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을 기다린다는 이밤.
나는 청승맞고 처량맞게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전을 다운받아서 보고 있다. -_-;;;;

오래간만에 보니까 4년전 그때 기분 난다.
지단 퇴장당할 땐 내가 다 안타깝고, 가슴 쿵쾅거리고, 아주리들 수비 잘하는 거 보면 경이롭고 부폰 펀칭에 악소리가 난다.

하지만....
좋아하던, 존경하던,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선수가 네오파시즘 단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단 이야길 들었다.
아아아아아악악악악!!!

그 선수는 지난 시간, 나의 자랑이었다. ㅠㅅㅠ
간지 철철 나는 최고의 캡틴이었고,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이상형의 리더였다.

정녕, 정녕! 진실이냐고 묻고 싶다.
이탈리아어 배워서 편지라도 쓰고 싶다.

파시스트면 대체 그 먼 중동엔 왜 가냐고,
인종차별 한다면서 다른 인종 동료들한테는 왜 그렇게 친절하고 잘해줬냐고,
따지고 묻고 싶다.

진심으로 응원했던 지난 시간을 송두리째 다 까먹는 기분.
ㅠㅅㅠ
차라리 오빠가 말할 때까지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팬이 되고 싶다. 
(오빠가 말해봤자 이탈리어로 말해서 못알아들을게 뻔하지만 말이다)
그들의 기분을 백번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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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게 제법 많다.
주말 중 하루는 다부지게 공부해야겠다. 지금 맡고 있는 전 프로그램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정말 갈 길이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아아~
연산군 대 조정에서는 현덕 왕후 복위로 인한 피바람이 일었고, 나에겐 그 내용을 뒷받침할 그림이 없어서 피눈물이 인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적어도 선배님들의 발끝에는 미치는'작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트위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멘션 하나 날리고 마냥 댓글을 기다리고 있는 바보같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 무슨 미련이고 무슨 집착인가. 얘들아, 왜 이리 답이 없니? 나 씹힌거니? 초조하고 우울하다. 그러다가 스스로 바보를 자처하는 것 같아서 창을 닫아버렸다. 앞으로 며칠 봐서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트위터를 관둬야겠다.
 트위터를 시작한건 지난 총선, 자주 드나드는 다음 카페에서 내가 속한 당에 대한 공격에 상처를 너무 많이 받은 덕분이다. 나랑 비슷한 생각 하는 사람들을,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몇몇은 너무 말이 많다. 봐서 되도록 팔로잉은 100명을 넘기지 않을 생각이다. 누구는 첨가하고 누구는 삭제하고 꾸준히 주목해야겠다.

묘비명을 생각해봤다.
미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내 우물 쭈물 하다가 이럴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다음으로 좋아하는 묘비명은 '슬프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도 못한 채, 비상한 죽음을 당했다'으로 김옥균의 묘비명이다. 요 며칠 곰곰히 생각한 결과 나의 묘비명은
'나 이제 가니, 세상은 조금만 덜 재밌을 것.' 혹은 '지금부턴, 저 세상이 이 세상보다 재밌도록 노력하리라.'가 좋을것 같다.
저 세상에 간다 해도, 가장 속상한건 역시나 이 세상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의 묘비명이 유명해 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유명해지는게 급선무 인거 같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건 어제 회사에서 였는데,
급하게 제목을 단다고 가장 가까운 왼쪽 키보드를 두어개 두들겼다. 'ㅇㄷ'이라고 달아놨다. '야동'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대충 제목을 달 때도 신경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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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땅 2부 <철까마귀의 날들>을 보고 정말 펑펑 울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꼭 한번 보라고 꼭 봐야만 하는 다큐멘터리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영상에서 가장 신경 써서 담은 것은 '노동자들의 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역시, 같았다. 그들의 고되고 헐벗은 발.
그들의 발은 흔히 주먹이나 손으로 상징되는 노동성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연장을 쥘 기회조차 없는 제3국의 노동자이기 때문에.

맨발 맨발  여린 살갗이 쇠처럼 단단해지도록 갯벌을 헤치고 다니는 사람들.
그들의 삶은 그 발 아래 놓여 있었다.
그들이 끝없이 걸어야 하는 그 갯벌속에 있었다.

그들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상이,
장면과 장면마다 과하지 않은 채 가진 것 그 자체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내레이션이.
이 프로그램 하나에 모두 녹아 있었다.

구성 공부할 겸 필사도 해보았는데
구절 구절 참 아름답기도 했지만, 기억에 남는 몇 구절을 올려본다.


-한끼 밥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이 아이에게 아동노동이 불법이란 사실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석면가루가 치명적이라는 사실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가난은 힘이 세다.
따지고 보면 단명한 이치다. 사람이든 까마귀든, 자식을 낳고 새끼를 키우기 위해 이 척박한 곳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이별.
지금 고향을 떠나는 벨랄에게 가난은 앞못보는 아이이고, 사랑하는 아내다.

-벨랄과 라흐만은 야간조로 일하고 있다.
5만디카, 우리돈 80만원을 모아 고향에서 장사를 하겠다는
벨랄의 꿈은 오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인간의 땅 2부 <용광로 철까마귀의 날들> 中
글, 구성 문예원 연출 박봉남







엄마의 울음

소소한 수다 2010. 6. 25. 11:22

그건 참 생소한 광경이었다.
만두랑 쩡아랑 맥주나 할까하고 나선 동네 놀이터. 후끈한 여름밤, 시려운 맥주캔을 붙잡고 노닥노닥 사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데 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 정자 가로등빛이 들어오지 않는 자리.
한 아주머니 한분이 울고 계셨다. 뒷쪽에는 따님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분이 같이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가 얼마나 서럽게 우셨냐면, 꺽꺽 터져나오는 신음을 입으로 막아가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울고 계셨다.
쏟아지는 감정의 파도가 너무 커서 건너편에 있는 나까지 찌릿찌릿 가슴 아플 정도였다.  

나는 그러면서도 그 광경이 참 낯설다 생각했다.

우나무노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은 이성보다는 감정이라고.
그런데 사람이 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나는 그 장면을 그토록 낯설어 했던걸까?

TV도 드라마도 영화도 아무도 '어머니'가 소리내어 우는 장면을 담지 않는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거나 묵묵하게 버텨내는 모습만을 그린다.
'엄마'라고 해서 울고 싶은 때가 없는게 아닌데.

나는 짜증나면 목놓아 울고, 서러우면 눈물을 훔치고,
울거나 말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할 것이지,
울는 도중에도 할말이 참 많아서, 목소리와 눈물을 뒤섞어 떨리는 목소리로 지껄이기도 참 많이 지껄인다. 짠눈물을 삼키면서 콧물을 들이마시고 지저분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도 그건 내게 주어진 감정소모의 기회다.더없는 발산 쌓았던 한을 해소하는 축제.  
내게 '울음'이란건 터뜨리는 즉시 그러한 긍정의 기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는 그런 감정의 발산과 소모를 '어머니'에게 허락하지 않았던건 아닐까? 내 스물아홉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우리 엄마가 소리 내 엉엉 울었던 기억이 없다. 매체도 마찬가지다  (특수 상황에서 가족이 죽지 않는 한) 극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땅을 치며 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문득 일상속에서 터뜨리지 못한 채 쌓여만 있을 수 많은 '어머니'들의 수많은 '감정'을 떠올려 봤다.

저 아주머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어두운 놀이터까지 찾아오셨듯이
왠지 우리 엄마가 울음을 터뜨릴 장소는 흔치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출근길에 전봇대에 붙어 있는 <강아지 찾습니다> 용지를 봤다.
가볍고 날렵한 흰색 마르티스.
포상금까지 걸려 있는 전단지에서는 주인의 안타까운 심정이 물씬 느껴졌다.

나도 6년전 겨울 나도 우리집 강아지를 잃고
눈물과 흐느낌 속에 퉁퉁 부은채로 2박 3일 연대와 연희동 일대를 정신줄을 놓은 채 헤맸던 적이 있었다. 아련하게 흐릿했던 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통에 조금 센치해졌다.
(아흑 난다야!!!)

난다를 잃어버리고 재빠른 기동력(->전단지 붙이기)과 인적자원구축(->동네친구들,교회친구들)으로 '난다를 봤다'는 전화를 대여섯통 받았다.
하지만 모두다 우리 '난다'는 아니었다.
그냥 할일 없이 동네를 쏘다니는 '백구'는 너무나 많았다.
아니, 동네에서 놓아 기르는 개의 종류는 백구 밖에 없는 듯 했다.

전화를 받고 만난 개들,
그 중에는 우리 난다보다 훨씬 잘빠지고 늠름한 개도 있었고
눈이 땡그랗고 까매서 더욱 사랑스럽게 생긴 개도 있었다.
전화로 난다를 봤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눈에는
그 개와 우리 난다가 모두 똑같이 보였을 것이다.

신촌까지 쓰레바 차림으로 뛰어갔다가 터덜터덜 돌아오는 나에게
엄마가 한마디 던졌다.
"그냥 난다 대신 데려오지 그랬어?"

그럴수 없었다.
그 어떤 개도 우리 난다를 대신할 수는 없다.

대체불가결한 무언가가 있다.
세상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뽑아낸 물건들이,
같은 종의 생물들이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대체 불가결한 무언가가 있다.

진부하게 '그런게 길들인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감정은 언젠간 물탄듯 뿌옇게 흐려지기도 하는거니까.

그 순간 이게 아니면 안된다, 이것 아니면 안된다. 모든걸 다 버리고서라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있다. 그게 꼭 들어 맞는 순간 그런게 인생의 환희가 되는 것일까?

강아지를 잃은 주인의 애타는 심정이야
백번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반드시 이 시기에 만나라는건 아니지만,
그  강아지 없이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낄 즈음, 반드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 난다도 나와 대체가능한 다른 주인 만나서 어딘가 잘살고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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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소소한 수다 2010. 6. 23. 23:44

글을 쓰는게 어렵다.

단어의 선택, 문장의 배치, 구성의 순서.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글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걸까
나는 쓰고 싶은 말이, 떠들어 대고 싶은 글이 이토록 흘러 넘치는데
그 중 단 몇몇만 고르라니, 참 어려운 일이다.

 

꿈길

소소한 수다 2010. 6. 22. 18:48

좋아하는 노래 중에 김보령 꿈길 이라는 노래가 있다.



작년에 흠뻑 빠졌던 드라마 '탐나는 도다 OST'에 나온 노래인데,
이 노래에 반하게 된 건 단 한 장면 때문이었다.

달이 휘엉청 뜬 밤. 작은 보따리를 싸서 버진이는 달리고 있었다.
금발의 친구 윌리엄과 고향 제주도를 떠나기 위해서. 
그 갈대밭 속 버진이는 넘어져 다리를 삐어도 아랑곳 않았고 
향할 곳도 오직 하나였다. 

그리고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조선시대, 그것도 제주도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여성의 삶.
물질 하나로 정해진 일생. 벗어 날 수 없는 멍에.
그 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을 벗어던졌을 때 느꼈던 가벼움만큼은 탁트인 벌판 아래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여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 노래를 꺼내 듣는다.
그 언젠가 지금 나의 모습을 다 버린다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여행의 욕구가 차오를 때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을 다지고, 주먹을 꼬옥 쥔 채로,
떠나가겠다.








뎡이 웨딩 촬영에 입을 티셔츠를 인쇄하러 동대문에 갔었다.
티셔츠 인쇄해줄 아저씨와 다섯번의 전화통화 끝에 무사히(간신히)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사무실로 출근하기 위해 검색으로 찾아 놓은 261번을 버스를 탔다. 
내 손에는 얼음통에 넣어온 곰다방 더치커피가 있었으며 이번주 한겨레21과 시사인이 들려 있었다. 네이버 추정 58분의 소요시간도 두렵지 않았다.

한참 가고 있는데 하늘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소낙비가 아무리 세차다 해도 국회의사당 부터 뛰면 되겠지 싶어서 시크하게 무시했다.
지금돌이켜보면, 버스 안내 방송에서 '외대'를 외쳤을 때 좀 이상하다 여겼었어야 했다.  

한참 가고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다. 월계동;;; 여긴 어딘가요? 성북역은 또 뭔가요? 한예종 앞은 왜 지나치나요? 광운대는 갑자기 왜 나오나요? 버스 탄지 약 오십분 만에 나는 버스 노선을 확인하기 위해 엉덩이를 똈다. 노선을 확인하자 마자 내리는 벨을 눌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굵은 빗방울이 새까만 콘크리트 바닥을 후려치는 화요일 오전.
낯선 동네에서 우산도 없이 261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버스지만 이번엔 반대 방향이었다.
일상탈출! 비오는 풍경. 익숙한 듯 새로운 낯선 동네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버스에 다시 타고 비내리는 풍경을 한참을 봤다.
광운대도 지나고 한예종도 지나고, 좀 지나면 외대가 나오겠구나. 학교가 많은 동네구나 싶었다. 우리 동네 같겠다. 이 동네에도 이 동네를 '고향'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골목마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눌 친구들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2차선 도로는 무척이나 좁았고 낮은 건물 아파트 상가들의 소소함이 마음에 들었다.
분명 이 동네를 즐길줄 아는 사람이 이 동네에 살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갑작스런 비 때문인지 버스에 타는 사람들의 손엔 우산이 없었다.
젖은 옷의 물기를 털어내기에 바빴다. 그들이 털어내는 물줄기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을만큼, 혼자 앉아 에어콘 바람을 쌀쌀하게 느끼지 않을 만큼, 버스는 딱 그만큼 한산했다.

외대가 나왔다.
이 동네에서 추억이라곤 곰언니와 파전에 동동주를 먹었던 기억밖에 없다.
갑자기 곰언니 생각이 나면서 울컥해졌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창밖에는 추적 추적 비가 오고 있었고, 난 완전 쌩뚱맞은 낯선 동네에 있었으며, 버스 맨 앞자리 울어도 아무도 모를 위치였고, 반이상 마신 곰다방 커피 덕에 내 감성은 충분히 말랑말랑해졌으며, 내 엠피쓰리에서는 옛 회상과 감상을 리플레이시켜줄 음악이 줄창 흘러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이다.

도망쳐 나온 사람은 변명할 거리밖에 못찾는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부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떠오린 장면은 대학교 3학년 끝무렵. 과학생회장으로 온 몸과 마음이 너덜거릴 때였다.
그 당시 나를 위한 변명을 시작하자면
내가 속한 단대 학생회 사람들과의 싸움이 지긋지긋했고, 사람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을 때였다. 성공이라기 보단 실패가 주는 열패감이 머리 끝까지 차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나서고 싶지 않았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건데? 왜 내가 해야하는건데?
부총 후보 나가라고 설득하던 선배 언니들 전화 피하던 시절이었고 강의 끝나면 사람들 눈에 띌까 도망치기 바쁠때였다.

학교를 정리하고 사라진 곰언니가 나를 만나러 온건 그 때였다. 꼭 1년만이었다.
언니는 나에게 그 어떤 말도 묻지 않았다.

'앙증, 많이 힘들구나.'

차라리 왜 그렇게 비겁하게 숨기만 하냐고 추궁했다면,
그따위로 도망다니는 후배 나는 둔적 없다고 매몰차게 말했더라면,
너밖에 나갈 사람 없으니까 니가 나가야한다고 강요했다면.

아마도 나는 선거를 나가지 않았겠지.

그냥 그 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1년간 입었던 상처를 고름 터뜨리듯, 엉엉 우는 내 곁에
말 없이 있어준 언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그 고마운 기억이 쓸데 없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
아마도 '이상한데서 잘운다'의 운세를 타고 난건 서눈물이 아니라 바로 '나'인듯.

다시 원점 동대문에 도착했을 땐 하늘이 말끔하게 개어 있었다.
버스 바깥 곳곳 처치곤란인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어제 섭맨의 명대사 '여자들은 다 똑같애'를 노래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이들었다.
문자를 넣었다.좋단다. 가사는 나보고 쓰란다.
어제밤 고작 맥주 한캔을 마시면서 땀을 뻘뻘 흘린 이유가 오늘에 있었구나.

코러스 가사만 쓰겠다고 했다.
나는 '남자들이 더 똑같애'라는 가사로 후렴구로 넣고 싶다.

여자들은 다 똑같아. 남자들의 능력만 보잖아.
남자들은 더 똑같아. 여자들의 외모만 보잖아.

제법 그럴싸한 노래를 만들 수 있을것 같았다. 어제 밤 놀이터, 둘다 루저인 채로 맥주 캔이나 따고 있는 우리들 옆에는 고양이 두마리가 눈이 맞고 있었다. 고양이마저 짝이 있는데 내 짝은 없는 더러운 세상.

하지만 나도 섭이도 실패자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삶들이 모여 있을 뿐.

을지로를 지날 때는 엉덩이가 아팠다. 길도 막혔다. 감상으로 풍경을 즐기기엔 이미 두시간 가까운 시간을 버스에 앉아 있었다. 오늘 사무실에 나가서 할 일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녕 (말이 좋아) 프리랜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주는 장점은 이것 하나구나 생각했다.

261번 버스는 여의도 마저도 빙빙 돌아서 나를 국회에 내려주었다.
이번 글을 수미상관으로 끝내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뎡이와 세준이의 웨딩 촬영용 티셔츠가 잘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ㅎㅎㅎ






좋아하는 일을 해서, 정녕 행복하다는 말을.

얼핏 참 쉽지만 진정 어려운 그 말을. 나도 가슴 깊숙히 진심으로 외쳐보고프다. 어른이 되는 일은 꿈꾸던 모든 것을 자꾸 깎아 내리는 일 같아서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그런가?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가 눈물 콕 찍어낼만큼 이렇게 서럽고 슬픈게.


2008년 10월의 일기였다.

나는 오늘 이 일기를 다시 꺼내 본다.
원고를 쓰는 걸로 만나게 된 두번째 프로그램. 나는 참 운이 좋았다.
이 프로그램은 그토록 꿈꾸는 프로그램과 상당 부분 닮았다.
많이  배우고, 좀 더 자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오늘 내민 첫번째 구성안은 예상보단 덜 혼났고,
두번째는 이렇게 하니까 훨씬 낫다는 이야길 들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한가?
그렇다.
이렇게 말해 놓고 나면 너무 오만한 대답일지도 모르겠지만.

즐겁고 재밌다.


꿈마저.

소소한 수다 2010. 6. 7. 21:50

나는 꿈마저 다큐로 꾸나보다.

친구 중에 자신의 꿈을 맛깔나게, 블로그에 정리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따라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도 어제 내가 꾼 꿈에 대해서 좀 논하고 싶다.

오늘 심야근무가 예상되길래 어제는 일찍 잠에 들었다. 0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본다면, 나의 하루는 언제나 똑같다. 만화책으로 점철되는 약간의 여가와 새벽 2시경 이루어지는 잠. 어제는 무려 밤 10시에 침대에 누웠다.  특별히 할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되어버린, '내일'이 바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잠은 오늘 아침 8시까지 이어졌다.

꿈은 세 편이었다.



첫번째 꿈.
이제 한달 된 우리 자료조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억이 맞다면 굉장히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선배님 저 내일부터 안나가요. 참 프리뷰 테잎이 *개 남았어요.' 라고 말했던거 같다. 그래 떠나는 너에게 무슨 근거로 프리뷰를 마저 하라고 하겠냐.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나는 내일 있을 빡빡한 일정을 짜보며 괴로워했던 것 같다.

다행이다. 막내는 오늘 무사히 출근했다. 그누구의 출근보다 그녀의 출근이 궁금했던 오늘이었다. 프리뷰도 다 마쳐주었다. 그 덕에 나는 편구를 무사히  써냈다. 이 꿈의 근거는 요즘들어 유달리 어두워 보이는 우리 막내의 표정 덕분이라 하겠다.



두번째 꿈.
정확히 11년 전이었다. 나는 무려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3반이 우리반이었다. 11년만에, 우리반은 뒤집혀 있었다.
 전학생 하나가 왔다. 그녀는 자기네는 남녀 합반인데 짝궁을 했다고 했다. 누군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우리도 남녀 섞어 짝을 하고 싶다고 외쳤다. 요청은 요구가 되어 거세어졌다.
영진은 남녀 짝을 시켜준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이 자신의 짝을 찾기 시작한 건.  2학년 때 내 번호는 40번이었으니까 나도 남자 짝을 찾고 있었다. 남자 10번은 누구였니? 나는 출석부에서 이름을 뒤졌다. 하지만 이름을 찾지 못했다. 궁금해서 이 애 저애 묻고 다녔다. "니가 10번이니?" "아니면, 누가 10번이니?"
서*혜는 좌절하고 있었다.  꿈 속에 그녀는 유*과 짝궁이었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섭의 짝궁이었다. 11년 후에도 그녀들은 그들의 짝인 운명이었나보다.  
아무래도 내가 이 꿈을 꾸게 된 건, 금요일날 정*은과 곰다방에서 기나긴 데이트를 했기 때문인것 같다. 우리가 한반이었던 건 참 다행이었다. 나는 선거 후유증을 열변으로 뭉쳤고, 단단하게 뭉친 감정을 밖으로 마구 끄집어 냈다. 그녀가 동의해줘서, 그런 그녀를 알고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집을 뒤져보면 2학년 3반 명렬표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꿈에서 찾지 못한 남자 10번을 찾겠다. 나의 짝궁을 찾는다 해도 이젠 더이상 짝궁이 되지 못하겠지만, 누가 될지 (기대는 커녕) 너무나 두렵다;;; ㅋㅋㅋㅋ



세번째 꿈
학생회관 사범대실에 앉아 있었다. 대학시절 학생회관 왠만한 방은 다 내방드나들듯이 드나들었다. 4층 동아리방은 말할 것 없이 사대 자대 문만 열만 친구들 얼굴이, 인사하는 후배들의 목소리가, 고개를 숙여야할 선배들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는 시크하기로 정평난 짝수 학번 선배들을 닮고 싶었다. 하지만 시끄럽게로 유명한 홀수학번을 닮아가고 있었다. 선거 끝무렵이었다.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정체 불명의 요리는 이제 그만 먹고 싶다고 선본짱을 닥달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시절이었다. 나는 내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뚫리는 것 하나 없이 갑갑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미워할 것이 너무 많았고, 바꿔야할 것 투성이었다. 때론 미워할 대상에 내가 포함돼 있기도 했었다. 나 자신이 부조리한데 누가 누굴 욕해. 비겁한 내가 싫었고 그런데도 겁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절이 뭐 그리 좋다고 뭐 그리 그립다고 이런 꿈을 꾸고 있나.

이 꿈의 근거는 절친노트 서울예전 재방송을 봤기 때문인 것 같다. 언젠가 학생회관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동창회를 해보고 싶다. 그자리 그대로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말을하고 그때를 기억하고 싶다. 다시 한번 재연되는 그 상황 속에서 그때 우리는 무얼하고 있었는지 다시 되새겨 보고 싶다.



나는 꿈마저 이렇다.
창의성 씽크빅 한번 휘갈기지 못하고 있는 팩트 그대로, 있을 법한 일들이나 이미 있었던 일들을 재연(?)하질 않나, 사실에 근거해서 사실에 근거한 꿈만 꾼다.
꿈속에서 만이라도 하늘을 날고 바다를 가르고 창공을 휘저으며 스펙터클한 어드벤쳐의 세계로 날아보고 싶다.

꿈의 구성마저 너무나 평이하다. 재미 없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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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 스님의 소신 공양 기사를 읽고 마음이 참 아프다.
나는 불교는 잘 모르지만,
뜻한 바를 위해 내 모든 걸 내던지는 건 참으로 힘든 결단이라는 건 잘 알겠다.
4대강으로 삶을 빼앗기는 수 많은 생(生)을 보면서
그것을 남이 아닌 자신의 일처럼 여기셨구나 추측해본다.

문득,
친구가 건네준 도마서의 구절이 떠오른다.
이 구절을 읽고 무릎을 쳤다.
도마서가 왜 신약성경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 다시 한번 느낀다.
예수의 이 말은 파격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세기를 뛰어넘는,
그것도 2000년을 뛰어 넘는 빨간책이었다. 혁명서였다.

"그대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대가 안이 밖과 같고 밖이 안과 같으며 위가 아래와 같게 만들때,
그대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똑같게 만들때....
그때 그대는 신의 궁전에 들 것이다."


예수는 너와 내가 같아지고, 여자와 남자가 같아지고, 위와 아래가 없어지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언젠가 교회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건넨 말이다.
"예수님이 이명박을 사랑하실거 같아? 연금혜택을 빼앗겨서 연탄을 때지 못한 채 촛불을 켜서 몸을 녹이다 돌아가시게 될 할머니를 사랑하실거 같아?"

친구가 말했다.
"예수님은 둘다 사랑하셔."

친구의 말이 맞다. 예수는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또 하나있다.
예수는 이명박의 죄는 사랑하지 않는다.

이명박은 단 한 번도 그 할머니와 자신을 동일시 한 적이 없다.
아니, 동일시 한다 해도 동일시한 생각을 행동한 적 없다.
궁핍함을 게으름의 부산물이라 말한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은 위로 올라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위와 아래의 구분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그것은 너와 나를 구분짓는 경계다.

내가 아는 예수는 이토록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십자기에서 소신공양을 하였는데,
요즘 세상이, 한국교회가 말하는 예수는 내가 아는 예수와 참 다른 것 같다.  

왜 이렇게 다를까, 무엇이 이렇게 다를까.

내가 아는 예수가 잘못된 예수인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진보의 씨앗

소소한 수다 2010. 5. 29. 23:27

어제 진보신당 선거대책위원장의 단체 문자가 왔는데,
버스 타고 오다가 울컥했다.

"진보 정치의 소중한 씨앗만은 반드시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마디가 왜 이렇게 절절하면서 슬프던지.
2002년에 민노당 가입했다. 올해 초 진보신당으로 옮겼고 지금까지 8년이 지났다.
매번 선거 때마다 한다고 했는데, 주변사람들에게 투표도 시키고 기를 쓴다고 썼ek.

친구들이 부정적인 나의 시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일 같이 입에 달고 살았다. 나라를 욕하고, 기성세대를 욕하고, 계층을 욕해왔다. 모르고 있으면 이게 문제인지도 영영 모르기 때문이다.
 
여튼 그러기를 8년. 하지만 내가 속한 당은 아직도 '씨앗'이다. 나는 아직도 소수고, 아직도 주변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외롭고 가끔은 쓸쓸하다.
 
2002년 민노당 가입 당시만 해도 '소수정당'임은 알고 있었다. 곧 뿌리내리고 꽃피울줄 알았다. 그렇게 믿었다. 지금 그 믿음이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젠 좀 보고 싶다.

내가 더 나이 먹기 전에, 내가 더 늙기 전에. 이 열정이 사라지기 전에. 살아온 젊은 날을 부정당하기 전에. 우리 정당에서 나온 후보가 기호 1번이 되고 여기저기 현수막 걸려 있는 모습을. 기업에서 돈받지 않고 스폰 없는 제대로 된 정치인들이 나오는 그 사회를. 좀 보고 싶은거다.

언젠가 내가 가진 믿음이 낡디 낡디 낡아서
인간은 조금 더 평등해야한다고 다양할 수 밖에 없다고 조금 더 자유로울 수 밖에 없다고  
인간의 존엄성이 누려야할 권리는 아직 멀었다고 외치는
그리하여 나를 향해 '보수'라며 '세상과 타협했다고' 손가락질 할 새로운 세대를
기다린다. 제발 죽기 전에 좀 만나보고 싶다.




실망

소소한 수다 2010. 5. 26. 17:31

얼마전 친구에게 실망을 했다. 나와 다른점이 있었다. 남들이 보면 그건 큰차이는 아니었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분명 큰 차이였다.  

무심코 지나친 그 한마디가 자꾸 와닿는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내내 오늘까지 곱씹는다. 씹고 또 씹고, 곱씹고, 질겅이고 풍선껌 마냥 풍선을 불어본다. 왜 그런 차이점이 있을까를 고민한다. 고민의 답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니까.  

별것 아니라고 간단히 넘어가면 별 것 아닌이야기였다. 날 향한 얘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인신성 발언도 아니었고.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미묘한 차이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그토록 큰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애를 믿었다.
친구지만 존경했다. 좋아할 점이 무척 많은 애였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그애가, 아니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건 나에게 큰 만족이었다.

그 차이가 너무나 안타까웠고, 차이는 넘지 못할 벽으로 느꼈다. 그래서 슬펐다.  

'정해진 미래란 없다.'
스물 아홉 먹은 나는 아직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이 생각을 그만두는 순간, 스스로를 늙었다 여길 것이다.








'생각하는데 실천하지 않는 건 분명 비겁한 일이다.'
그건 '절망'이다. 모든 사람이 알게 되도 부조리한 이 세상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이 말들을, 나의 이 생각을 부끄러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물 아홉.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존경할 지점이 많은 친구였는데, 어제 그 한마디가 그 무수한 존경의 지점들을 몽땅 지워버렸다. 슬픈일이다. 나는 겁이 났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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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독 만화가 나의 이백마디 보다 훨씬 더 나은것 같아 첨부해서 올린다.
나에게도 이렇게 곱고 부드럽게 선거를 권할줄 아는 기술이 있었음 좋겠다.

열센치.

소소한 수다 2010. 5. 25. 10:31


회사에서 밤을 샜다.
여튼 덕분에 몽롱한 상태인데,
이대로 오늘 나머지 일과를 집에서 보낼수만 있다면 나는 만족하겠다.

10cm의 앨범을 주문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씨디가 도착하기 전 회사 동료에게서 음원파일을 선물받았다.
난 게으른 인간이니까, 씨디를 내방 크로슬리가 아닌 노트북으로 듣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리핑의 수고를 덜었다.


10cm의 씨디를 지르게 된건 정말 말그대로 '지름'이었는데,
단 한 문구의 카피가 결국 지갑을 (아니, 은행공인인증서가 들어있는 USB를 내 노트북 포트에 꽂게) 열게 만들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커피와 담배를 모를 순 없다

아~ 이 문구!
요,요,요,요 요 문구!! 이게 빵터지면서도, 왜 이렇게 왈칵 치솟는게 있는거임?
그렇다 가난하다고 해서 커피를 모를 수는, 담배를 모를 수는 없는 법!
(나는 나도 모르게 담배를 술이나 고기로 지워서 읽고...)

여튼, 가사가 좋다.
본질적인 감정은 공감하지 못한다고 쳐도 적어도 가사 뒷배경만큼은 공감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번지는 이야기 하며 주변 묘사하며  90년대 틱한 가사가 마구 쏟아진다.
가사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되지는 못하는데, 적어도 나 십대때 꿈꿨던 '20대의 내 모습'과는 닮아 있으니까. 일말의 동질감을 느끼는거겠지.

개인적으로 이런류의 노래를 불러줄 사람은 내 주위에는 섭맨 밖에 없는거 같고,
나는 섭맨이 노래를 부른다면 이런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
너무 빠르지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고.
욕심내지 않고 대신 바랄 수는 있는 노래.
여튼 인간 보편적인 정서를 말해줄 수 있는 노래다.
'인간의 욕심'에 보편적인 정서가 아니라.
섭맨은 나랑 동갑이니까 나랑 같은 걸 보며 자랐고, 동네도 얼추 같으니까 같은 곳에 머물렀겠으니 분명 교집합이 있겠지.  음미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게 많다는 건 참 기쁜일이다.

여튼 오늘의 결론은
잠이...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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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걸음질 결혼식
회사 갈때도 일어나지 않는 시각 오전 8시에 기상해서 110번 타고 한시간 20분을 달렸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교우회관까지 걷느라 기절 대기절. 왤케 멀어? 왤케 멀어?
가까스로 식장 도착. 신부대기실에 있는 뒷걸음질을 보고 기절했다.

난생처음이었다.
뒷걸음질에게 "야 너 이쁘다"라고 말한 건.

진짜 오래간만에 경진이 얼굴도 보고, 보라언니 열매언니 병주오빠 등등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이었다. 결국 결혼식은 끝까지 보지 못했지만
축하하고 축하하는 이 마음이랑 잘살라고 앞으로 내내 기도한다는 말은 전해주고 싶었다.
"입장하는데 뒷걸음질 너 1학년때 과대했던거랑 2학년때 우리 친해졌던거 3학년 때 답사장으로 개고생하던 그시절이 소소하게 기억나는 바람에 울컥한거 있지?
선물, 받고 싶은거 빨리 말해~ 시간이 지나면 말하기 더 어려운 법이라고. ㅋㅋㅋ"


*그리고 나는 사무실에 잠시 들렸다가;;;;; 다시 또 다른 결혼식장으로

*오군네 둘째 누나 결혼식
141번을 타고 역삼 청운교회까지 친히 왕림했다.
오군네 누나 결혼식이었는데, 신랑 미남이야! 신부 미녀야! +_+
예배 시작 전 주보에서 봤는데 신랑, 즉 오군의 매형의 아버지 성함이 피자회사 이름이었다.
문병기 왈, 이 사람이 그사람이래!
예전 내 친구 금댕이가 대학 다닐때 파일 가방 대신 그 피자집 메뉴판을 들고 강의실에간 대사건이 있었는데 말이다. 내 친구 금댕이를 대신해 오군의 매형, 그 아버님께 사과의 말씀전합니다. 

*택시타고 서울 구경
앞으로 상당기간 고수입이 예상되는 문*기가 자꾸 택시타자고 우기는 바람에 (지방살다 왔더니 적응이 안된단다) '니들이 내면' 이란 조건을 달았다.
황우성 내려다주고 (중앙대) 택시비의 거의 대부분을 낸 문*기 데려다 주고 (목동)
그리고 집으로 왔다.
고대찍고, 여의도, 강남찍고, 중앙대, 목동, 다시 신촌까지 그야말로 서울 대유람;;;
집에 도착한 것은 4시 30분. 그때부터 나는 원고의 패닉속으로;;;;;


*스쟈 언니 결혼식
새벽까지 원고 쓰고 아침에 일어난 것이 10시. 12시 결혼식이니 11시 30분에는 도착해야 스자언니랑 사진정도는 찍을 수 있을것 같았다. 회사 출근해야하는게 1시니까 완벽해. 결혼식은 보고 가겠구만 생각했었다. 국회도서관 지나치고 의원동산으로 향하는데
뭔가 황량해;;; 이상해;;; 허전해;; 아무도 없어;;;;

결혼식은 1시였다.
결국 나는 빈숲에서 쓸쓸히 한시간을 보내다가 스쟈언니와 사진을 박은 뒤 쓸쓸히 사무실로 돌아서고야 말았다는 이야기를 추가한다.


*강선배님 결혼식
사무실 돌아와서 수정된 부분 타임체크 다시하고 원고 좀 더 손본 다음, 내가 향한 곳은 목동 웨딩의 전당. 결혼식 전 이번 편 담당 피디님과 새 아이템에 대한 간단한 정리를 마치고 결혼식에 참여했다.

아! 씨엔블루가 축가했다. 잘생겼는데 너무 다 비슷하게 생겼다. 아이돌은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경우의 수가 중요하다. 선택의 다양성도 존중되어야하는 법이지.



*종로 연등축제
커피나 한잔 할까 하고 이금댕에게 문자 보냈더니 동네파 중 몇몇은 오늘 종로 연등 축제 구경간댄다. 나 안그래도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고쳐야할 원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로로 향했다.
다섯자리를 맡아두고 당당하게 앉아 있는데 여기저기서 백번 물어본다.
"거기 자리 있는거에요?"
"네 화장실 갔어요. 금방 올건데..."
가지도 않은 화장실을 갔다며 조마조마 동네파를 기다렸다.
예전부터 나는 맡아두고 기다리는 담당이었다. 대학때도 도서관 대여섯자리는 언제나 나의 책과 노트로 뒤덥혀 있었더랬지.

드디어 행렬이 시작됐는데...
아! 나 이거 직접 보고 싶었어. 너무 설레. 게다가 좋아하는 놈들이랑 있으니까 더 신나. 완전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치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큰 덕분에 불교적 지식이 없다는게 만천하에 공개 됐다. 
"그니까 흰코끼리는 석가모니의 전생 아니냐고? 저 무섭게 생긴게 사천왕이냐고. 동방장군지국천은 옛날 클램프 만화 성전에 나왔던거 아니냐고. 거기선 쭉쭉 빵빵초 미녀였다고."
주기자가 쪽팔리다고 입좀 다물라고했다.
이 와중에 이금댕은 불자들이 행진하며 외치는 "성불하세요~"라는 말을 "함사세요~"로 들었다는 후문이.( 이건 2010년 슈동 크리스마스 때 퀴즈 문제가 되겠다. ㅋㅋ)

세시간 남짓 연등 행렬을 봤는데. 역시 종교는 퍼포먼스구나. 없는 불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어디선가 보고 계시는 부처님. 나라가 이모양 이꼬라지입니다. 백성들이 진흙탕에 엉겨살고 있어요. 자기 조금 더 잘사는 것에 혈안이 돼, 살아 있는 많은 것들을 살생합니다. 다들 눈이어두워 '나'밖에 보지 못합니다. 이런 진흙탕을 정화시킬 연꽃같은 무언가가 나타날까요? 제 짧은 소견으론 '아마 안될거야'인데 말이죠."  
빌고 싶은 것이 참 많았고, 등의 행렬이 정말 끝이 없어서. 연등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을것 같았다.

종로를 지나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치킨 맥주 어떠냐고 꼬셨지만 나는 원고를 다시한번 수정봐야했고, 출연자와 통화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거침없었던 5월의 주말 일정은 이것으로~~~






아 나 정말 이번 주말 서울 곳곳 안찍어 본데가 없는거 같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올 한해는 어떤 경계란 생각이 든다.
이 선을 넘게 되면 할 수 없는게 뭐가 있을까를 생각중이다.
동네파와 함께한 스물아홉이 가기 전 일도 그 일환의 하나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노래'다.




스물 아홉 첫번째 노래 - 서른 즈음에
나 스무살때 학교 동아리 가장 나이가 지긋한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가 생일맞이 한 날 불러준 노래가 바로 '서른즈음'이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때'다. 밤을 새워 술마시고 동터오던 산너머를 보던 탈방. 그때 나는 무얼보고 무얼 깨닫고 무얼 결심했었나.
스물 아홉에 부를 첫번째 노래로 나는 단연 이 노래를 꼽는다. 그러면서도 아마도 이 노래는 서른 두살까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즈음'의 범주를 어디다 두는지가 중요하겠다.



스물 아홉 두번째 노래 - 우리스무살때
이 노래는 정말 올해가 아니면 부를 수 없는 노래다. 아니, 엄연히 따지자면 이 노래를 스물 아홉에 부른다는 것 자체가 억지 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해의 마지막날 이 노래를 부르겠다.

언젠가 비오던 날 이 거리는 술잔에 흔들렸고,
떠나는 그대는 바람이었어라 바람이었어라.
나는 보았네 그대 두눈에 가득 고인 눈물.
할말도 못한 채 돌아서야 했던 바보 같던 시절.

사랑하나 못하면서 사랑을 앓던 시절
손뼉을 치면 닿을것 같은 스무살 시절의 추억

먼 훗날 그대 이름조차도 잊혀 질디라도
어딘가 남아 있을 듯한 그때 우리 모습들.

대학 졸업식 때 이 노래를 속으로 불렀다.
나에겐 바람이라고 부를 '그대'도 없었으며, 할말도 하지 못한채 돌아서던.. 추억 역시 없었다;;; 하지만 '손뼉을 치면 닿을것 같던 추억'은 너무나 많아서. 그 시절 추억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만큼 선명하게 남아서 나는 이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십대를 어떻게 추억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스무살 때에 포함되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 (비록 스물 아홉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올 한해, 어딘가 남아  있을 듯한 '그때의 모습'을 잔뜩 만들고 싶다.  





스물아홉 세번째 노래 -나이 서른에 우린

1절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우리들의 노래와 우리들의 숨결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저 거친 들녁에 피어난  고운 나리꽃의 향기를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2절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이름으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꿈꾸게 될까  아주 작은 울타리에 갇히진 않을까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약속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빈 가슴마다 울려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를 나이 서른에 우린  들을 수 있을까

아무리 따져봐도 '서른'을 그려보고 꿈꿔볼 수 있는 나이는 올해가 마지막이다. 서른이 지나면 단지 '서른에 뭘했었나'를 추억할 수 있을 뿐.

몇번 언급한적이 있었지만, 나는 민중가요패와 함께 쓰는 동아리방을 쓰는 동아리에 몸담고 있었다. 이 노래 역시 옆동아리 놈들이 줄을 선채로 박자에 맞춰서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농활가서도, 선본방에서도 정말 줄기차게 불렀더랬다. 그때 꿈꾸던 '서른'을 생각해 보고, 그때 그리던 '나의 서른'을 떠올려 보고, 얼만치 변했나를 계산 하다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감정도 많아진다.
'빈 가슴마다 울려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라는 가사를 오래간만에 들으니까
아! 정녕 주책맞게 코끝이 시큰해지는 게 울컥 울컥 치민다.





스물 아홉 네번째 노래 - 검정치마 <강아지>

'시간이 스물아홉에서 정지할꺼야'라고 친구들이 그랬어.
오 나도 알고 있지만 내가 열아홉살때도 나는 스무살이 되고 싶지 않았어.

검정치마 강아지.
이 노래는 내가 찍힌 다큐 <개청춘>의 엔딩곡이다.
서른이 되면 '시간이 스물아홉에서 정지할꺼야'라고 말할 순 없을테니까.
('결코 스물 아홉에서 정지하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장면과 직면한 순간일테니)
이 노래를 올해 불러야할 목록에 넣었다.

이십대에 잘한 일 중에 하나로 꼽는 걸로 <개청춘>을 출연을 꼽겠다.
영화의 대의를 떠나서,
적어도 이십대 중후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추억할 수 있고,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동네파의 모습도 곳곳에 찍혔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반이다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그리고 올해가 가기 전, 언젠가
"82년 개띠들" 넷이 모여서 검정치마 강아지노래를 부를수 있는 그날이 오길.





동전 두개

소소한 수다 2010. 5. 2. 16:48


어제 다모토리에서는 <015B>의 <텅빈거리에서>가 흘러 나왔다.
동네파 아이들과 떠들고 있는데 정말 기절할만한 가사가 나왔다.

떨리는 수화기를 들고 너를 사랑해 눈물을 흘리며 말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야윈 두손에 외로운 "동전 두개"

그 가사에 망치를 한대 얻어 맞은 듯했다.
그래, 그 시절에는 공중전화 통화료가 2000원 200원도 아닌
(십원짜리) 동전 두개였었다.
지금은 문자 한건 가격이나 되던가;;;
수다스러운 멀티 메일은 20원으론 택도 없을지도 모른다.

주기자가 캐 폭소할만한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해줬는데,
그 시절 공중전화 박스에 20원이 남아 있으면 아빠 가게에 전화 걸어서
"된장 찌개 하나 배달해주세요"
라고 말하고 전화 끊어버리곤 했단다.

공중전화 옆에 붙어 있는 곳곳에 하숙집에 전화해서
"방 있나요?"
라고 묻고 끊은 적도 많았단다.

자신은 완벽한 장난전화를 했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꼬꼬마 목소리(이자, 자신의 딸 목소리;;;를) 알아보지 못할 어른(부모)가 있을턱이;;;
그야말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왜냐면 나역시 동네 공중전화마다 붙어 있는 하숙집 전화번호를 보며
'장난전화나 한번  해볼까?' 하는 큰 유혹을 받았었으니까.

결국 텅빈거리를 노래한 윤종신이 야윈 두손으로 20원을 쥔 채 
'자니...?'라는 전화를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인생의 비극이란
82년 혹은 83년에 설계된 우리들이,
80년대와 90년도에 제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생각과 습성을 장착한 채 21세기를 살아가야 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비극"이다. 






요즘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
덕분에 생각치 못했던 생각,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느끼고 산다.

금요일에는 금댕이랑 '커피 볶는 곰다방'을 갔다.
곰다방이 주는 허름함과 낡음. 츄리닝 입고 와서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아무 거리낌 없을 것 같은 '부담없음'에 정말 반하고 또 반했다.
왜 이제사 이런 곳을 알게 된 것일까?
사장님 왈, 설날에도 열고 추석에도 연단다.
명절때는 책 두권 쥐고  이리로 대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스테레오가 없어진 상실감을 80%정도 채워준 듯 했다.
(우리집에서 자전거타고 15분. 그것도 사람 많은 홍대를 달려야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며칠 전에는 쩡아네 출판사 사장님과 밥을 먹었다.
좋은 분이란 생각이 들어서 참 다행이었고.
여러 방면으로 알고 계신게 많은 분이라 큰 자극도 됐다.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한 지점'이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어제는 진보신당 선거 위원장님과 식사를 했다.
잡채덮밥에 고기를 빼고 주문을 하셨다. 채식을 하신다고 한다.
'동물권'을 생각해서, 시작하게 된건 2년 전부터.
이유는 간단했지만, 이만큼 명료하고 명쾌하게 떨어질 순 없다.
모든 사욕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고기' 하나의 이유 만으로 비구니가 절대 되지 못할것 같은 나에겐 더욱 그랬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실 요즘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려고 발버둥쳤었다.
대게는 실패했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겹치는 교집합이 너무 작아 실망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나보다.
좀 더 다른 곳에서 새로 찾아보는 모험이 필요했다.
여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들을 머리속에 집어 넣고 있다.
직장동료들과 친구들. 회사와 동네.
빤하고 빤한 반복되는 일상. 이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덧대고 있다.
하루하루가 신선하고 기대된다.

파랑새는 살던 집에 숨어 있기도 했지만 그 얘긴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얘기고.
내 파랑새는 어쩌면 저 먼 나라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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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어제, 오늘.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좋다'는 노래를 듣고 있다.
노래가 염려하는 것은 단 하나다.
'너와 나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것'.
'너를 보기 위해선 밤거리를 한참 헤메야 한다는 것.'


그냥 이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마음'이 참 값지단 생각을 해봤다.

 
니가 다른 사람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뺏고 싶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놔주지 않을테다.
요즘 참 흔한, '소유를 향한 욕망'을 '여지 없이, 여과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가사들을 떠올려봤다. 그것이 솔직한 것일까? 그렇다면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마음일까? 부족함이 포함된 다소 모자란 마음일까.

요즘 노래들은
강을 무너뜨리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쓸어서라도
돈을 버는 '내'가 되고 조금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우리'가 된다면 상관 없다고 말하는, 지금 이 사회와 참 많이 닿아있다. 그래서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게 참 불편하다. 


새끼손가락 걸고 영원을 맹세하고
백발이 되어서 너를 잊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들은 어디로 가버렸나?
이젠 '멸종'된 것 처럼 느껴지는 많은 것들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살았었는데.

'내가 사랑하는 너'보다 어느새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내'가 중요한 세상이구나.

그래서 나는 자꾸 90년대 만화책을 사모으고 80년대 가요를 찾아 듣게 되나보다.

금요일 밤이다.
다모토리 가서 노래 부르고 싶다.



조하문-같은 하늘 아래




오늘 까지 아이템이 불투명한 상태라
또 다시 조급한 마음이 밀려온다.

4월달부터는 정신 차리고 살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런 이유로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라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외쳤었군.
여튼 분명한 것이 있다면, 나는 2010년 마음 먹은대로 살고있지 못하다는 것. 하나다.

나는 팔자에 불'火'자가 많기 때문인지 나의 자잘한 조급증을 못견딜 때가 많다.
나쁜 생각에 나쁜 생각을 거듭하면서 내 인생을 극한으로 몰고갔다가
조금 더 나아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쾌감을 자주 즐긴다.
건강에 좋지 못한 습관이란 생각은 한다.

남이 조금만 조급해 해도 힘들어 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얼마나 조급해 하고 있는가?

여튼, 나는 목요일부터 야근에 새벽출근을 밥먹듯 하고
주말 내내 출근 혹은 취재를 하면서 그 와중에 원고를 썼다.  
한가지 분명한게 더 있다면, 쉴 때가 됐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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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렸다.
몸살 한번 안걸리고 초중고대딩 시절을 보냈는데
재작년 11월을 고비로 1년에 한번씩 골골대고 있다.

문제는 언제나 씩씩한 내 목소리인데,
아파도 아픈게 티가 안나.
몸살나서 죽겠는데 그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목이 쉴만큼 쉬고 기침이 너무 심해서 병원가겠다고 조퇴한다고 했는데
내  앞에 바로 조퇴 허락 맞은 우리반 꾀병여왕의 리얼한 연기 덕에
나는 하나도 아파보이지 않았다. 양호실에서 약 몇알 얻어 먹고 보충수업 띵기는걸로 끝내야 했다. 이렇게 써 놓으니 아파보이지 않아서 당했던 수많은 일들이 생각난다. 아! 억울해.

여튼 화요일에는 조퇴를 했다.
정말 회사 길건너에 있는 병원 갈 엄두가 안나더라.
인어공주 다리 달고 첫걸음 딛는것 마냥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씬 거리더니
허리 다리 무릎 어깨 팔목 심지어 이빨까지 아파왔다.
그냥 회사 앞에서 택시 잡아 타고 집으로 갔다.
잠을 자겠다고 누웠는데 너무 아파서 잠이 안오더라.
30분마다 자다 깨다의 연속이었다.

나 아프다고 회사 조퇴했다고 하니까
친구 김마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럼 나 홍대에 있으니까 카페로 와"

나 아파서 골골대고 밤에 핸드폰 문자 확인하는데
주기자의 문자가 와있었다.
"우리 피자헛 런치 언제 먹어?"

이 인간들아 나 아프다규!!

여튼 내 주변 철 없는 친구들의 문자에 한참을 처 웃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면,
나 어제 어지럼증을 두어번 느꼈다.
집에 가고 있는데 갑자기 휘청하더니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기분.
그니까 나는 컴퓨터가 되어본적이 없지만, 컴퓨터 재부팅 할 때 컴퓨터는 이런 기분이 들까? 싶었다.

여튼 나이 먹으니까 특이한걸 다 경험해 본다. 병원갔더니 기관지가 약하다면서 호흡기를 사라고 하지 않나? 어지럼증이라는 기이한 경험도 해보고.
나 소싯적에 넘치는 정력과 기발산으로 인하여 우리과 애들한테
정력이 좋지 않단 음식만 권유 받던 여자였는데 말이다.

결국 모든게 변하긴 변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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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만에 페인터를 깔았다.
새창을 열어서 예전사이즈의 종이를 만들었다.

DPI는 300, 사이즈는 가로 1000 세로 800.
흰 종이를 열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정작, 그릴 그림이 없다.
그리고 싶은 그림이 더 이상 없어져 버렸다.

슬픈 일이다.




친구가 물었다. 느닷없이-
"일주일 후에 죽는다면 뭘 하고 싶어?"

평소 같으면 몇번의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할 대답이다. 죽음이라니. 앞으로 세상 기회와 시간이 차단되는 일이잖아. 신중을 기해야할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답을 달았다.
사실, 이 질문은 '나 혼자 문답놀이'를 할 때 이미 생각한 질문이었다.

'내가 언제 죽을지를 알게 되는 행운'이 생긴다면,
나는 제일 먼저 수첩을 열겠다. 그리고 스케쥴을 짜겠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꼭 만나겠다. 모두 열거하지 않겠다. 시간을 길게 보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시간의 길이' 보다는 '인상'의 깊이가 중요하다. 나는 함께하는 자리마다 카메라를 대동하겠다. 그리고 묻겠다.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니?'

그 자리가 '마지막이라는 단면' 그 날카로움에 아파하며 눈물 범벅이 될지,
즐거웠던 옛 추억을 회상하며 웃음바다가 될지 모르겠다.
여튼 나는 지난 날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싶다.

어차피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기억되는 존재다.
그 기억이 길든, 짧든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내부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외부가 일치할리는 없다.
가는 날을 선고 받은 마당에, 이왕이면 나의 '외부'모습까지 알고 죽고 싶다.
그리고 이건 솔직한 심정이지만, 나쁜 소리는 안하겠지. 아마 나와 관계가 좋았던 사람만 만날꺼니까 그럴거다.

문답놀이를 시작하면서 부질없이 했던 상상이다.
근데 정말 웃긴건 상상하면 할 수록, '언젠가 해보고 싶은 일'이 되버렸다는 거다.

"편집은 내가 해줄께."
친구의 대답이 고마웠다.



 

소소한 수다 2010. 4. 2. 17:47

생긴 게 앙증깜찍큐트한 수입 차도, 값비싼 명품 '빽'도, 피부톤을 살려준다는 왕 비싼 화장품도 나는 그다지 탐나지 않는다. 대신 나는 꼭 갖고 싶은게 있다.

집.
이왕이면 연희동에 위치해 있고, 름름한 개를 키울 수 있도록 정원 딸린 내 집.
미시간 컨츄리 풍으로 빨간 체크가 도배된 커튼을 달 수 있고, 봄이 되면 5월이면 장미가 피었으면 좋겠다. 방 하나는 서재로 가득 채울 예정이다. 열다섯부터 시작된 (만화를 향한 나의 편집증)을 한방 서가에 가득 꽂아 놓고 뿌듯해 하겠다.

정말 다른건 하나도 탐이 안나는데, 집은 갖고 싶다. 그걸 갖게 되면 내 인생 절반 이상이 성공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어떡해? 평수는 넓지 않아도, 좋다. 주말 오후가 되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걸 먹으며 즐거워하리라. 좋아하는 음악을 깔고 요리를 하고 내것인 것들을 다시 확인해 보리라.

여튼 서른 중반 쯤에는 나의 집이 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연희동에 집값이 더이상 올라야하지 않고 평수 적은 마당 있는 아주 작은 집에 나와야겠지. 과연 가격은 얼마나 하려나? 여튼 언젠가 나는 그 집을 사고 행복해 하리라~




선배를 만났다. 근 1년만이던가? 작년 내가 나의 진로에 대해 방황하고 있을 때 푸념삼아 만났으니까 정말 꼭 1년만이 맞다.  
선배에 관한 추억이라든지, 자잘한 잡설은 둘째치겠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선배는 텀블러를 꺼내더니 여기다 담아 달라고 한다. 놀러워 하는 나를  향해 '가제 수건도 쓰고있어요'라고 말한다.

아주 작은 실천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속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참 잘 알고 있다. 깨달은 바가 참 많다. 감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대화를 하다보면 대다수 나의 의견과 친구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의견의 일치는 논리적으로 내가 바르고 정당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그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건 삶을 살아가는 크나큰 윤활류다. 윤활류가 필요한 시점이어서 나는 그 애를 만났다. 그리고 한참을 수다를 떨었다.  
친구가 내게 권한건 '면생리대'였다. 몇년 전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왜 사용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자기 반성에 들어갔다.
여튼 오늘 주문에 들어갔다. 써보고 후기도 올리겠다. 괜찮다면 널리 널리 사용해보라고 권해도 보겠다.

빙하가 녹고 북극곰이 멸종 위기에 처하고 아름다운 강과 그 경관이 파괴된다. 세상에는 안타까운 일이 슬퍼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안타까워 하는 마음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부디 어떤 동력으로 작용하여 결과를 가져 오길. 조금 온도가 올라가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끓는 점을 넘어서 변화를 만들길.


토요일과 어제의 문화적 충격. 작은 일이었지만 분명 내게는 큰 변화의 기점이 될 것 같았다. 그걸 멋지게 설명해보고 싶었다.
이따우 유치한 계몽적인 글을 쓰고 싶었던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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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도안의 다섯장짜리 티셔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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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망의 도움으로 완성할 수 있었슴돠 +_+!!
위쪽부터 빅뱅이론/슈퍼맨로고/로맨/슈퍼맨이발소/스피드레이서 순이예요.
(물론 정말 이 해상도 떨어지는 그림들을 다시 포토샵으로 선 다 따고 색깔 다시 먹이고 페인트 버킷으로 색깔 채워 넣고 Shift+마법툴+Shift+마법툴+Shift+마법툴+Shift+마법툴... 백번체크 하고 물방울 툴로 문질렀던 일련의 과정들만 생각하면.... 고된 노동의 과정이긴 했지만)

여튼 김마망의 도움으로 무사히 제 손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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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완전 이뻐요 ㅠㅠㅠㅠ
빨래하면 약간 색깔 빠지긴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싸구려 맛이 날것 같네염 ㅠㅠㅠㅠ
적어도 저 멀리서부터 알아보며 '어라? 저사람 나랑 옷 똑같네'라며 같은 티셔츠 입고 돌아다닐 일은 없겠죠. 다시 한번 김마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리고 저..... 이것도 샀어요.
대망의 슬램덩크 티셔츠!!! ㅋㅋㅋㅋㅋㅋ(무려 장당 2만원이었음 .....;;;;;)
오타쿠 냄새 난다고 너 아저씨냐고 놀려도 소용 없슴돠.
티셔츠 속 서태웅... 정말 잘생겼고요. 덩크하는 강백호 멋져요. 가슴설렘! +_+
(네 맞아요. 전 빠순이에요. 북산고등학교 1학년 서태웅의 빠순이.... 북산고등학교 1학년 강백호의 빠순이....)

역시 일제라 펜선 하나하나가 잘 살아서 잘나왔음  ;ㅁ;
이 반팔 옷은 아마 평생 안입고 꺼내 보기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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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책 출판 이야기가 나왔다. 덕분에 정말 쉬지도 못하고 달리고 있는 중이다. 이번 주말만큼은 어떡해서든 쉬고 싶은데 쉽지 않겠지.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근데 일하기 싫은건 어쩌란 말이냐;;;;

++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교육관련이고 송신되는 출처도 교육관련이고, 최근 기획회의를 계속하고 있는 주제도 교육관련이다. 그런데 말을 하면 할 수록 결론은 하나다. 대안이 없다. 동족방뇨,사상누각. 또 무슨 사자성어가 있었던가? 모두다 고치기엔 개벽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일 것 같고. 그냥 다른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게 답이다. 

+++
3월 운세는 대박이다. 일도 운도 다 좋단다, 바쁘면 바쁠수록 하는 일이 다 잘된단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난단다. 이토록 힘들고 피곤한데 이것이 최고 운세라면 나는 그 농담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나 대학교 4학년 때 그런 말이 떠돌았다. 여자나이 스물세살이 제일 이쁠때라고. 인생에수 두번 없이 빛날 시기라고. 나랑 내친구들은 모여서 이런 말을 했었다. '설마 이게 최고? 이거 정말 내 인생에서 최고???'
여튼, 나는 두번 다시 '대박운세'따위 믿지 않을테다.

++++
소모되고 버려지는 삶을 보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내 삶도 소모적이지 않은가? 

+++++
친구가 굉장히 명쾌한 글을 썼다. 게다가 유쾌하기 까지하다. 욕 나온다. 얘는 원래 글을 잘쓴다. 이 인간에 대한 열폭은 고등학교 때 끝냈어야 내 인생이 좀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여튼 공감간다.
무엇을 하고 싶냐고 어린애들에게 물었다. 저마다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응. 니네 중에 꿈을 이룰 수 있는 애는 10%도 안될거야. 우리도 자랄 때 어땠냐면... 뭐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군인이 되고 싶다고? 학원을 다녀야 해. 경찰이 되고 싶다고? 학원을 다녀야 해.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고? 학원을 다녀야 해.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학원을 다녀야 해. 선생이 되고 싶다고? 학원을 다녀야 해. 학원비는 뭐 일년에 몇백. 기자가 되고 싶다고? 글쓰기 말고 토익공부를 해. 그냥 아무 대학이든 가면 돼. 끝.





++++++
짤방은 오늘의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던 대자보. 서른을 한살 남겨 놓고 같은 생각을 한다해도 나에겐 실천에 옮길만한 이런 용기가 없다. 근데 스물 두살때도 내 용기는 요만했다. 스물 두살 때 이런 생각을 한다했어도 그자리였을 것이다. 이것 저것 나는 잘 따져보는 아이였다. 저런 결정을 위해선 계산할 것이 참 많다. 그리고 계산은 바로 속박이 돼버린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참 자유롭지 못하구나.
그 옛날 10대 청소년의 대표고민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같은 고민을 스무살 서른까지 하는 기구한 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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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마지막,
노트북은 뻑나고 썼던 책원고를 날리고 갑자기 돈백이 지출되어야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여기다 대고 AC밀란의 성적까지 논한다면 왜 사나 싶겠지? 그래서 관둔다.



JUST GOGO 가 끝났다.
중학교 3학년 학원 자습실에서 이책의 1권을 읽다가 쌀떡의 개그에 못이겨 먹고 있던걸 뿜었던게 기억난다. 고등학교 3학년 독서실에서도 열심히 읽었었다. 그때는 사세코가 너무 싫어서 넌더리가 나있던 상태였다. 뎡이에게 이 책의 1-3권을 빌려줬는데 결국 못돌려 받았다. (1권부터 3권 잠시 절판 상태에 있었는데, 그때 내가 얼마나 혼란에 휩싸였었던가;;;) 대학교 4학년 때 였나? 타키타가 사세코와의 경기에서 졌을 때 분을 못이기고 만화책을 집어던졌었지. 

나는 나 중심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편협한 아이라,
만화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오로지 '이 만화책의 첫장을 넘겼을 때의 나' 만을 생각하게 된다. 1권 읽자 마자 타키타를 좋아할거라고 생각했고, 마지막 32권까지 나는 오로지 타키타를 응원했다. 천재가 아닌 불완전한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것이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여튼, 좋아하는 만화가 하나둘씩 완결이 나고 있다.
(미완인것들만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지만;;;)

이런걸 보면서 세월이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내가 얼마나 변했나 반추해본다.

아직도 나는 작은 이야기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말랑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나'라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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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평일날 손대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드래곤볼, 창천항로, 슬램덩크, 프린세스, 올훼스의 창, 저스트 고고, 원피스...
아무리 심심할 지언정 20권이 넘어가는 만화책은 절대 지양해야할 것들이다.

나는 대체 왜! 국경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하고 야근까지 하고 돌아온 밤 10시 30분에 그 책에 손을 대고 말했던가. 내가 손댄 책의 제목은 H2(전체 권수 34권)! 능남전과 산왕전에서는 대사 없기로 소문난 슬램덩크보다 3권이나 더 많다;;;;

어릴적부터 주인공의 편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피구왕 통키에서는 타이거를, 축구왕 슛돌이에서는 줄리앙을, 강백호보다는 서태웅의 편이었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어쩌면 주인공의 편이 아니었던게 아니라, 주인공의 라이벌 되는 얼굴 잘난 오빠들의 편이었던걸지도;;;) 여튼 제 모든걸 던저 승부를 걸었는데도 져버리고 나면 그 허전한 심정이 너무 공감이가서....
그래서 결론은 난 히데오의 편♥ (왜 다 늙은 노처녀가 되서 보니까 가슴 설레냔말이다;;)

어릴적 무덤덤하게 넘겼던 장면 하나하나마다 숨어 있는, 정말 천재란 소리밖에 안나오는 연출. 여튼 빨리 휴일을 맞이하여 전권 다 읽고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에 가슴 아파해주고 어린시절 꿈꿀수 있는 하나의 목표가 주는 낭만에 대해서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중학교 까진 늘 첫째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을 노래한 그 만화책은 (앞으로 영원히) 금서 목록 추가다. 놓쳐버린 사랑의 타이밍을 안타까워하는 만화 따우. ㅠㅠ 어제도 몇번이고 심장을 말랑하게 주물러 놔서 왈칵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청소년의 꿈을 그린 야구 만화 보면서 대성통곡 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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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잊고 있는 것

*시사인 구독료 (5개월째 연체)
제발 지로말고 내 통장에서 그냥 빠져 나갔으면 좋겠다고!!


계속 못하고 있는 것.
*저축
이 나라가 북유럽같은 복지국가가 되지 않고서야
여든에서 백살까지 살 내 인생을 생각다면 저금을 안할 수가 없을텐데...
그래서 더더욱 진보당을 응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한양문고 가기
잊고있어서 못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가는 것
*독서
올해 들어 (만화책 제외) 나의 독서량을 안다면 다들 기절할 듯.
죄다 건드리기만 하고 아직 한권을 마무리 지은 것이 없다;;;
*자전거 타기
아직 여의도 오는 길에는 빙판이 그야말로 고구려 수레 굴러가던 만주벌판같이 펼쳐져 있음.
옥상에 있는걸 꺼내서 닦아야 한다는 부담 20%.+ 녹이 슬어 있으면 어쩌지 란 두려움 70%.
그래서 아직 외면 중.
*여행.
나 내년 서른인데 아프리카는 고사하고 서울 밖을 못벗어나고 있다 ;ㅁ;
인자기(73년이 아직도 공격수로 뛰다니 독한새끼ㅜㅜ)가 아무래도 밀란 떠날것 같은 분위기가 예감이라 더더욱 살떨림.
*우리 출연자에게 초코렛 보내기
발렌타인데이 기념으로 준비했는데 초코렛과 과자 비타민 씨 죄다 구입해 놓고는
정작 박스 살 돈이랑 소포 부칠 돈이 없네예~


요 며칠 나의 모토
절약. 25일 월급까지 내 수중에 남은 돈은 17000원
술자리 약속을 피하라.
밥은 굶어라(남과 함께 먹으면 차값이라도 내게 된다!)
택시를 타느니 차라리 걸어라.


눈물로 구하고 있습니다.
H2 전권(1-17).
개똥이 8권(8권임돠. 1권부터 7권까지는 소장 중)
플라이 투 더 스카이 6집.
Tom waits - Blood Money


변화
우리집에 살고 있던 하숙생이 이사갔다. 드디어 우리집 막둥이가 돌아오나 봅다.
하숙생이 사용하던 화장실(엄마방 화장실 이용) 쪽은 얼씬도 안했던 터라 집에 훨씬 넓어진것 같네예.


최근의 발견
-산울림 8집에는 <오줌싸개>란 노래가 들어 있음. (오줌싸개는 내 친구 ㅇㅈㅇㅎㅅ의 별명. 방구쟁이 똥싸개 트름쟁이인 이대부고 여꼴통 4인방의 별명 중 하나임 ㅋㅋㅋ)
-슈베르트는 막판에 내 취항의 칙칙한 노래를 미친 작곡했더군뇨. (덕분에 피아노 트리오 E플랫 2악장을 백번도 넘게 듣고 있음)


이딴 잡설 다 때려치고, 개편 새로운 구성에 대한 대안이 나 생각하란 말이다!!!!!
나는 이번주 내내 야근+철야+주말출근 중 ㅠㅠ
서울 올라온 선주도 못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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