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전

타임퀘이크 2010. 11. 18. 12:29

그날은 매년 특수 한파가 부는 날이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겪은 그날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며칠전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듣기만해도 경건해지고 갸륵해지는 슬픈 피아노 반주가 쌩라이브로 흘러나와,
1년내내 신경질 내는 딸 뒷바라지한 엄마 생각에 가슴아파 죄스러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실에서 노닥노닥 세월 죽이던 내 자신이 미워져,
결국 교회 예비시간에 눈물 폭발. 아주 대폭발!
그때 운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학년 거의 대부분 애들이 울고 있었으니까 창피하진 않다. 이를테면 그런거다. 학교 수련회 가서 촛불켜놓고 엄마 얼굴 떠올리라고 하면 대게는 울고야 마는 공식같은 순서. 

반면 막상 당일이 되니 별 긴장감도 없고 떨리지도 않고 그랬다.
아침 집을 나서면서 가족들한테 인사할때는 벌써 실실 쪼개는 상태였다. 수능 끝나고 놀 생각에 벌써 가슴이 벅찼던게지.

오토바이 타고 입장했다는 같은반 누구와는 다르게 나는 적정시간을 맞춰갔다. 고등학교 2년간 지각비를 걷었던 나였으니까. 뭐든 늦어서 조급한게 최고로 싫었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후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원이 적었다. 다른 학교는 북치는 애들도 있고 구령붙이는 애들도 있는데 우리학교는 크기만큼 조촐했다. 그게 다행이었다. 수능응원 잘한다고 대학간다면 1학년때부터 하루 네댓시간 야자 대신 응원연습했겠지.
중간에 붙잡혔는데 참 창피하더라, 할말도 없고 아 이래서 작년 재작년 선배들도 빚진돈 못갚는 사람처럼 학교 건물로 들어갔구나.

교실 안 같은 고등학교 출신은 단 하나도 없었다. 6반 짜리 작은 학교. 문과이과 여자남자 독어반불어반을 쪼개어 교실이 배정되면 그럴수 밖에 없다. 다만 중학교 때 동창 얼굴이 눈에 띄어서 입에 쟈크 채우는건 면할 수 있었다. 점심을 같이 먹기로한 고등학교 애들 몇몇이 방문했다. 똑같은 포장지로 싼 똑같은 메이커의 초코렛을 내밀고 교환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잘봐 힘내 같은 이야길 했던거 같다. 평소 그냥 나누던 이야기인데 왜 그렇게 신라 5만군에 맞서는 백제군같은 비장함이 풍겼는지는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수천번은 더 들은 주입식 내용이니까 모를리 없었다.
오늘 하루가 대다수 아이들의 삶의 상당 부분을 결정짓는 다는 걸.

서로 응원 하다보니 동지애 같은것도 샘솟았다. 오늘 우리는 (가)형 (나)형 비록 문제의 순서는 다를지라도 같은 문제를 풀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마킹을 한다.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한다는 공통점이 끈끈한 연대를 만들었다. 사실 싸워야할 대상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서로인데 눈앞에 놓인 시험지에 시야를 뺏겼다. 그래서 칼날이 시험지 너머 서로를 겨누고 있는걸 모르고 서로의 건투를 빌었다.

언어를 풀고 한시간이 남았다. 위에 없는 내용을 찾으시오, 위의 내용과 같은것을 찾으시오 세문제가 걸렸지만 다시 들여다 보지 않았다. (결국 그 세문제를 틀렸다)
수학은 행렬문제를 찍었다. 추석연휴 4박5일 서울학원에서 3만원짜리 행렬 단과를 들은걸 후회했다. 차라리 마음 편히 놀기라도 할걸.
사탐은 무난했고 과탐은 절대 무난하지 않았고
영어는 원래 못했다. 내가 제대로 해석하는 문장은 단하나도 없다시피 했다.
독일어는 너무 쉽게 나왔다. 초등학교 1학년도 알법한 시계를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가 나왔고, 슈베르트 얼굴만 알고 있어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나왔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마킹을 끝낸건 나만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교실은 끝나기 20분전에 시험지를 걷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옆자리 앉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대부고야 나는 서울여고야 독일어는 쉬웠는데 중국어는 어땠니 우리학교는 끝나고 수련회를 간대 우리는 시험을 5일이나 친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제2외국어가 얼마나 쉬웠는지 남는 시간 러시아어랑 아랍어 시험지를 풀었던 아이도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는 교회 애들을 만났다. 다같이 우*이네서 밥을 먹고 배를 두드린 우리들은 주발이네로 향했다. 센스 있는 주발이네 어머니는 다과를 한상 준비하셨다. 하지만 센스 없는 주발이는 혼자 방안에 들어가 채점을 마쳤다. 방문을 열고 기뻐하던 주발이의 점수는 평소보다 괜찮은 점수가 였다. 하지만 주발이가 자신의 점수를 말하는 순간 느슨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너도나도 집에가서 채점하고 싶단 강렬한 욕구가 들었다. 다들 집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우리들의 즐거웠던 티타임은 그렇게 짧게 끝났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결과를 몰라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말이다.

주발이네 집은 우리집에서 3분밖에 안걸린다. 집에 온 나는 부랴부랴 인터넷을 켜고 채점을 해나갔다. 나는 평소보다 10점정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중학교 때 친구 은*이에게 전화가 왔다. 나쁘지 않은 점수 같았다. 기분이 좋았다. 점수를 이야기하지 엄마의 얼굴엔 환해졌다. 하지만 엄마는 애써 담담하게 호들갑 떨지는 말라고 했다.

잠시 후 같은 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몇개의 예시를 말해줬다.
"야 누구는 ***점 누구는 ***점 누구는 ****점"

달콤한 꿈은 짧았다. 점수가 오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신문에는 실리지 않았고, 예상 점수가 취합된 다다음날 신문에서는 점수인플레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수능 만점자 사상 최다"
"400점 만점자 수십명"
"390점대 SKY도 어려워"

여튼 가장 기억나는건 수능이 다음날이다.
학교에 나온 모든 아이들은 우울과 직면해야했다. 나만 오른게 아니라 나도 오르고 너도 오르고 우리 모두가 올랐으니 오른게 오른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떨어진 아이는 자리에 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명한 이치를 혼자만 깨우치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당시 우리반 부반장.
평소 1시간이나 늦게 등교한 부반장은 52명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는 교실 뒷문을 열어제끼고 당당하게 한팔을 치켜들며
"선생님 해냈어요!"라고 외쳤다.
부반장이 그토록 바보같아 보인건 처음이었다.
담임은 지각한 부반장의 등짝으로 때리며
"해내긴 뭘 해내"라며 타박했다.

생각해 보면 곱씹을 거리도 안되는 하루였다.
하지만 길고긴 인생에서 겨자씨만한 부분을 차지하는 단 하루가 많은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된 인생을 뒤바꿀 수 있은 또 다시 겨자씨만한 그 하루를 다시사는 것 뿐이다.
다른 길도 있겠지만 흔하지 않다. 남이 다니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다른길을 걸어볼 용기마저 앗아가는 이 세상이 참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