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유로피안
에... 음... 그니까..... 그 미남이 잘생겼다고 생각한 것은 엘찰뗀 버스부터였다. 인상 쓰는데도 멋있어. 옆모습이 완죤 조각이야. 털도 제법있어. 푸하하. 나는 다시금 내 취향은 조금 사납게 생긴 코뾰족한 서양인임을 자각했다. 게다가 자기 어머니에게 잘하는 그 모습이 더더욱 훈훈! 게다가 소란한 미국애들에게 한마디 던지길래, 난 진짜 그 남자가 화끈한 라틴 남자인줄 알았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그 미남마저 영어로 단 한마디도 못하길래, 나는 영어 한마디 못하는 아르헨티나 가족이라고 그렇게 굳게 확신했었는데....
바릴로체에서 출발한 버스는 중간에 오소르노 역에서 한번 쉬었다. 출발할 버스가 9시임을 손짓발짓으로 가르쳐준 그들에게 나는 이름을 물었다. 꼬모떼 야마스 (¿Cómo te llamas?) 근데.... 근데...... 정말 한글로 받아 적을 수 없는 모음으로만 이루어진 아주 독특한 이름이었다.
엥? 스페인어권 이름이 이렇게 어려운 이름이었던가?!?!?!?! 까밀라 끌라라 로사 뻬드로 빠블리또 까밀로 이런식의 센발음으로 이루어진 쌈빡한 이름 아니었어??
조심스레 나는 그들에게 출신지를 물었다. 니네 어느나라 사람이니.
럴수럴수 이럴수. 그들은 프랑스 사람이었다.
버스에서 백번 천번 무차수에르떼(행운을 빕니다) 딴또구스또엔베를레아끼(여기서 만나다니 반가워요) 따위를 외운 나는 등신중에 상등신. 이사람들아 그런건 진작 말해줘야 내가 메르시 봉보야쥐 본뉘 이런거 좀 연습했을거 아냐??!?!?
더불어 그들이 생글생글 웃어주면서도 왜 그렇게 나에게 말걸기를 힘들어하고 당황해 했는지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여튼 여기에 와서도 남미 남자가 아닌 결론은 유로피안인가보다. 흑흑. 허탈한 마음 감출수가 없네-.
오늘의 곰돌이
한복 치마 입은 곰돌이를 그 터프가이 아저씨에게 차마 건넬 수는 없어서, 어머니에게만 하나 건넸다. 오소르노역에서 산티아고행 버스 탈때까지만 해도 우린 마지막 까지 같은 버스를 타는 줄 알았는데, 아뿔싸 15분 차이가 나는 버스였다. 버스 타는 일이 워낙 시급한지라 사진 한장 못찍고 헤어지고 말았다. 더불어 15분 뒤에 온다는 나의 버스는 연착의 연착을 거듭한 결과 3시간 뒤에 나타났으므로, 그들을 아니, 그 프랑스 미남을 다시 볼 길은 더더욱 묘연해 졌다. 흑흑
2. 우리 고모들이 왜 오소르노역에?
프랑스 미남의 관할 하 그의 어머니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을 떄였다. 근데 한무더기의 칠레 사람들이 우리 옆에 서서 히히덕 대고 있었다. 딱 봐도 가족 구성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딸 둘 아들 하나. 둘째 딸이 까불까불 하면서 춤을 추길래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었다. 그 대가족은 둘째딸을 후려치면서 야 너 땜에 쟤(=나)까지 빵터지잖아. 라고 하면서 더더욱 신나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선 오소르노 역에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왜이렇게 가족들이 많아. 버스타고 가는 사람 한 명당 스무명 정도는 기본으로 나와서 마중해주는 칠레의 퀄리티. 정겹기도 정겹고 사람사는 동네 같단 느낌이 들어서 마음도 훈훈 표정도 훈훈.
여튼 그러다 프랑스 모자를 떠나보네고 내 버스를 기다리고 섰는데.
나 정말 놀랬다.
왜 우리 고모들이 오소르노 역에 있는거지?!?!?!?!?!?
왜 (목청크고 시끄럽고 수다스런) 우리 고모들이 칠레 오소르노 역에 와 있는거지?!?!?!?!
조카로 보이는 이십대 초반 남자에 하나 버스로 태워보내는데, 고모뻘 되는 여자들(과 그의 자식들)이 우르르 나와서 스페인식 인사 (뺨 부비면서 쪽 소리내기)를 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유추해보면 이런거 같았다.
아 고모 완젼 화장품 다 씹힘. 나 뺨에 파운데이션 묻었뜸.
짜샤 고모만한 미인이 어딨다고 고마운 줄 알아!
헐. 말도 안됨.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고모 나이에 고모만한 피부를 유지하긴 힘듬.
헐. 못들은 걸로 하겠뜸.
왜이래 나 진짜 동안인 여자임.
뭐 여튼 이런식의 대화 같았다. 자기들끼리 빵터지고 시끄럽고 떠들어대고 그거 또 받아쳐서 빵빵 터지고. 그쪽 가족의 고모님들이 일단 우리 고모들이랑 너무나 닮았고, 볼륨 세기도 닮았고, 목소리도 닮았으므로 일단 칠레판 우리 고모로 인정!
그 외에도 오소르노 역에 볼거리는 꽤 많았다.
엄마한테 군것질 거리 사달라면서 안사주니까 역바닥에 드러누워 자기 옷으로 걸레질을 하는 꼬마 여자애를 봤고 (역시 사람 사는건 다 똑같다는 진리를 깨우쳐줌)
친구 하나 버스타는데 친구들 열댓명이 몰려와서 기타치고 노래해주는 것도 구경하고. (기타를 너무 못쳐서 깜짝 놀랐단 말을 덧붙이겠다) 바릴로체 오또 산에서 만났던 세명의 뮤지꼬(뮤지션)들도 그랬지만, 참 여기애들은 기타를 못쳐. 근데 꿋꿋해. 구김 없어. 좀 못난 자기 자신이면 움츠러 들어서 표출 안할만도 하건만 구김없이 드러내고 발산하네. 그것도 멋이라면 멋이고 간지라면 간지다.
여튼 오소르노 역의 칠레인들은 세시간 연착하는 버스에도 짜증 한번 부리지 않고
세시간이 지나 등장하는 버스에 박수를 쳐주는 훈훈함을 보여주었다.
사실 난 반바지 차림이라 너무 춥고 짜증났는데, 칠레사람들의 훈훈한 모습에 감화감동해서 도저히 짜증을 낼 순 없었던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