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0시 32분
토론토 공항의 동양인 여자는 바로 인경 언니였다. 노트북으로 네이트온 하는 걸 보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우다다다 한국말을 쏟아냈다. 푸하하.
땅고 선생님이고 아르헨티나만 무려 3번째 방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경 언니는.... 언니는..... 언니는.....;;;;  음... 무려 서른살까지 방송 작가였다고 한다. 서른살에 방송일의 불투명함을 느끼고 관뒀다는데.... 이거 이거 나의 고민과 너무 맞닿아 있는거 아닌지. 결국 나도 이 여행을 끝으로 관둬야겠다라고 결심하는거 아냐?
인영 언니에게 나의 여행계획 표를 보여줬는데, 언니가 빵터졌다. '버릇 남 못주고 촬영스케쥴짰구나 그래, 섭외는 다 됐니?'라고. 나도 한참 웃었다.
언니가 스케쥴을 보면서 말해주길 시간이 딱 두달이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면 리마와 키또를 빼고 보고타로는 비행기로 넘어가는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일주일이나 남게 되고 있고 싶은 곳에 좀 더 있고 새로운 곳을 추가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도 있었고 말이다. 언니가 뿌노에서 아만따니 섬 투어를 강추해줬는데, 이야길 들으니 나도 급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캐나다를 떠나 칠레 산티아고행 비행기에 앉아 있다. 이번에는 창가 자리로 앉았는데 찬바람이 새로새록 스며들어오네. 다행히 옆자리는 비어 있어서 대 만족이다. 여튼 드디어 남미 상공에 떠 있는 기념으로 이 여행의 시작점이 어딜까를 생각해 봤다.

단연 첫번째로 꼽히는 게 축구의 신(神) 마라도나 였다. 길거리에서 바이올린 켜면서 탱고 추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외쳤다. 저건 가서 봐야해! 죽기 전에 봐야해!
두번째로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 정도가 되겠다. 근데 사실 이 책 선물받고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남아메리카 땅을 직접 밟고 싶단 생각은 안했는데 말이다. 내용 자체가 비극의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고, 혁명의 열기가 너무 펄펄 끓어서. 그 땅에 있으면 나도 휩쓸릴거 같고 그랬다.
여튼 그 두 개가 아프리카 보다는 남아메리카를 선택하는데 한몫했다. 결과가 어떻든, 후회는 하지 않으련다.


칠레 산띠아고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길 칠레 시간 오전 10시 55분
길고긴 (35시간정도 되는) 2월 8일이 끝났다. 나 저녁 6시에 비행기 탔는데, 진짜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출발 전에는 시차 적응을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 따위. 장거리 비행기가 모든걸 해결해 줍니다~ 그야말로 몸빵으로 때우는 인생이다. 주희 말로는 대륙간 이동이 노화의 최고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대륙을 넘나드는 이동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피곤하지 않아.

공항에 내리면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다. 2시간 걸리긴 하는데, 그냥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도 구경해보고 돈도 아끼고. 근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가 굉장히 의문이다. -_-
장기 여행은 두번째이기 때문에 자꾸만 예전 유럽배낭여행이 생각난다. 그떄 영국으로 어떻게 in했더라? 같은 민박집으로 이동하는 언니들을 우르르만났고, 다같이 지하철 타고 이동해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런던에는 형석이가 있어서 마음 편히 시작했기도 했고. 부활절이 끼어 있던 런던은 다 좋았다. 아주 드물게 날씨도 화창했고 공원도 좋았고 구획된 작은 가정집들도 사랑스러웠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어떨까.



불행이 자꾸 내 주변을 서성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
자꾸만 불행의 화살이 내 주변을 쏴대고 있다. 어제는 충북 아주머니가 비행기를 못타시더니 이번엔 인경언니 트렁크가 도착하지 않는 불상사가;;;; 거기다 리무진 버스는 파업 중이라 운행을 안한단다.
물론 나야 시내버스 타고 이동할 예정이라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자꾸만 드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불행의 화살이 실은 나를 조준하고 있었는데, 애꿎은 내 옆사람들이 죄다 맞고 있는거 아냐?!?!?!? 이러다가 내가 제대로 한방 맞는거 아냐?!?!?!?!


첫번째 숙소 남미사랑에 도착했다.
엉망진창인 나라 아르헨티나에 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근데 여기서 엉망진창은 부정적 의미가 절대 아님!

공항에서 숙소에 도착하기까지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내가 동전 2페소를 버스통에 넣는 법을 몰라서 헤매였고, 결국 내 대신 카드 찍어주는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 때부터 버스 안에 모든 사람들은 나만 바라보고 수근덕 수근덕.
하뽀네소 하뽀네사 이런 소리가 들리더니, 자기들끼리 아는 일본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카와이-' 이 단어가 나왔을 땐 나도 모르게 빵터졌다. 하지만 나는 시크한척 창밖만 내다봤다.(왜냐면 스페인어를 못하니깐요 흑흑 ;ㅁ;) 여튼 두시간 남짓 수 많은 아르헨트노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가방 쓰러지지 말라고 잡아주는 사람들부터 내가 한마디 하면 백마디로 대답해주는 아르헨티나 아주머니(물론 알아듣는 말은 없었습니다. 흑흑) 시내 구경하는 기분도 쏠쏠하고. 야자수가 가로수로 서 있는 이국적인 느낌도 신선하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정말 제대로 균형을 갖춘게 없다는 점이다. 수백년은 되어보이는 스페인식 건물 옆에 현대식 아파트가 뒤죽박죽 섞여 있고, 벽면이 거의다 헐어있어도 애써 고쳐서 획일화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근데 그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애써 고치지 않는다. 낡아버리고 퇴물이 되어도 밀어내고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그 가치만으로 인정받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이곳에 있으면 소모되고 버림받는 인생 같은건 없지 않을까? (건축이 사회를 반영한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재개발과 재건축이 판치는 한국이야 말로, '퇴물이 되면 꺼져'라는 구호처럼 느껴지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버스 안을 들여다 봤는데, 흑인 백인 인디오 그리고 황인종(=나)까지 뒤엉켜서 인종의 전시장 같다는 느낌이 한가득. 이방인으로 있지만, 지켜볼 수 있는게 너무 좋았다.

버스에 내려선 잠시 사고(?)가 있었다. 내가 묵을 숙소는 800번대. 센트로 가까이였는데, 친절이 너무 과한 아저씨가 2700번대에서 내려줬다. -_-;;; 버스를 다시 타려면 동전이 있어야하는데 동전이 없었다. 결국 그냥 걷기로 했다. 여기 100번지 정도면 100m가 넘는 거리인데, 결국 2km가 넘는 길을 트렁크를 끌고 배낭을 매고 걸어 왔다.
그러면서 또 다시 느낀건. 아! 여기는 보도블럭도 온전한게 없구나. 한국에선 과거 80년대 시절 전경과 대치하고 있으면 데모꾼들이 보도블럭을 깨서 던졌다는데, 여기도 데모 하나요? 맨날 하나요? 보도브럭 던지고 그러나요?!?!? 심지어 중간에 보도블럭이 제멋대로 디자인을 바꿔;;; 트렁크가 보도블럭에 적응하느라 고생좀 했다.나 역시 2km를 걸어오는 동안 트렁크 바퀴가 나가는게 아닌가 걱정 좀 하고. 

여튼 그렇게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다. 아직까진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무척 마음에 든다.
사워하기 위해선 슬리퍼로 쓸만한 신발이 필요하다고 간절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