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전

타임퀘이크 2010. 11. 18. 12:29

그날은 매년 특수 한파가 부는 날이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겪은 그날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며칠전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듣기만해도 경건해지고 갸륵해지는 슬픈 피아노 반주가 쌩라이브로 흘러나와,
1년내내 신경질 내는 딸 뒷바라지한 엄마 생각에 가슴아파 죄스러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실에서 노닥노닥 세월 죽이던 내 자신이 미워져,
결국 교회 예비시간에 눈물 폭발. 아주 대폭발!
그때 운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학년 거의 대부분 애들이 울고 있었으니까 창피하진 않다. 이를테면 그런거다. 학교 수련회 가서 촛불켜놓고 엄마 얼굴 떠올리라고 하면 대게는 울고야 마는 공식같은 순서. 

반면 막상 당일이 되니 별 긴장감도 없고 떨리지도 않고 그랬다.
아침 집을 나서면서 가족들한테 인사할때는 벌써 실실 쪼개는 상태였다. 수능 끝나고 놀 생각에 벌써 가슴이 벅찼던게지.

오토바이 타고 입장했다는 같은반 누구와는 다르게 나는 적정시간을 맞춰갔다. 고등학교 2년간 지각비를 걷었던 나였으니까. 뭐든 늦어서 조급한게 최고로 싫었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후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원이 적었다. 다른 학교는 북치는 애들도 있고 구령붙이는 애들도 있는데 우리학교는 크기만큼 조촐했다. 그게 다행이었다. 수능응원 잘한다고 대학간다면 1학년때부터 하루 네댓시간 야자 대신 응원연습했겠지.
중간에 붙잡혔는데 참 창피하더라, 할말도 없고 아 이래서 작년 재작년 선배들도 빚진돈 못갚는 사람처럼 학교 건물로 들어갔구나.

교실 안 같은 고등학교 출신은 단 하나도 없었다. 6반 짜리 작은 학교. 문과이과 여자남자 독어반불어반을 쪼개어 교실이 배정되면 그럴수 밖에 없다. 다만 중학교 때 동창 얼굴이 눈에 띄어서 입에 쟈크 채우는건 면할 수 있었다. 점심을 같이 먹기로한 고등학교 애들 몇몇이 방문했다. 똑같은 포장지로 싼 똑같은 메이커의 초코렛을 내밀고 교환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잘봐 힘내 같은 이야길 했던거 같다. 평소 그냥 나누던 이야기인데 왜 그렇게 신라 5만군에 맞서는 백제군같은 비장함이 풍겼는지는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수천번은 더 들은 주입식 내용이니까 모를리 없었다.
오늘 하루가 대다수 아이들의 삶의 상당 부분을 결정짓는 다는 걸.

서로 응원 하다보니 동지애 같은것도 샘솟았다. 오늘 우리는 (가)형 (나)형 비록 문제의 순서는 다를지라도 같은 문제를 풀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마킹을 한다.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한다는 공통점이 끈끈한 연대를 만들었다. 사실 싸워야할 대상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서로인데 눈앞에 놓인 시험지에 시야를 뺏겼다. 그래서 칼날이 시험지 너머 서로를 겨누고 있는걸 모르고 서로의 건투를 빌었다.

언어를 풀고 한시간이 남았다. 위에 없는 내용을 찾으시오, 위의 내용과 같은것을 찾으시오 세문제가 걸렸지만 다시 들여다 보지 않았다. (결국 그 세문제를 틀렸다)
수학은 행렬문제를 찍었다. 추석연휴 4박5일 서울학원에서 3만원짜리 행렬 단과를 들은걸 후회했다. 차라리 마음 편히 놀기라도 할걸.
사탐은 무난했고 과탐은 절대 무난하지 않았고
영어는 원래 못했다. 내가 제대로 해석하는 문장은 단하나도 없다시피 했다.
독일어는 너무 쉽게 나왔다. 초등학교 1학년도 알법한 시계를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가 나왔고, 슈베르트 얼굴만 알고 있어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나왔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마킹을 끝낸건 나만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교실은 끝나기 20분전에 시험지를 걷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옆자리 앉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대부고야 나는 서울여고야 독일어는 쉬웠는데 중국어는 어땠니 우리학교는 끝나고 수련회를 간대 우리는 시험을 5일이나 친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제2외국어가 얼마나 쉬웠는지 남는 시간 러시아어랑 아랍어 시험지를 풀었던 아이도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는 교회 애들을 만났다. 다같이 우*이네서 밥을 먹고 배를 두드린 우리들은 주발이네로 향했다. 센스 있는 주발이네 어머니는 다과를 한상 준비하셨다. 하지만 센스 없는 주발이는 혼자 방안에 들어가 채점을 마쳤다. 방문을 열고 기뻐하던 주발이의 점수는 평소보다 괜찮은 점수가 였다. 하지만 주발이가 자신의 점수를 말하는 순간 느슨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너도나도 집에가서 채점하고 싶단 강렬한 욕구가 들었다. 다들 집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우리들의 즐거웠던 티타임은 그렇게 짧게 끝났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결과를 몰라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말이다.

주발이네 집은 우리집에서 3분밖에 안걸린다. 집에 온 나는 부랴부랴 인터넷을 켜고 채점을 해나갔다. 나는 평소보다 10점정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중학교 때 친구 은*이에게 전화가 왔다. 나쁘지 않은 점수 같았다. 기분이 좋았다. 점수를 이야기하지 엄마의 얼굴엔 환해졌다. 하지만 엄마는 애써 담담하게 호들갑 떨지는 말라고 했다.

잠시 후 같은 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몇개의 예시를 말해줬다.
"야 누구는 ***점 누구는 ***점 누구는 ****점"

달콤한 꿈은 짧았다. 점수가 오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신문에는 실리지 않았고, 예상 점수가 취합된 다다음날 신문에서는 점수인플레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수능 만점자 사상 최다"
"400점 만점자 수십명"
"390점대 SKY도 어려워"

여튼 가장 기억나는건 수능이 다음날이다.
학교에 나온 모든 아이들은 우울과 직면해야했다. 나만 오른게 아니라 나도 오르고 너도 오르고 우리 모두가 올랐으니 오른게 오른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떨어진 아이는 자리에 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명한 이치를 혼자만 깨우치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당시 우리반 부반장.
평소 1시간이나 늦게 등교한 부반장은 52명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는 교실 뒷문을 열어제끼고 당당하게 한팔을 치켜들며
"선생님 해냈어요!"라고 외쳤다.
부반장이 그토록 바보같아 보인건 처음이었다.
담임은 지각한 부반장의 등짝으로 때리며
"해내긴 뭘 해내"라며 타박했다.

생각해 보면 곱씹을 거리도 안되는 하루였다.
하지만 길고긴 인생에서 겨자씨만한 부분을 차지하는 단 하루가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된 인생을 뒤바꿀 수 있은 또 다시 겨자씨만한 그 하루를 다시사는 것 뿐이다.
다른 길도 있겠지만 흔하지 않다. 남이 다니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다른길을 걸어볼 용기마저 앗아가는 이 세상이 참 무섭다.












어제 영화보러 이대를 가로지르다가 모교의 교복을 발견했다.

이럴수가.
우리 하복 바뀌었다;;;;
완전 심플해. 완전 편해보여. 완전 시원해.
회색과 흰색이 배합된 PK셔츠. 자주색이 포인트로 들어가서 간지까지 난다.

나는 억울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왜? 여름마다 하복 입는게 스트레스였으니까!
하복으로 인해 박해라면 박해요, 수난이라면 수난의 과정을 무수히 당해왔으니까!

우리 당시 학교 하복은 와이셔츠와 스커트 외에 구성품이 더 있었다.
바로  앞치마와 멜빵.
상상하면 꽤 이쁜 하복구조 같은데, 그런건 날씬하고 늘씬한 애들한테만 해당사항이었다.
3년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여고생들의 똥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최악의 옷이었다.

나는 종종 우리반 남자아이들의 질타를 받아왔는데
(다행히 앞치마를 경험하고 있는 여자아이들은 '앞치마를 하고 있는 쪽'이 '앞치마 하는걸 지켜보는 쪽'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주변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신*희를 보기만 해도 덥다! 저리 꺼우져 라고 외치는 강경파와,
신*희를 보기만 해도 너무 더우니까 앞치마를 떼고 다니게 해달라 는 선생님께 요구하는 온건타협파.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으로 복장 검사를 안하던 학교였는데,
나 고1때부터 교풍이 바뀌더니, 2학년 때는 한달에 한번씩 학생부장 선생님이 반에 들어와서 애들 복장 검사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데 그 상황이 정말 가관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업하기 싫은 애들 입장으로썬, 친구를 팔아 노는 시간을 더 벌려고 하는 파렴치한 짓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곧잘 지목받았다.
"선생님 신*희 날라리에요. 남자애중에 신승*만 3,2,1(남자아이들 머리 자르는 사이즈를 의미:앞머리3 옆머리2 뒷머리1) 아니래요."
같이 성별을 초월한 밀고와

또 다른 밀고가 있었다.
"선생님, 신*희 날라리에요. 교복 줄였어요!"
라는 억울한 밀고.

그럼 칠판 앞으로 불리워서 심문아닌 심문을 당하는 건 물론,
어디 줄였냐 살펴보게 한바퀴 돌아보란 소리까지 들었다;;;
나에 관한 심문이 한동안 이루어지고, 아무리 찾아봐도 줄인 곳을 발견하지 못하면
학생주임의 시선이 이동하는 곳은 나를 밀고한 아이다.  
그럼 곧이어 밀고자의 항변이 이어진다.
"정말이에요."

억울하다는 듯한 뉘앙스의 음성이 이어진다.
"교복 앞판 줄였대요."
"맞아요, 신*희 날라리예요!"


거드는 목소리도 이어진다.
또 다른 아이템을 내놓는 밀고자도 있다.

"하복 와이셔츠도 줄였대요"
"치마 허리도 줄였대요"
"급식도 많이 먹어요"


라는 상상도 못할 밀고가 (수업이 끝날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여튼 교복 앞치마 판은 나에게 작았다.
다른 아이들에게 딱 맞는 사이즈였지만,
다른 아이들 배의 체격을 가지고 있는 나에겐 작았다.

허리사이즈가 다르면 앞치마 판도 사이즈가 다르게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세상은 다양성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더욱더 다양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하겠다.

여튼, 나와 같이 하복 앞치마로 인하여 고민을 덜 후배들이 없어졌다니 다행이긴 하면서도 나같은 핍박을 경험해 봐야 다양성의 권리를 고민해볼 수 있을터인데 하는 아쉬움도 인다.





촬영해온 테잎에 익숙한 풍경이 담겼다.
동네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ㄳ고등학교였다.

교육관련 프로그램을 하면서 뼈저리게 깨닫는 것은 하나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학교를 포함한 이 동네 아이들은 사교육과 공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열에서 얼마나 방치 되어 있었던가 하는 것.

강남권 아이들은 어머니들 사교육 열풍에 휘둘리고 지방권 아이들은 서울의 교육규제에 벗어나 최상위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그 사이 여백이 있으니 그게 바로 우리 동네였다. 서울권이기 때문에 학원규제나 과외 규제를 넘보지 못하고 그렇다고 뚜렷하게 대체할만한 공교육은 없는 상황.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학교 교육을 껌으로 알고 있는 배짱 좋은(대책 없는) 아이들. 과외를 받을 것도 아니면서 수업시간 당당하게 어퍼져 잠을 청하는 용기 있는 아이들. 여튼 그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었고, 이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ㄳ고등학교(감사고등학교 아니다;;)는 실제로 내 친구들 중 다수가 다닌 학교인데다가, 익숙한 동네 풍경이, 돌아다니다 보면 볼법한 여드름난 고딩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테잎을 보는 내내 즐거웠다. 그 중 나를 개폭소 하게 만든 장면이 있었는데.

수업시간 우리 출연자가 열심히 영어 지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모니터 한귀퉁이로 한 남자애의 모습이 보였다. 당당하게 지각하고 들어와서 태연하게 사물함을 열어제끼고 교과서를 챙기더니 기어이 우리 출연자 뒷자리에 앉는것이 아닌가!!

오오 저 대담함! 카메라고 나발이고 방송촬영이고 거시기고 한치의 거리낌+스스럼 없는 그 모습에서 나는 정말 10여년 전 우리 고등학교 교실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당시 우리반 애들의  지각 결석이 얼마나 많았냐면 학급일지에 결석조퇴란이 모자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애의 별명은 조뚱이었다.
나는 그애와 함께한 추억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겨울이 자리한 늦가을에도 언제나 덥다면서 교실 창문을 열어 제끼곤 했다. 주변 아이들의 빈축을 산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여튼 나는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는 그애를 보면서 조뚱의 사물함을 떠올렸다.

우리고등학교는 애시당초 수업시간 전부터 교과서를 꺼내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종이 치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교과서를 찾았고 사물함 열쇠를 찾아 여는 것이 귀찮은 애들은 옆반으로 들어가서 교과서를 빌려(집어)오곤 했었다.

문제는 사후처리였다. 애들의 대다수는 다시 책을 돌려주는 걸 귀찮아 하곤 했다. 그리곤 빌려온 교과서를 자신의 사물함에 처넣곤 했었다.

어느날 조뚱이 자신의 사물함을 열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조뚱의 사물함 속엔
국어 (상) 11권이 일렬로. 사이좋게, 보기좋게, 꽂혀 있었다.;;;
조뚱이 국어(상) 책을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국어(상)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지나쳐서 세상에 존재하는 국어(상)이란 국어(상)책은 오직 자신만이 소유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국어(상) 11권을 들킨 조뚱이 원래 주인에게 그 책을 돌려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우리 동네 고등학교에는 조뚱같은 아이들이 아직도 있을까,
수학I 책만 열다섯권 수집한다던지, 그런 아이들이 있을까?
당당하게 지각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고 카메라가 돌든 말든 방송에 자기 얼굴이 비추든 말든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엎드려 자는 그런 학생들이 있을까?

다시 고등학생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딱 하루만 고등학생이 돼보고 싶긴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한도전이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패러디 하더라.
무한도전도 빵터졌지만, 2003년 S대 사학과 총 모꼬지에서 찍은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빠트리면 안되는데...
진짜 안되는데....
정말이지 5년전 우리가 더 웃겼는데.....


2003년은 사학과 총 모꼬지는
불행하게도 내가 과학생회장으로 있을 때 떠난 엠티였으며
슬프게도 27기 쭈꾸미들과 함께한 동물의 왕국 릴레이에 삘꽂혀 있을 때 떠난 엠티 였으며
정말 비극의 비극으로 치닫기 위해(?) 내가 캠코더를 산 뒤 떠나게 된 엠티였다.

오뚝이 세번+지렁이 꿈틀대며 기어가기+공벌레 두번을 하고+ 벽을 친 뒤+리드미컬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자리로 돌아오는 이 S대 사학과 전설로 전해져 오는 죽음의 릴레이는.

이기면 또다시 추한 자세로 릴레이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차라리 져 차라리 지라고!'라는 소리를 같은 편에게 들으면서 진행됐다. 그리고 그날 내 친구 경*이는 '뒷걸음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집에 찾아보면 6미리 테잎도 남아 있을텐데 말이지.

여튼, 무한도전이 미안하디미안하다 를 부른 기념으로
올린다.

테러.... 맞다.
이 동영상에 출연한 많은 선배후배동기들에게 미안하디, 미안하다
이 동영상을 기억나게 해준 김태호 피디를 원망하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우리 그때. 못생겼지만 즐거웠잖아♥








올해 빼빼로 데이도 어김없이 남들이 받은 빼빼로를 질겅이는 것이 전부였다.
낭만을 기대할 나이는 지났지만, 그렇다고해서 아무 것 없이  보내고 싶단 말은 아니고.
종잡을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휩싸인 채로 나는 오늘도!
옆팀 막내작가에게 온 빼빼로, 우리팀 에이디가 받아온 생초코렛을 주워 먹었다.  


빼빼로 데이가 전국적으로 홍보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올해로부터 근 10년. 아몬드 빼빼로 통빼빼로 나오기 전의 일이다. 우리 학교에서 별나지 않은 애를 찾는 일이 더 힘들다지만, 말 수 없음으로 유명한 남자애가 있었다. 말이 적던, 벙어리던 상관하지 않았던 나의 오지랖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특별한 친분은 없었던 그애. 근데 그날 정말 뜬금없이 그 애가 나에게 빼빼로를 던져줬다.

"너 먹어."

'평소 천성이 밝고 남을 의심할줄 모르던' 나는 여꼴통들과 신나라 하면서 '진짜 주는거야? 나 먹어도 되는거지? 무르기 없는거지' 터진 입이라고 주절대면서 그 빼빼로를 까먹었고, 그 일은 곧 잊혀졌다. 당시 빼빼로 가격 500원. 특별한 날이라곤 하나, 같은 반 애들 사이에서 빼빼로 한통에 별 의미를 다는게 더 이상한 시절이었다.

일주일 중 6일이야 학교에서 마주치는 게 다반사였고 기억할 이유도 없다. 내가 그 애를 아직도 생각하는 건 의외의 장소에서 만났기 떄문이다. 한달에 3만원, 저렴하기 그지 없는 모 단과학원 같은 교실 안에서. 왕따처럼 각자 다녔던 우리 둘은 그 뒤로 저녁밥(=떡볶기)를 함께 먹으며 학원을 다녔다. 주로 내가 주절대고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사이였지만, 나는 눈치 깔 수 있었다.
그 빼빼로는 원래 임자가 있었음을.

십년 전 그 빼빼로.
아마도 그애가 마음에 둔 그애에게 주려고 준비했다가
꼭꼭 손에 쥐고 또 쥐고 있다가 너무 떨린 나머지
그냥 눈에 띄던 '시끄러운 나' 에게 던져준 것이리라.
그걸 좋다고 까먹던 나와 여꼴통들은;;; 정말이지...


여튼 이런 날이 되면 그애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두 눈을 감은 채 사과하고 싶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고백하자면,
네 순정을 짓밟아 놓아서 미안타. 성*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편집 구성안을 쓰고 있는데 도저히 풀리지 않고 있다. 아직 촬영이 안끝나서 그렇거니 위로 하면서 대충 정리하고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걸 또 확실하게 잡지 않으면 보충이 지지부진해지는거잖아?
아.. 아마 난 이밤에 완벽하게 편구를 정리하고 집에 가야할 거야....

오늘 사무실이 너무나 소란해서 하루종일 이승환 노래를 BGM으로 깔아 놓고 있다. 이승환은 어느 순간부터 창법에 꺽임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게 거슬리기 시작해서 옛날 노래먄 찾아 들은지도 꽤 됐다. 내 노트북 음악 폴더에는 '옛노래' 폴더가 있다. 말이 옛노래지만 아직 10년밖에 안지난 노래들이다.

그들이 사랑하기 까지,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다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화려하지 않은 고백. 아아.. 90년대는 정말 시리도록 '낭만이 콧구멍을 벌렁대며 살아 숨쉬는 시대'였지. 너무너무 좋은 노래라 지금 당장 다모토리로 날아가서 맥주 한잔에 떼창을 불러 제끼고 싶다.

아아~ 신나게 듣고 있는데 <덩크슛> 나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반 남자애 하나는 자신의 꿈이 '킬러'였다

과목 이름도 무시무시한 '단체'시간이었다.
이게 또 왠 허세냐? 그애가 꿈을 발표하자마자 반애들은 술렁거렸다.
그 허세를 허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각하게 상담을 신청한 윤리 선생님도 웃음거리였었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 없는 한 아이가 있었으니, 막상 '킬러'가 꿈인데 널 좋아한다면서 뒷자리에 앉아서 '큭큭' 웃어 댄다면... 그의 표적이 된 주인공 입장에선 마냥 비웃고 손가락질하기가 쉽진 않다. (사랑이 집착이나 증오로 변질되는 순간 발생할,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여튼 킬러가 장래 소망인 소년과 그가 사랑했던 소녀는 나의 같은 반 친구였다.
입에 걸쭉하게 걸린 불평과 불만 욕설이 뒤섞여 그녀의 별명은 장욕.
아이들은 이내, 그 둘의 이름을 한글자 씩 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만들었고 불러 대며 마냥 즐겼다. (다들 후환 따윈 잊은지 오래였다) 소*이 엄마, 용*아빠. 이것이 그네들의 또 다른 별명이 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고 회자되고 오르내리고 내리고오르고 한다. 

1학년 겨울 방학 열정이 차고 넘치는 첫 담임 하에 떠났던 춘천 여행.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노래방에 들렸다. 인원이 너무 많은 관계로 서울역 노래방에 조를짜서 흩어져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옆방에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텨나오기 시작했다.

 '야 장욕 찾아!'
 '장욕 불러와!!'

그네들은 왜 그녀를 찾아야 했을까?
사건과 사고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는 방문이 열린 노래방으로 튀어 나갔고,
나는 곧이어 보고야 말았다.
킬러를 꿈으로 가지고 있는 허세 있는 소년의 눈물을;;;
그리고 그가 부르고 있는 노래 '덩크슛'을;;;;

그는 왜 덩크슛을 부르면서 눈물흘렸을까?
그 아무도 좀처럼 웃을 수 밖에 없는 '야발라바히기야 야발라바히기야하루나 하이루나' 부분에서 눈물 흘릴 어떤 정점을 찾아낸 것일까?

그의 감수성은 아직도 미지수다.
듣자하니 장욕을 찾은 아이들의 주장으로는

'예쁜 여자친구와 빨간 차도 타고 싶었지만' 부분부터 눈물을 흘렸으니
그의 눈물의 근원은 장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왠만하면 빨간 차, 타주지 그랬니?
하지만 장욕이 진정 예쁜 여자친구일까에는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일 ㅋㅋㅋㅋ

나 그날 춘천에서 자전거 못타서 울었는데,
생각해 보면 킬러가 꿈인 그 소년이 내 뒤에서 자전거 못타는 나를 비웃었기 떄문에
서러움이 폭발해 울었던거였다.
이런저런 추억이 얼기설기 꽁기꽁기 엮여 있구나.

그래도 꼭 한번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시절 그때.
교복을 입고 온 이대가 쩌렁쩌렁하게 웃던 그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비록 그시절 나는 자전거를 탈줄 몰랐지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나온 모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거의 매주 채플이 있었는데 이대강당에서 드리는 전체 예배도 있었고, 방송 예배도 있었고, 반별예배도 있었다. 공부를 안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설교가 들어가는 그 순간. 예배시간은 수업이랑 다를 바 없어지기 마련이다. 대게 그 시간은 졸거나 딴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던 우리를 흥분시키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가 처음으로 춤을 선 보인 것은 바로 채플시간이었다.
반별로 진행되던 예배시간. 그 시간에 우리는 조별로 찬송에 맞춰 율동을 준비해야했다.
당시 젠틀한 이미지로 아버지감 1등이었던 종교부장 최*진이 치는 기타 반주에 맞춰 불러야했던 찬송가 '손을 높이 들고'.
그러던 그 순간 벌어진 것이다.

뭔가 지렁이가 흔들어대는 듯한 느낌으로 박자 무시하고 꼬부랑 거리던 그의 허리춤! 춤까지는 좋았으나 벗은 것도 아닌데 대체 거기는 왜 손으로 가리며 춤을 추는 건지. 그는 허리를 아주 신명나게 흔들어댔는데...
여학생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결코 환호가 아니었다. 그는 '비'가 아니었을 뿐더러 우리 역시 그의 팬이 아니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그 불쾌감으로 이그러지는 입모양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종교라는 것은 나름 '벌'이라는 것을 내포하는 절대적인 영역인데 성스러운 노래를 저렇게 더럽히다니!! 광분하면서도 차마 역정은 내지 못하고 소리만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야 이 새끼야 그만해!!!



2학년 가을 소풍은 북한산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들이 단체로 아무거나 생각나는데로 적어놓고 제비뽑기 한 것 같이 참으로 센스 없는 소풍장소다.
우리가 암반을 타겠는가 산정상에서 깃발을 꽂겠는가? 할일도 없고 무료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먹는 일 뿐! 김밥을 절반 정도 먹었던가? 두껍게 썰기로 유명한 우리 엄마의 김밥을 입안에 넣는 그 순간. 산 위쪽에서 전교생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의 이번 스테이지는 북한산 바위 위! 차라리 신화 춤을 추는 전*기는 깔끔했다!  
떨어질지도 모르는 그 높은 곳에서 그 기름진 춤을 춰대다니!!!
음악도 비쥐엠도 없었지만, 전교생들이 우러러(?)보는 그 장소에서 그는 더욱더 흥을 느낀듯 했다.

야 이 새끼야 그만해!!! 김밥맛 떨어지잖아?!?!?!?

뒤늦게 학생주임이 돌을 던져 그의 춤을 멈추게 했지만;;;;
영원히 회자되는 혼돈의 소풍이었다.
춤을 추는 것은 그네였는데, 왜 내가 부끄럽고 창피한지 알 수는 없지만 여튼 그랬다.



2학년 학기의 끝자락.
영어 과목을 맡았던 담임은 기를 써서 토요일 하루를 우리반을 위한 시간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날 1년간 모아 놓은 지각비로 떡을 하고 오락시간을 가졌다. 
당시 오락시간의 사회자였던 나는 그토록 반대했으나 몇몇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그의 등장.

팬들의 요청이라고 생각했는지 더욱더 화려하고 현란한 동작과 업그레이드 된 춤으로 응수했던 그!

그의 춤을 보다간 백설기에 박혀 있던 콩이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아서 나는 교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그는 교탁 밑으로 숨은 내쪽으로 계속 춤을 전진(?)시켰다고 한다. 에라이 이씨밤바?멍ㅎ먀ㅐ어ㅔ랴ㅐ버ㅔㅐ험ㅇㅁ레!!!

세번째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그 스물거림에 여학생들은 경악을 했으며
남자애들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다 못해 고개를 숙였고
당시 담임선생님이던 영진은 얼굴이 씨뻘개 진채로
'들어가~!!! 들어가!!'를 외치며 그의 등짝을 때렸으나
맞아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끝을 향해 달려가던 그의 춤.

그 춤의 느낌이 어땠냐면....
꼭 이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딱 이 느낌... 따악~ 요 정도의 스물거림과 느끼함....
식용유를 한대접 삼킨거 같이 토하고 싶지만 토한다 해도 깨끗하지 못할 것 만 같은
끈적한 이 느낌..


이 방송(?)과 몹시 닮아 있던 이형*군의 춤의 이름은 '공포의 거시기 춤'
역류하는 백설기를 억누르며 댄스에 이름까지 붙인 불어반 이한나의 작명센스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



네이트온을 접속하니 오늘 생일인 사람이 수두룩이다
여꼴통 뎡이, 한집 사는 준근오빠, 방송국에서 만난 *진이, 2학년때 우리반 이치웅
그리고 추가 한 명은 보안을 위해 굳이 말 안하겠다. (나 비밀 지켰다!!)

고등학교 때 뎡이의 생파는 항상 웃겼었다
깜짝파티의 일환으로 미션 완수 메세지를 남기고 그 메세지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우리의 깜짝파티 장이 나오는 건데 문제는 뎡이가 그 '미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거다
소리를 지르고 못기다리고 전화를 하고 바로 거기 쪽지 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하고 갑갑한 심정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동동굴러도...(그네가 그 당시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던건 천만 다행이었다)
결국 뎡이는 그날 미션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지 못햇다. (8절 스케치북 만한 쪽지였는데;;;)
6개의 미션을 준비했었는데 결국 다 때려치고 1번 미션에서 마지막 미션으로 바로 건너 뛴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6월 말 내 생일과 달리 7월 8일이면 기말고사가 끝나서 항상 여유 있는 날이었고 맥너겟에 흠뻑 빠져 있던 우리는 버거세트에 맥너겟 먹는 만한 호사가 없다고 생각했엇고 뎡이 생일날을 손꼽아 기다렸더랬지. 당시 여자 ㅇㅎㅅ 이라고 불리던 내 친구 모양은 얼마나 맥*날드에 빠져 있었는지,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맥도날드라고 쓰기까지 했었다;; (그녀가 그 모사에 입사한건 졸업 후의 일이다)

하얀색 하복에 배가 나왔건 안나왔건 자꾸만 주름이 돌아가던 회색 치마 그리고 수시로 떼었다 붙여야 했던 앞판까지. 그 교복을 입고 이대를 가로지르던 생각이 난다. 고개를 돌리면 여길 봐도 우리반 친구 저길 봐도 작년 우리반 친구 모두들 아는 얼굴이라 그 익숙함이 참 좋았던거고.

습기차 약간 후덥지근한 날씨. 장마의 끝무렵.
떡볶기집에 들어서기까지 지나쳤던 많은 풍경.
어디가냐고 손 흔들면서 서로 참견하던 일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언제나 즐거웠던,
돌아올 방학이 기대되면서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렜던,
말 그대로 열여덟 열아홉 여름의 시작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야기 하나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고등학교 그 시절이 자꾸 생각난다.
고딩들을 지켜보고 취재하면서 200*년도 입시를 준비한 그 시절을 모른척 지나친다면, 막장드라마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거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스펙터클 익사이팅 액티비티 했던 신촌동의 3년.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대하소설처럼 페이지마다 새겨져 있는 가운데, 최근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고2 겨울 방학 단과학원에서 김*록을 만났을 때다.

고 2 마지막 모의고사 200점 이하란 점수를 가지고 있었던 김군과(모의고사를 제대로 끝까지 풀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충정로 모 단과학원에서 우연히 만났다. 김군은 수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우리반 반장이었고, 김군보다 높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거만하게 한마디 건넸다.

"수학만 하면 어떡해? 사탐도 해야지."

그뒤 김군이 남은 1년간 어떤 성적 스코어를 거뒀는지, 그래프 상에 얼마나 가파른 y축의 이동을 만들어 냈는지는 2대*고를 나온 아이들이면 다 안다. (십년 다되어가는 그 사건은 아직도 선생님들의 입을 통해 자꾸 회자되며, '너희도 할 수 있다','아직 늦지 않았다' 학습 선전용 도구로 쓰인다고) 결국 수능 날 392점이란 점수로 서울대도 가능한 스코어를 따낸 김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프로그램 주인공으로 딱인데 말야!
(비록 가끔 당당하게 코를 후비긴 했지만 그는 얼굴이 하얗고 눈썹이 짙은 긴 속눈썹 미소년이었다)


이야기 둘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타임퀘이크> 온 우주가 팽장을 잠시 중단하여 우주의 시계가 10년을 다시 돈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모든 인간들이 이미 겪었으면서도, 내가 어떤 인생을 살지 알면서도 그대로 10년을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책을 읽고 각자 판단하시라.



이야기 하나와 둘을 더하면...
"야 앙증! 스물 여덟 인생에 들어서면서 내 인생을 다시금 타임퀘이크가 찾아온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리고 싶니?"
"음... 나는 열아홉 겨울. 서울학원에서 김군과 수학 수업을 듣던 그때로 돌리고 싶은걸"

단과학원서 함께 떡볶기로 저녁을 때우던 김군! 왜 나에게 좀 더 권해주지 않았는가? '야, 지금 수학 안잡으면 일년 내내 고생해.' 라고 말이다.

'너 설마 내가 라이벌이어서 견제한거니?'
 이런 실 없는 농담 던질마큼 내 인생이 마냥 유쾌하고 신난건 아닐텐데;;;

내가 그 때 수학을 디비파서 완성했다면,1학기 내내 안나오는 수학점수로 애먹지 않았을거고, 고3 첫 학기 때는 여유 있게 영어를 봤을 것 같다. 그렇다면 60점대 나온 형편없던 내 수능 영어가 조금 더 나아지고, 서너 문제 정도는 더 맞출 수 있지 않았나? '간신히 서울 소재 대학'이 아닌 '서울대에서 조금 아쉬운 대학'을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떨까.

소설 <타임퀘이크>는 희화화 되었지만 '비극'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서울대에 가까운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내가 쉽사리 만화의 꿈을 접었을 것 같지는 않다. 버젓히 4년제 대학 졸업한 뒤 만화 한다고 2년 깝치다가 능력의 한계치로 좌절. 그제서야 다른 길로 가겠다고 커브 틀고 고생 좀 하겠지. 영어 공부도 안했겠다, 변변한 스펙도 없겠다 빽도 없겠다.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은 이모양 이꼴로 그대로 진전될 것 같은 이 예감! 비극을 향해 똑같이 도는건 소설 <타임퀘이크>의 등장인물과 꼭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이 폴더의 이름은 <타임퀘이크>
우주가 백번 팽창을 중지하면 백번 그대로
'꼭 같이', '똑 같이' 살아갈 내 인생의 흔적을 적어두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임 퀘이크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커트 보네거트 (아이필드, 2006년)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