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해온 테잎에 익숙한 풍경이 담겼다.
동네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ㄳ고등학교였다.

교육관련 프로그램을 하면서 뼈저리게 깨닫는 것은 하나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학교를 포함한 이 동네 아이들은 사교육과 공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열에서 얼마나 방치 되어 있었던가 하는 것.

강남권 아이들은 어머니들 사교육 열풍에 휘둘리고 지방권 아이들은 서울의 교육규제에 벗어나 최상위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그 사이 여백이 있으니 그게 바로 우리 동네였다. 서울권이기 때문에 학원규제나 과외 규제를 넘보지 못하고 그렇다고 뚜렷하게 대체할만한 공교육은 없는 상황.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학교 교육을 껌으로 알고 있는 배짱 좋은(대책 없는) 아이들. 과외를 받을 것도 아니면서 수업시간 당당하게 어퍼져 잠을 청하는 용기 있는 아이들. 여튼 그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었고, 이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ㄳ고등학교(감사고등학교 아니다;;)는 실제로 내 친구들 중 다수가 다닌 학교인데다가, 익숙한 동네 풍경이, 돌아다니다 보면 볼법한 여드름난 고딩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테잎을 보는 내내 즐거웠다. 그 중 나를 개폭소 하게 만든 장면이 있었는데.

수업시간 우리 출연자가 열심히 영어 지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모니터 한귀퉁이로 한 남자애의 모습이 보였다. 당당하게 지각하고 들어와서 태연하게 사물함을 열어제끼고 교과서를 챙기더니 기어이 우리 출연자 뒷자리에 앉는것이 아닌가!!

오오 저 대담함! 카메라고 나발이고 방송촬영이고 거시기고 한치의 거리낌+스스럼 없는 그 모습에서 나는 정말 10여년 전 우리 고등학교 교실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당시 우리반 애들의  지각 결석이 얼마나 많았냐면 학급일지에 결석조퇴란이 모자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애의 별명은 조뚱이었다.
나는 그애와 함께한 추억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겨울이 자리한 늦가을에도 언제나 덥다면서 교실 창문을 열어 제끼곤 했다. 주변 아이들의 빈축을 산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여튼 나는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는 그애를 보면서 조뚱의 사물함을 떠올렸다.

우리고등학교는 애시당초 수업시간 전부터 교과서를 꺼내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종이 치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교과서를 찾았고 사물함 열쇠를 찾아 여는 것이 귀찮은 애들은 옆반으로 들어가서 교과서를 빌려(집어)오곤 했었다.

문제는 사후처리였다. 애들의 대다수는 다시 책을 돌려주는 걸 귀찮아 하곤 했다. 그리곤 빌려온 교과서를 자신의 사물함에 처넣곤 했었다.

어느날 조뚱이 자신의 사물함을 열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조뚱의 사물함 속엔
국어 (상) 11권이 일렬로. 사이좋게, 보기좋게, 꽂혀 있었다.;;;
조뚱이 국어(상) 책을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국어(상)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지나쳐서 세상에 존재하는 국어(상)이란 국어(상)책은 오직 자신만이 소유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국어(상) 11권을 들킨 조뚱이 원래 주인에게 그 책을 돌려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우리 동네 고등학교에는 조뚱같은 아이들이 아직도 있을까,
수학I 책만 열다섯권 수집한다던지, 그런 아이들이 있을까?
당당하게 지각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고 카메라가 돌든 말든 방송에 자기 얼굴이 비추든 말든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엎드려 자는 그런 학생들이 있을까?

다시 고등학생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딱 하루만 고등학생이 돼보고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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