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날 눈뜨게 한건 신년 문자 메세지였다.
서른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연락 한번 제대로 안한 아이들까지 뉴스속보 이미지에 '이제서른입니다'를 자막 넣어서 돌리고 그러더라. 계란 한판에 촛불 꽂은 이미지는 어젯밤에 받았다.
여튼 나는 서른의 첫날인 '오늘'을 유난떨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작정이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새해 첫날이라는 것 말고도 '1'자가 엄청 많이 들어가는 특색이 하나 있구나. 나 초등학교 때 1학년 1반 11번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나는 동네파 몇몇에게 삐져 있는 상황이다. 어제 찜질방을 가기로 한 단체 약속에서 거의 모두가 늦는 바람에 입이 잔뜩 나오고, 눈이 쌜쭉해져서 성질을 성질대로 부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상황은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 안될만큼 낯설다.
동네파 중 여럿을 상대로 삐쳐있는 건 내 인생 최초의 일이며, 자칫 잘못하다간 노처녀로 늙어 죽을 판에, (심지어 평균수명 백세 이상-_-) 서른부터 백살까지 입에 쟈크 채우고 고독을 칡뿌리 질겅이듯 씹어댈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건데, 이대로 삐진채로 우리들의 관계가 끝나는건 아닌가 촘 많이 걱정된다.
여튼 오늘 운동장을 돌면서 앞으로 시작된 서른 인생에 동네파가 없다면 어떻게 될 지를 계산해봤다. 여러가지 장면이 그려졌다. 그 중 단연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진 장면이 (구체적일 수 있다는 건, 현실 반영가능성이 높단 얘기다) 하나 있었다.
나는 메인 작가가 된다. 퇴근을 해서 집에 간다고 해도 딱히 만날 친구도 할 일도 없는 나는 남친,친구들,가족들과의 약속이 미어터지는 서브들을 집에 못가게 하고, 그들에게 같이 술먹자고 하고, 최신영화를 보자고 한다. 그야말로 진상 오브 더진상;;;
나중에 서브들끼리 네이트 미니미 대화하기로 내 욕하는 걸 발견하고는 광분 또 광분! 지난대화보기까지 클릭해서 하나하나 읽어보며 분노와 복수를 뼈에 새기고 웅담을 씹는 심정으로 지난대화들을 모두 프린트해서 후배들에게 보여주며 두껍게 하고 빨간색으로 밑줄그은 부분 (->내 욕)을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시켜??!?!!?!?
아아! 여기까지 상상하다가 너무 암담+비참해서 관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월 1일에서 내일로 미뤄진 신년회는 참석하지 않을 요량이다. (알량한 자존심이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다.)
대신 오늘은 정녕 술약속을잡고 싶다. 근데 술상대를 구해야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오줌싸개는 부산에 놀러갔으며, 신실해진 뎡이는 술보다는 찻잔을 마주하고 싶겠지. 뚱토는.... 모르겠다... 나 역시 술독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뚱토 (술)그릇의 크기와 내 (술)그릇의 크기는 좀 다른것 같다. 이를테면 맥주 3000 피쳐와 포도주 제조하는 양조장의 술통은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여튼 그 다음으로 계산한게 섭맨인데, 섭맨은 진탕 마시기 보다는, 취기가 오를만 하면 '자! 마셨으니 가자!'를 연발해서 별로다. 차라리 내가 얼근하게 취해서 만난다면 모를까.
결국 친구들 얼굴을 돌리고 돌린 결과 생각해 낸게 유*관이었는데, 그가 비연애 중이라면 나랑 술을 마셔줄 것이고, 연애중이라면 마셔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유*관의 얼굴을 떠올릴 즘에 생각해 낸게 있다. 오늘 내가 술을 먹으면서 털어놓고 싶은 고민은 남자애들은 좀처럼 공감하지 못할 '민감하고 델리케이트하고 센서티브'한 문제란 거다.
아무리 부연설명을 붙여가며 세시간 네시간 떠들어대봤자 남자애들은 이해 못할 걸. 네버.
그냥 뚱토한테 연락하는게 최선인거 같다. 우린 어깨동무하고 술에 건하게 취해서 사나이들처럼 신촌을 누빌거다. 오늘!
손가락 뿌러지도록 일기장에 일필휘지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확인해보니 김도도다. 어제 미안하다고 앞으로 늦지 않겠단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김도도가 사과해준게 너무 고마우면서도 이상하게 삐딱선을 탄다. 너만 유일하게 사과했단 식으로 쏘아붙였다. 사실 다른 애들도 사과해야하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도도가 말해줘서 사과하는건 싫다. 엎드려 절받기는 싫은거지. 그렇다고 영원히 삐질 수도 없고..... 방송계에서 최고 진상으로 손꼽히는 선배로 남을 내 모습이 선하게 보인다.
절벽 아래로 투신해 온몸이 360여개로 박살난 듯한 기분인데
이 와중에도 스머프 빌리지 스트로베리는 잘도 익는구나! 스트로베리, 블루베리, 오이, 토마토, 옥수수 다 익으면 뭐하니? 레벨 업되도 자랑할 친구 하나 없는데....ㅠㅠ 어쩜 스머페티를 키우게 되더라도(지금 레벨에서 7단계 이상 올라가야 가능한 아이템) 자랑할 곳 하나 없을지 몰라. 흑
기분이 꽝이다.
심지어 올해 계획 중 하나는 무려 "주변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 되기" 였단 말이다.
아아~
정녕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동네파와 함께 하고 싶지만 알량한 자존심때문에 동네파를 지워버린 내가 밉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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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닥 가득 일기장에 써놨지만, 결국은 술 상대를 구하지 못하고 치즈볼만 우적우적 씹으며 집에서 쥐죽은 듯이 잤다.