여줘야 맛이다. 개인적으로 KBS판 <꽃보다 남자>에 황보명(구준표)의 질투심을 자극하면서 곳곳에 코믹적인 요소를 심어줄 상엽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원작 관련한 몇가지 tip

원래 꽃보다 남자의 ‘F4’는 ‘F5’였다고 한다(써놓고 보니 키보드 키 같다;;;) 근데 작가였던 카미오 요코가 다음회 예고를 넣기 위해 컬러 컷을 넣는다는 게 스케치를 끝내고 나니 남자 4명 밖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덕분에 F4로 대수정 되었다고.

카미오 요코는 원래 윤지민(일본판 루이, 한국판 김현중역)을 정유나(츠쿠시, 금잔디)와 엮어주려 했으나 자꾸 그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황보명과 엮어지는 바람에 어쩔수 없었다고;;;

*개인적인 드라마에 대한 요청.

구준표는 더 멍청해야 캐릭터가 산다. 개그가 안살아 있다. 게다가 철이 너무 일찍 들었다. 금잔디(정유나, 츠쿠시) 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과거를 뉘우쳐 가야하는데 이건 뭐... 혼자 다 커버려서 성장의 맛이 하나도 없다.

금잔디는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 중 하나이다. 그녀는 ‘보통’을 표현하는 대명사여야 하고, 이 만화 속에선 ‘유일하게’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금잔디는 마냥 떽떽대기만 하는 통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감정이입을 막고 있단 소리다.

구혜선이 억지스럽게 밥을 우걱우걱 먹는 씬은 8,9년 전 유행하던 명랑소녀성장기를 보는 것 같아서 촌스럽고 어색하다. 게다가 중간 중간 되도 않게 어설프게 우에노 주리가 연기해 낸 ‘노다메’를 흉내 낸 것은 몹시 불편하다. (원작인 두 만화를 봐라. 두 만화 속 두 캐릭터의 닮은 점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정상적이고 현실적인 여성 금잔디가 보고 싶다. 츠쿠시한테 쓸데 없이 ‘한(恨)’따위를 심지 말아 달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