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옛애인(?) J를 만났다.
처음으로 일했던 프로그램팀. 나는 막내작가였고 그'녀'는 조연출이었다. 세상이 나(혹은 우리) 빼놓고 모두 행복하던 시절. 일이 주는 무게에 눌려 기댈곳이 필요했고, 그때마다 회사 옥상에 올라가 여의도 밤하늘을 함께하며, 서로의 무거운 짐을 기댔던 나의 옛애인 J~. 
그덕에 우리는 사귄다는 소문마저 회사내에 파다해었더랬지;;; (나 남자 좋아해요. 나 진짜 남자좋아하거든요?!?!? 백번말해봤자 모두의 의구심만 짙어졌었음..) 

여튼 그 밤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좋은 작가가 좋은 피디가 되기로 헤아릴 수 없는 다짐을 흘렸었다. 성실한걸 빼면 내세울 것 없는 나에 비해 J의 능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예체능계 아이들이라면 모두 목을 메고 몇수를 하는 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그해 대통령상까지 거머쥐고. 아아 남들 몇년씩 공부하는 본사 자리도 떡떡 붙곤 했었지. (빡센 외주 조연출 일정으로 시험을 치르지 못한 덕택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여튼 그녀를 다시 본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가슴이 떨렸다.

여의도를 떠나 선택한 장소는 강남. 그녀는 예전보다 화사해졌고, '을의 을(외주인력)'이 아닌 '갑의을(정규직)'의 혜택을 톡톡히 보는 것 같았다. 근데 그런 그녀가 너무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해서 가슴에 스크라치가 났다.

-씅 나, 요즘 일에 대한 열정이 이제 눈꼽만치도 없어. 근데 욕심도 없어. 여기서 20년 채우면 연금나오거든.
-씅도 그냥 살빼서 시집이나 가.

한남대교를 건너오는데 입이 썼던건, 마음 가득 씁쓸함의 맛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한텐 '내 일(직업이 아니라 하더라도)'이나 '내 이름'이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자아의 만족'이 무엇보다 중요할것 같은데. J마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니 나름 단단하게 세워둔 확신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 모습으로 이렇게 사는건, 사실 '특별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평범할 자신이 없어서가?'인가.

올해 이 물음에 답을 내고자 부산을 다녀오고 남미를 다녀왔건만,
또다시 의문이 다시 새어나온다.
아아. 이러지마아...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