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코 호스텔에 도착했다. 나의 후각을 자극하던 발냄새와 암내들이여 안녕!
지금은 이렇게 상쾌하게 웃고 있지만 오늘 새벽 웃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한밤 중에 외치는 "땡고 베르구엔싸"!
내가 버스에서 내리는 예정시간은 새벽 1시 반이었다. 밤에 비몽사몽 버스에서 깼는데 하나둘씩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크로머는 나보다 한정거장 먼저 내리는 크로머가 내리는 뒷모습이 보였다. 근데 어라라? 크로머의 론니플래닛이 바닥에 고이 모셔져 있네. 나는 론니플래닛을 들고 뛰쳐나갔다. 

"크로머! 크로머! 너 책두고 내렸다!"

크로머는 느긋하게 담배피는 중이었다. 그리고 크로머가 내리는 정류장은 앞으로 두시간도 더가야 나온단다. 창피 창피 왕망신. 넓게 펼친 오지랖을 다시 돌돌 말고 싶은 순간이었다.

여튼 난 버스를 다시 탔고, 담배 다 피고 들어온 크로머는 웃고 있었다. 땡고 베르구엔싸.(창피합니다) 아는 말하니까 빵터지면서 책을 챙겨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말했다.

사건이 여기서 일단락됐다면 오지랖 넓은 동양여자애의 한번의 착각으로 끝났을 것이다.

다시 버스는 달리고 달려서 눈을 떠보니까 새벽 3시. 옆자리를 보니까 크로머가 없다. 건너편 자리를 보니까 세이지도 없다. (세이지랑 나랑은 둘다 바릴로체에 숙소가 있다.) 어라라. 여기가 바릴로체 맞구나. 나는 부랴부랴 배낭을 매고 내렸다. 그리고 화물칸에서 내 트렁크를 꺼내서 질질 끌고 가는데 세이지와 눈이 마주쳤다. 세이지는 굉장히 의아한 눈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또 여기가 아닌가?!?!? 어리버리하고 있는 사이 뒤를 돌아보니 크로머가 보였다.
짐을 내리고 있는 크로머는 나를 진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 너 (내리는 곳도 이렇게 못찾는데 너의 두달짜리) 여행... 가능하겠니?"
라는 진심이 눈빛에 절절히 맺혀 있었다.  

그 앞에서 '땡고 베르구엔사'로 크로머를 두번 웃기는건 못써먹을 저질 개그였다.
크로머의 걱정을 한몸에 받은채 나는 다시 트렁크를 재저장!
그 옆에 있던 세이지 역시 나를 매우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차저차해서 다시 버스를 타고, 크로머는 나보다 먼저 내리고. 내리면서 다음에 내리는 곳이 바릴로체라고 신신당부를 남겨주더라. 우여곡절끝에 바릴로체에 닿았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각. 세이지에게 숙소 예약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노숙한단다. 정말 괜찮겠냐고 물으니까 씩씩하게 괜찮단다. 방한용으로 싸온 깔깔이를 줄까 하다가  너무 최악의 저질패션이라 차마 내밀지 못했다. 

택시타고 오는데 우리 버스에서 내가 꼽은 최고 미남이 엄마와 같이 따라왔다. 내 생각인데 난 인상쓰고 사나워보이는 서양남자가 취향인거 같다. 아까 미국애들 막 떠드는데 좀 조용히하라고 팍 소리지를 때부터 어머어머 저 남자 잘생겼다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안그래도 에어콘도 안나오는 버스 안에서 미국애들이 너무 떠들어대서 나도 짜증이 나던 차였다.)    
밤에 택시타는 게 무서워서 그와 그의 어머니를 붙잡고 숙소가 어디냐고 같이 택시타지 않겠냐고 묻고싶었다. 근데 아까 화장실에서 몇번 마주쳤는데 그와 버스최고미남의 어머니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것 같았다. 나는 포기가 빠른 여자니까 바로 포기했다.  
그냥 내 운명을 신에게 맡기고 혼자 택시를 잡아탔다. 다행히 기사아저씨는 친절했다.

그렇게 도착한 페리코 호스텔.
우왕 산장모양을 한 호스텔이 너무너무 이쁘다. 간지 좔좔 주변 동네도 한적하니 너무 좋아.
새벽 4시에 입구에서 벨을 찾을 수 없단 것만 빼면 완벽한 숙소였다.
이대로 호스텔 문앞에서 밤을 새게 되는 것인가?!?!? 그냥 세이지랑 같이 역에서 밤이나 샐껄. 다시 한번 세이지에게 내(남동생) 깔깔이를 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내가 선견지명이 있구나!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줄 미리 알았구나 아이고 아이고.
더듬더듬 숙소 입구를 살펴보기를 30여분. 간신히 구탱이에 박혀 있는 벨을 찾았다. 실례를 무릎쓰고 벨을 눌렀다. 자다 깬 호스텔 직원이 눈을 부비며 문을 열어줬다. 2층 내 방으로 들어갔다. 2층침대에는 계단이 없었다. 정말 대롱대롱 매달려서 간신히 2층 침대로 올라갔다. 깔깔이를 벗을새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크로머와 세이지의 눈빛이 다시 한번 생각난다.
나 여행.... 진짜 가능할까?!??!?!







여튼 간신히 바릴로체 도착하니까 새벽 4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